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 꿀처럼 달콤하고 기쁨에 넘친 예언자의 내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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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12-23 | 조회수8,135 | 추천수0 | |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 꿀처럼 달콤하고 기쁨에 넘친 예언자의 내면
연재를 마치며
1년의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연재가 끝났다는 사실에 마음이 홀가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방대한 지식과 신학적 성찰을 다루기에 필자의 능력이 부족하여 아쉽기도 하고 죄송한 마음도 든다. 이번 글은 그동안의 방대한 내용을 요약하고 예언자의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시대의 징표와 대응
모든 것은 번영과 발전의 결과였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하느님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고 왕궁과 성전을 세웠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가 감지되었다. 가난한 사람이 증가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대표하던 고아와 과부, 레위, 이방인에 더하여 ‘달’(불쌍하고 가련한 사람), ‘에브욘’(멸시당하는 사람), ‘아나빔’(가난하고 겸손한 사람)등의 표현이 급증했다.
창세기 선조들 시대와 이집트 종살이 시절, 광야 시절에는 모두가 가난했다. 하지만 이제 하느님 백성 안에 변방이 탄생했다. 이스라엘은 계급 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변방의 가난한 백성은 울부짖었다. 개인 탄원이 급증한 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낀 한 무리의 종교인들은 가난한 사람 곁을 지키며 하느님 백성 전체의 회개를 촉구했다. 그들은 왕권 신학자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저항 예언자의 시작이었다.
고대 근동의 어떤 나라에서도 체제 비판적이었던 종교인의 기록 자체를 확인하기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저항했던 무리의 기록 자체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에서는 대역전이 일어났다. 저항 예언자들의 기록만 남은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나라가 망한 것과 유배 때문이었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저항 예언자의 목소리에 하느님의 뜻이 실려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유배라는 힘든 세월을 저항 예언자의 후손들과 함께 보냈다.
신랄한 언어
저항 예언자들은 독특한 언어를 썼다. 우리는 그 언어를 분석하면서 그들의 처지와 내면을 조금 더 들여다볼 수 있다. 그들의 언어는 직설적이고 때로 신랄했다. 미카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 백성의 살을 먹고 그 살갗을 벗기며 그 뼈를 바순다. 내 백성을 냄비에 든 살코기처럼, 가마솥에 담긴 고기처럼 잘게 썬다”(3,3).
권력자들을 아예 인육을 먹는 사람으로 비유한 것은 권력층의 상당한 반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아모스는 하느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도 있으시다고 전한다.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5,21.23). “그리고 죄를 지어라. … 그리고 더욱더 죄를 지어라”(4,4).
물론 예언자의 말은 일종의 반어법이다. 죄를 더 지으라는 말이 아니라 제발 죄를 깨닫고 그만두라는 말이다. 이런 표현을 쓴 것은 그만큼 안타까운 현실에 속이 답답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권력자를 소돔과 고모라의 지도자들에 빗댄 이사야 예언자의 말도(1,10)비슷하게 새길 수 있다.
상징 행위
저항 예언자들은 기상천외한 상징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사야는 다가올 재앙을 예고하려고 3년 동안 알몸과 맨발로 다녔다고 한다(20,2-4).
에제키엘은 왼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390일을,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40일을 누워 있었고(4장), 예레미야도 멀쩡한 옹기를 사람들 앞에서 거듭 깨뜨렸다(19장).
예언자들의 이러한 상징 행동은 그 자체가 급박한 메시지였다. 백성들에게 뭔가 보여 주고 깊이 생각하게 만들어 그들을 회개로 이끌려는 것이다. 이사야는 커다란 서판에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8장).
시적 언어와 비유
권력자를 질타하던 예언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큰 의례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백성에게 하느님의 뜻을 널리 알릴 수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독특한 화법을 즐겨 사용했다. 간단하고 쉬우면서 백성들 사이에 쉽게 퍼져 나가는 화법이다.
그것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첫째는 노래였다. 예언서 대부분이 노래, 곧 운문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이런 연유다. 둘째는 비유다. 짧은 이야기를 통해 백성의 깨달음을 유도하는 것이다. 시나 비유는 쉽고 간단하면서도 그 자체에 깊은 깨달음을 담고 있기에, 한 번 듣고 깨달으면 암기도 쉽고 다른 사람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하기도 쉽다는 특징이 있다. 그들은 제단과 의례가 아니라,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파한 것이다.
때로는 비유와 운문과 상징 행위 등이 서로 엮여 있기도 한다. 이사야서 27장의 포도밭 노래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노래이면서 쉽고도 깊은 의미의 비유가 들어있다.
예레미야는 18장에서 옹기그릇과 옹기장이의 비유를 들고, 19장에서 스스로 옹기그릇을 깨는 상징 행동을 한다. 하느님께 붙잡힌 예언자에게는 제도적 제약과 가난, 기회에서 제외되는 현실 등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방법은 예수님의 방법과 퍽 닮았다.
하느님께서 채우신 내면
예언자들이 이렇게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떤 급박하고 절대적인 내면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사람들의 눈과 귀를 붙잡아서 그들의 마음을 하느님께 돌려놓아야 한다는 절대적인 명령이 마음에서 요동쳤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결국 예언자들의 내면은 하느님의 뜻을 이 악한 세대에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급박하고 절실한 요구로 들끓었던 것이다. 이것이 예언자를 볼 때 가장 중요한 점이다.
예언자들의 이러한 내면은 당대 사람들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들의 하느님은 타락한 지도자들이 믿는 하느님과는 다른 하느님이었다. 한마디로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 백성 안에 ‘서로 다른 믿음의 무리’가 탄생했다. 조상도 같고 전통도 같고 핏줄도 같은 하나의 백성이지만, ‘너와 나의 믿음은 다르다.’고 말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예언자들은 그런 ‘다른 내면’ 때문에 고통과 탄압을 받았지만, 하느님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이 믿는 하느님이 옳고, 부패한 권력자들이 믿는 하느님이 틀렸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하느님께 붙들리는 체험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공통된 내면이다. 그들은 하느님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한결같이 고백한다.
예언자들은 단순히 인간적 차원에서 정권에 저항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한 ‘하느님의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된다. 그래야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일하심과 그분의 메시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언서는 정치 · 종교적 대립만을 전하는 문헌이 아니라 그런 대립 속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문헌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을 통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문헌이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법
이런 면에서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잘 드러낸다. 이스라엘의 가난한 사람이 늘어나고 개인과 공동체가 타락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개인의 내면을 울리심으로써 역사에 개입하셨다. 그 내면의 울림에 공감하고 순응한 사람들은 저항 예언자가 되었고, 결국 고대 근동 종교의 독특하고 유일한 현상을 이끌었다.
예언서는 그들의 내면에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그런 말씀에 순응한 사람들의 성찰과 실천은 어땠는지를 전하는 문헌이다. 그러므로 예언서에서는 권력을 비판하는 날선 언어 너머를 봐야한다. 그것은 신과 인간을 대하는 근본적 선, 권력과 가난을 대하는 태도, 세상을 사는 참된 자세 등을 포함할 것이다.
기쁨의 유일 섬김
그런 예언자의 내면을 한마디로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한 분만(mono-) 섬긴다(-latry).’는 ‘유일 섬김’(monolatry)이다. 그들은 오직 이집트 탈출의 하느님의 가르침에만 충실하고, 그분만을 섬긴다는 마음으로 그들의 마음은 충만했다.
구약 성경에 ‘유일신론’(monotheism)의 사상은 분명하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은 본디 ‘유일신 존재 증명’ 같은 난해한 논리를 펴지 않았다.
더구나 저항 예언자들은 그러한 복잡한 논리적 증명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던 사람들이었다. 그저 지금 여기서 그분만 섬기라는 가르침으로 몸과 마음을 채우고 순간순간을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다. 유일 섬김은 유일신론의 핵심이다. 그런 유일 섬김의 요청과 실천이 구약 성경의 예언서를 채운다.
그런데 그렇게 한 분만을 섬기고 사는 그 마음은 어떤 느낌일까?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에서 그 느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우라는 명령에 순종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하여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3,3).
비록 외적으로는 고난과 박해를 당했지만 그 내면을 충만히 채운 하느님의 말씀은 꿀처럼 달았고 기쁨으로 충만하였다는 고백이다.
‘복음의 기쁨’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자고 권고하신 프란치스코 교종의 가르침이 다시금 떠 오른다. 예언자를 묵상하며, 기쁜 마음으로 한 발 내딛는 신앙이 되길 청한다.
* 한 해 동안 다달이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를 집필해 주신 주원준 박사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회 위원이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 위원이다. 저서로 「구약 성경과 신들」, 「신명기 주해」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8년 12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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