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 묵시록 함께 읽기: 요한의 소명과 일곱 교회에 보낸 서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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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01-07 | 조회수8,463 | 추천수0 | |
[요한 묵시록 함께 읽기] 요한의 소명과 일곱 교회에 보낸 서간 (1)
요한 묵시록 1장 9절-3장 22절의 말씀은 ‘환시 중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을 만난 요한의 체험’(1,9-20)과 ‘일곱 교회에 보낸 서간’(2,1-3,22) 형태로 제시되는 ‘예언’ 부분입니다.
환시 중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을 만난 요한의 체험
1장 9-20절에서 요한은 자신이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는지 밝힙니다. 이 대목은 ‘요한에게 소명의 말씀이 내리는 부분’(1,9-11)과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환시 부분’(1,12-20)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요한에게 소명의 말씀이 내리는 부분’(1,9-11)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 파트모스라는 섬”에 갇혀 지내던 요한이 어느 주일에 성령에 사로잡혀 체험한 소명 환시를 전해줍니다. 파트모스 섬은 에페소에서 남서쪽으로 100km가량 떨어진 바위산으로 된 길이 16km, 너비 9km 정도의 섬으로, 로마 시대 유배지였습니다. 여기에서 요한은 자신이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신앙을 증언하는 “나 요한”(1,9; 22,8)은 환난을 겪고 인내를 배웁니다. 여기서 ‘환난’은 박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박해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덕목이 ‘인내’입니다. 인내는 주님이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기초하는 것이고, 주님의 사랑으로 지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팔 소리’는 통상 하느님의 현현이나 종말의 묘사에 등장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도록 주의를 환기하는 역할을 합니다. 큰 목소리가 ‘내 뒤에서’ 들렸다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가 갑자기 주어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환시를 보기 전에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목소리가 나팔 소리처럼 크다는 것은 말씀을 경청해야 함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요한은 환시 가운데 보고 들은 것을 양피지 두루마리에 기록하여 아시아 속주에 속한 일곱 교회에 전하라는 소명을 받습니다. ‘기록하여 … 보내라.’는 말은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가서 말하라.’고 사명을 내리시는 것과 비슷합니다.(이사 6,1-13; 예레 1,1-10; 에제 1,1-3,27; 아모 7,14-17 참조)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함과 보편성을 상징하므로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은 일곱 교회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일곱 교회와 같은 상황에 처한 모든 교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환시 부분’(1,12-20)에서 요한은 ‘일곱 개의 황금 등잔대’ 한가운데에 계시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에 대해 묘사합니다. ‘일곱 황금 등잔대’는 일곱 교회, 곧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성스러운 곳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황금 등잔대 가운데 계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현존으로 가득 찼다는 의미입니다. 유다교 묵시문학 안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은 종말에 절대 왕권과 재판권을 가지고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천상 인물로서 상징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에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살아 계시는 실제 인물 예수님이십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지도자들을 통하여 교회를 다스리는데, 그분의 유일한 무기는 ‘쌍날칼’로 표현되는 ‘말씀’입니다. ‘날카롭다는 것’은 말씀이 강력하고 효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 보고, 당신의 가르침을 지키도록 하십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 종말까지 구원의 성사가 되기 위하여 쌍날칼과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교회 안에서 실제로 현존하시며 시련과 박해를 당하는 신자들을 친히 돌보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하느님이나 천사의 발현을 목격하고 두려움에 떠는 모습은 소명을 받는 장면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납니다. 발 앞에 엎드리는 자세는 두려움과 경배의 몸짓이며, 묵시록 19장 10절과 22장 8절에서도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현현을 목격한 사람이 두려움에 떨고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명 환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은 하느님처럼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죽었었지만 살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과 저승의 열쇠, 곧 주권을 쥐고 계십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 서간
2장 1절-3장 22절은 일곱 교회 공동체의 신자들에게 칭찬과 책망, 그리고 회개에로의 초대 말씀을 담아 보낸 서간입니다. 요한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자신이 본 것을 기록하고 보낸 일곱 편지는 전체 교회에 전하시는 심판 · 정화 · 훈화 · 강복에 대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일곱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의 처지에 따라 내려진 외적이고 영적인 판결을 듣습니다. 스미르나와 필라델피아는 회개하라는 충고를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한 반면, 사르디스와 라오디케이아는 심각한 경고와 강한 질책을 받습니다. 한편 에페소와 티아티라와 페르가몬은 칭찬과 질책을 동시에 받습니다. 일곱 교회가 저마다 서로 다른 판결을 듣지만, 그들에게 보낸 메시지에는 공통된 구조가 있습니다. 첫째, ‘…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로 시작합니다.(편지 발신 명령과 수취인) 둘째, ‘…가 이렇게 말한다.’(그리스도의 자기소개) 여기서 말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분의 신분을 저마다 달리, 그리고 매우 생동감 있게 묘사합니다. 셋째, ‘나는 네가 한 일 …을 안다.’(각 교회에 대한 긍정적 또는 부정적 평가) 넷째, 칭찬과 비난을 동반하는 덕행이나 잘못이 나열되고 충고가 뒤따릅니다.(개별 훈계) 다섯째, 승리하는 사람에게 약속이 주어집니다.(세상 종말의 선물 약속) 여섯째,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일반적 훈계)라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① 에페소 교회에 보낸 요한의 편지(2,1-7)
에페소는 인구 25만 여명의 아시아 속주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로, 육지와 바다를 잇는 교역의 중심지였습니다. 60년경에 교회 공동체가 창설되었고, 바오로 사도가 제3차 전도여행 동안 3년간 머물렀습니다.(사도 20,31 참조) 아르테미스(디아나: 사냥, 출산의 여신) 여신 숭배의 중심지였고(사도 19 참조), 나중에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바치는 신전이 세워진 곳입니다.
‘오른손에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천사’(교회의 영적 지도자)에게 써 보낸 서간을 통해 칭찬과 질책을 동시에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 곧 거짓 순회 설교사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내고,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이겨냈다는 점에서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지녔던 사랑”, 곧 신앙을 받아들일 때 지녔던 그리스도와 동료 신자들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저버린 점에 대해서는 질책을 받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의 등잔대를 치워 버리겠다고 경고하시는데, 등잔대가 치워진 공동체는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편 영지주의와 도덕적 자유주의에 빠진 자들이라는 것 말고는 알려진 바가 없는 니콜라오스파의 소행을 싫어함에 대해 칭찬을 받습니다. 이어서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는 말씀이 주어지고,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창세 2,8-9; 에제 47,12; 묵시 22,2 참조)의 열매를 먹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② 스미르나 교회에 보낸 요한의 편지(2,8-11)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천사’에게 보낸 일곱 개의 서간 가운데 가장 짧은 편지입니다.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서간에서처럼 회개하라는 충고를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한 모습에 대하여 칭찬과 격려만을 담고 있습니다.
‘몰약’이라는 뜻의 스미르나(오늘날의 이즈미르)는 에페소에서 북쪽으로 56km 떨어진 항구도시로, 아시아 속주 가운데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묵시록이 쓰이기 300년 전에 ‘여신 로마’(Dea Roma)에게 바치는 신전이, 또 26년에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바치는 신전이 세워졌는데, 이후 로마 숭배와 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황제를 주님으로 신격화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주님’이라는 칭호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신앙심을 중상하여 박해하도록 하였습니다. 요한은 이 유다인들을 사탄의 무리라고 질책합니다. 그리고 비록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아 부유한 도시에서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되었지만, 영적으로는 신앙 안에서 부유한 삶을 살고 있다고 칭찬을 받습니다. 스미르나는 150년경에 유다인들의 충동으로 일어난 박해로, 주교 폴리카르포가 군중 앞에서 카이사르 황제에 대한 숭배냐 화형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처지에서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에 순교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열흘 동안’(짧은 기간)의 박해를 잘 견뎌 내라고 권고하십니다. 끝까지 충실한 승리자는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이고, 두 번째 죽음인 영적 죽음(최종적이며 영원한 죽음: 묵시 20,6.14; 21,8; 마태 10,28; 루카 12,4-5 참조)의 화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소공동체와 영적 성장을 위한 길잡이, 2019년 1월호, 조성풍 신부(사목국장)]
[요한 묵시록 함께 읽기] 요한의 소명과 일곱 교회에 보낸 서간 (2)
지난 호에 이어 요한 묵시록 2장 12절-3장 22절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③ 페르가몬 교회에 보낸 요한의 편지(2,12-17)
페르가몬은 기원전 2세기 이래 로마의 아시아 속주의 수도로서 큰 도시는 아니지만 학문과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치료의 신(神) 아스클레피우스를 숭배하던 본거지로, 아시아 속주 중에서 가장 먼저 황제 숭배를 시작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날카로운 쌍날칼을 가진 이’는 이 도시를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페르가몬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지켰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충실하게 지켜 칭찬을 받습니다.
한편 발라암(모압 땅에서 하느님을 배신하도록 사주한 인물)과 니콜라오스파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을 거부하고 우상 숭배를 고수하는 자들이 있음에 대해서는 질책합니다. 그러면서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숨겨진 만나’와 ‘흰 돌’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숨겨진 만나’는 천상 잔치의 음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④ 티아티라 교회에 보낸 요한의 편지(2,18-29)
티아티라는 필리피에서 선교하던 바오로 사도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옷감 장수 리디아의 고향입니다.(사도 16,11-15 참조) 이곳은 양모, 직물, 옷감, 염색, 피혁, 도자기, 빵, 노예 매매, 철물 등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조합을 형성하여 도시의 삶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들은 이교 신의 신전이나 사당에 제물로 바쳤던 동물의 고기를 즐겨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조합에 속하지 않은 채 경제 · 사회적으로 고립되든지 아니면 그들과 어울림으로써 하느님을 배반할 것인지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진 이, 곧 하느님의 아들’이 사랑, 믿음, 봉사와 인내의 삶을 살아가는 티아티라 공동체를 칭찬합니다. 한편 이제벨(아합 임금의 아내로 바알 숭배를 퍼뜨린 인물)의 가르침에 따라 우상 숭배에 빠진 자들을 질책하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큰 환난과 죽음으로 징벌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한’과 ‘샛별’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 자신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뜻입니다.(묵시 22,16 참조)
⑤ 사르디스 교회에 보낸 요한의 편지(3,1-6)
사르디스는 고대 리디아 왕국의 수도로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로마 시대에 이곳은 에페소처럼 부유한 상업 도시였습니다. 기원후 17년에 큰 지진이 일어났으나 티베리우스 황제가 5년 동안 세금을 면제해 주면서 곧바로 도시를 재건했고, 다시 양모 산업의 중심 도시로 번창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는 사르디스 공동체를 강하게 질책합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았으므로 회개할 것을 요청하시며, 깨어나지 않으면 도둑처럼 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편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몇 사람은 ‘흰옷’을 입고 함께 다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새 생명에 동참하여 제자가 되어 그분을 따라다닌다는 뜻입니다. 승리하는 사람은 ‘흰옷’을 입을 것이고, 선택된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릴 것입니다.
⑥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낸 요한의 편지(3,7-13)
필라델피아는 기원전 2세기에 리디아와 프리기아 지방에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건설된 도시입니다. 사르디스를 황폐화시킨 기원후 17년 지진으로 이곳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회개하라는 충고를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합니다. ‘거룩한 이, 진실한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는 이곳이 작고 연약한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굳게 지켰음을 칭찬합니다. 스미르나처럼 이 공동체의 가장 큰 문제도 유다인의 박해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의 발 앞에 엎드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는 사람을 하느님 성전의 기둥으로 삼을 것이며, 또 하느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당신의 새 이름을 그에게 새겨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곧 승리자는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속하며, 하늘 도성의 시민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⑦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보낸 요한의 편지(3,14-22)
라오디케이아는 시리아 제국의 안티오코스 2세(기원전 261-246년 재위)가 자기 부인인 라오디케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입니다. 로마 시대 금융의 중심지이며, 안약, 옷감, 양탄자 제조업으로 유명했습니다. 기원후 61년 대지진이 났을 때도 제국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재건할 정도로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60년대에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에서 선교하는 동안, 동료 에파프라스가 히에라폴리스, 콜로새와 더불어 복음을 전파한 곳입니다.(콜로 4,12-13 참조) 90년대에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영적으로 급격히 쇠락하였는데, 공동체 구성원들이 물질적 풍요로움으로 사치와 쾌락에 빠져들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심한 질책을 받는 것도 라오디케이아 교회입니다. ‘아멘 그 자체이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 창조의 근원인 이’는 이 공동체가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신앙을 지녔기에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고 강하게 질책합니다. 라오디케이아 공동체는 물질적인 부와 더불어 스스로 영적인 부를 갖추었다고 여기지만,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질책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불로 정련된 금’과 같은 순수한 신앙, 깨끗한 ‘흰옷’, 영적으로 눈먼 이를 치유할 수 있는 ‘안약’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작지만 충실한 필라델피아 공동체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자만자족하고 믿음이 미지근한 라오디케이아 공동체도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이렇게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승리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어좌에 함께 앉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앞에서 살펴본 일곱 교회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상관없이, 모든 교회 공동체에 해당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모든 교회는 불완전하고 어떤 형태로든 나름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입니다. 에페소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고, 스미르나는 환난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으며, 페르가몬은 교의적 혼란을, 티아티라는 도덕적 혼란을, 사르디스는 영적 죽음을, 필라델피아는 견고함의 상실을, 그리고 라오디케이아는 냉담을 겪고 있습니다. 둘째, 어느 교회도, 죽었다는 평가를 받는 사르디스조차도 그리스도의 구원 계획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셋째, 모든 교회는 회개하기 위해서 또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일곱 개별 교회에 전해진 편지이지만 후렴처럼 반복되는 마지막 당부,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2,7.11.17.29; 3,6.13.22)는 오늘날의 교회에도 해당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역사 안에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오늘날 우리의 믿음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온갖 의혹과 두려움, 어려움과 적대적인 환경에서도 믿음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와 격려의 말씀,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이 절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윌리엄 홀만 헌트(William Holman Hunt)는 〈세상의 빛〉이라는 작품에서, 예수님께서 두드리시는 문에 손잡이가 없는 것을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억지로 열고자 강요하지 않으심을 일러줍니다. 그분께서 들어오실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 드립시다! [소공동체와 영적 성장을 위한 길잡이, 2019년 2월호, 조성풍 신부(사목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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