제목 | Re:사순 시기에 대해서?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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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2-02-23 | 조회수667 | 추천수0 | 신고 | |||||||||||||||||
사순시기에 알아야 할 특별한 전례
사순 시기에는 꼭 알고 참석해야 하는 특별한 전례는 어떤 것이 있나
1) 사순 시기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
사순 시기의 시작은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 이마에 재를 받으며 시작된다. 재의 수요일에 사용되는 재는 지난 해 성지 주일에 축성하여 한 해 동안 각 가정의 십자 고상 위에 걸어 두었던 성지 가지를 미리 걷어서 태운 후 재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다.
재의 수요일 미사의 강론이 끝난 후 사제는 기도를 하여 재를 축성한 다음 그 재를 찍어 자신의 이마에 십자 표시를 그으며 바르고 다음 모든 신자들에게 발라 준다. 이 때 사제는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시오.”(창세기 3,19)또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라는 권고를 한다.
이는 “그리하여 제 말씀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욥 42,6)는 말씀처럼 우리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와 보속의 마음 자세로 재를 얹고 사순 시기를 지내라는 초대의 말씀인 것이다.
① 성서에 나타나는 재의 의식
구약 성서에는 욥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을 받으면서 자신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잿더미에 앉았고(욥기 2,8)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의 태도도 그러하였다.(요나 3,6) 신약 성서에서도 같은 의미가 마태 복음 11장21절에 나타난다.
이런 성서의 말씀과 같이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에 이마에 재를 얹으며 인생의 무상함을 깨우치고 죄에 대한 보속을 준비하고 앞으로 다가올 부활을 준비하는 새로운 시작의 시간인 것이다.
② 재의 의미
성령의 지시에 따라 예수께서 광야로 들어섰듯이 우리도 머리에 재를 얹고 사순 시기의 광야로 들어서게 된다. 이 사십일 동안 우리는 화려함과 풍족함을 피하고 광야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사람들이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신앙인이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즉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이마에 재를 받은 인간은 죽으면 모두 결국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예식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재의 수요일에 재를 받으며 우리는 인생이 무상함인 것을 인정하며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확고한 생사관을 확립하려는 결심이 필요한 것이다.
2) 사순 시기의 절정인 성주간
재의 수요일로 시작한 사순 시기는 성주간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성주간은 성지주일부터 시작되는 사순 시기의 마지막 한 주간이다.
성주간 전례는 우리 신앙 생활의 중심이 되는 전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성삼일과 부활 성야의 전례가 그 핵심이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생전에 그들에게 하셨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었는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수난과 죽음,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그 분의 행적을 다시 더듬게 되고 생전에 하신 말씀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며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말씀과 행적들을 공동체 안에서 생활 속에 표현하고 생활화한 것이 바로 전례인 것이다.
<중고등부 교사 연합회 사순부활호, 홍승권 신부님 강좌>
역사적 개관
이미 2세기부터 그리스도교인들은 부활 축제를 앞두고 이틀 동안 슬픔의 단식을 지켜왔고, 3세기에 이르러 비록 완전한 단식은 아닐지라도 성주간 전체에 걸쳐서 단식이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그 시대에 나온 여러 문헌들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사도교훈, 디오니소스의 편지) 그리고 4세기에 와서 첫 번째 공의회인 니체아 공의회(325년)는 그 기간도 40일로 발전한 준비시기인 사순절(Quadragesima)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의 기원과 내용을 살펴보면, 부활절 준비로서의 단식과는 별도로 40일 동안의 단식이 3세기 말이나 또는 4세기 초 에집트에서 나타납니다. 이 단식은 파스카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40일 간 단식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마태 4,2; 루가 4,1) 물론 교부들은 이 부분에서 출애급 이후 광야에서의 40년 간의 유랑의 길을 생각했으며, 시나이 산에서의 모세의 40일 간의 단식을 생각했습니다.(출애 34,28; 1열왕 19,8) 하지만 이 단식은 매우 짧은 시기에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지내기 위해 참회하며 준비하는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원칙적으로 40일을 의미하는 사순절은 부활 전 6주일에 시작하지만, 로마교회에서는 공적 참회자들을 교회로 다시 받아들이는 전례가 거행되었던 성 목요일까지 연장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주일에는 단식을 하지 않았고, 또 5세기 사람들은 실제 단식하는 날을 40일로 만들고자 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럼 어떻게 계산하여 40일을 만들어 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두 단계를 거쳐야 했는데, 먼저 성 금요일과 성 토요일을 파스카 삼일에서 분리시켜서 40이라는 숫자에 계산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시작을 6주일 전 4일을 40일에 포함시킴으로써, 오늘날 수요일을 그 시작일로 계산한 것이지요. 즉 6주간×7=42일-6일(주일)+4일=40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수요일이 오늘날 재의 수요일의 기원이 됩니다.
8세기 말에 나온 로마 예식서(Ordines Romani XXII)는 재의 수요일 전례에 대해 잘 알려주고 있는데, 이 날 모든 백성들은 팔라티노 언덕 기슭에 있는 성녀 아나스타시아 성당에 모여서 교황을 따라 아벤티노 언덕의 성녀 사비나 성당으로 행렬하여 갑니다. 행렬을 하는 동안 ‘옷을 바꾸어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파묻혀 단식하며’라는 후렴을 노래합니다.
이렇듯 로마의 전례문은 영적의미를 띠고 있었는데, 10세기 라인강 지방의 프랑크 전례에서는 여기에 감각적 표현을 덧붙입니다. 그것이 바로 머리에 재를 얹는 예식입니다. 재를 머리에 얹는 것은 참회와 슬픔의 표지로써 구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초세기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관행을 개인적으로 자주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참회자들이 자신의 참회를 공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떤 특별한 전례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10 -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관행은 로마에 들어오게 되었고, 곧 공적 전례예식의 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1091년 이탈리아 베네벤토에서 열린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에 모든 성직자와 평신도, 남자와 여자 모두 재를 받을 것이다."
-최창덕(F.하비에르) 신부 / 성바울로성당주임
부활을 기다리는 사순시기란?
사순 시기 일곱 주간은 모든 전례주년의 중심이며 모든 구원 신비의 종합인 파스카를 준비하는 때다.
세례, 견진, 성체 성사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받지 않은 예비자들은 이 시기 동안 입문 성사들을 준비하여 위대한 파스카 밤에 그 성사들을 받으며, 이미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은 사순절 동안 자신의 의무를 다시금 되새기면서 새롭게 된 은총을 받는다.
이러한 사순절 40일은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사막에서 사탄과 대적하고 그 유혹자를 이기셨던 40일을 기억하는 것이다. 사막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셨으며 악마의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결정적으로 아버지한테서 받은 길, 곧 십자가의 겸손을 통한 구원을 선택하셨다. 이 시기 동안 우리 역시 하느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더욱 귀기울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셨던 길을 따르는 데 필요한 힘을 얻는다. 살아 계신 이 말씀께서는 특히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를 양육하신다. 살아 계신 빵은 그리스도를 따라 걸어가는 우리를 지탱해 주신다. 이러한 발걸음의 표상은 우리로 하여금 사막과 해방과 노예생활에서의 탈출을 거쳐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구약의 하느님 백성을 위한 기적의 시기였다. 그러나 사실 이 기적들은 우리를 위해서 미리 보여진 것들이다 (예형). 만나는 우리들에게 성체성사이며, 바위에서 솟아 나온 생수는 영의 선물이고,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찬란한 빛은 진리와 빛 자체이신 그리스도이시며, 율법은 복음이다.
40일 동안 우리는 이러한 성서의 변천을 다시금 거쳐간다. 그러나 이러한 거쳐감은 우리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만이 아니라, 특히 성서의 사건들이 교회 안에서 계속되고 그 사건이 완성됨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선하심 앞에 우리가 범한 죄를 더 예민하게 인식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께 대한 신뢰보다는 하느님의 옛 백성이 지녔던 완고한 마음을 더 닮았으며 또 닮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이 얼마나 약한지, 또 우리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를 아프게 되새긴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이라는 조건에 대해 안다는 것이 아무런 희망도 없는 낙담으로 연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실망과는 반대로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를 기다리는 자비로우신 사랑에 대해 우리의 신뢰는 더욱 새롭게 될 것이다.
전적으로 사순절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주님을 통하여 죄를 범한 사람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깨달음으로써 감동한 우리가 찬미를 바치는 때이다.
그래서 사순절은 되돌아감과 회개와 고백의 때, 즉 슬픔과 가책에서 은총으로 생명의 기쁨으로 변화하는 때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세례와 그리스도교 입문의 은총을 다시 받는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처럼 (요한 4,5-42) 예수와의 만남 또는 태중 소경 (요한 9,1-41)과 나자로 소생 이야기 (요한 11,1-45)와 같은 기적들이 우리를 위해 현재화된다. 복음에 나오는 이러한 만남과 기적들은 우리의 세례를 통해 일어나는 사건의 상징이며 예형인 것이다.
이 성사들은 주님의 생명을 다시 살게 하며 현존케 한다. 기도와 참회 (보속)는 전 교회의 “영신 수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계획인 것이다.
우리의 진지한 의지가 없다면 파스카는 시간이 흐르면서 따라 오는 것일 뿐이므로 파스카의 은총은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와 함께 교회가 전례를 통하여 가르치는 길을 따라 사순절을 보내는 사람은 그 자신 안에 새로운 무언가를 열매 맺을 것이다. 즉, 생각이 바뀌고 의향이 정화되며 행동이 개선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파스카의 신비가 살아 움직이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혼이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한다는 뜻이다. 이 시기에 경이롭고 외적인 무슨 예외적인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이 침묵 가운데 우리 실존 안에 이미 싹트기 위해, 날마다 예수의 수난에 동참하면 - 그래서 사순절 동안 십자가의 길이 중요하다 -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사순시기는 재의 수요일로 시작하여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 전에 끝난다.
항상 이 시기의 주일들은 주님의 축일과 모든 대축일에 우선한다. 이 주일들과 겹치는 대축일은 토요일에 미리 거행된다.
사순 제6주일은 성주간의 시작으로서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라고 부른다.
모든 사순 시기의 미사에서 대영광송을, 그리고 모든 전례 거행에서 알렐루야를 부르지 않는다.
사순시기 평일 미사의 감사송은 사순 감사송, 주일에는 고유 감사송을 바친다.
재의 수요일은 단식의 날이고 사순절 금요일은 금육을 지킨다. 사순시기 동안 제의 색깔은 자색이다. “기뻐하라” (Laetare) 주일인 사순 제4주일에는 장미색을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사순시기 동안 성당의 꽃장식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사순 제4주일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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