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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 성경 다시 읽기: 예언서, 어르고 달래시던 아버지 하느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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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1-15 조회수9,067 추천수0

[구약 성경 다시 읽기] 예언서, 어르고 달래시던 아버지 하느님의 편지

 

 

“배반자 이스라엘아, 돌아오너라.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너에게 성난 얼굴을 보이지 않으리라. 나는 자애로우니 영원히 진노하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3,12)

 

 

‘예언’이란 무엇인가

 

16세기 프랑스에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천문학자요 의사였는데, 소위 ‘예언자’로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지요. 지난 세기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그가 프랑스 혁명, 제2차 세계대전, 히틀러의 출현, 달 착륙 등 수많은 사건들을 예언했다고 난리를 떨었고 그때마다 책이 엄청나게 팔렸습니다. 그런데 사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들은 주로 4행시 형태의 글로, 표현이 매우 상징적이고 문학적입니다. 예를 들어 1999년 지구 종말에 관한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1999년 7월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 앙골모아 대왕을 부활시키기 위하여. 그때를 전후하여 마르스는 행복의 이름 아래 지배할 것이다.”라는 식입니다. 이런 시에 대한 해석이란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요. 특정 사건이 있고 난 뒤 옛날 글을 들추면서 ‘애매했던 그 얘기가 이 일을 말한 것이었군.’ 하고 끼워 맞추는 식이라면 그것을 예언이라 할 수 는 없습니다.

 

세상에는 예언이라 쉽게 일컬어지는 수많은 현상들이 있고, 여전히 사람들은 미래의 일을 맞추는 데 열광합니다. 아홉 개가 틀려도 하나만 맞추면 온통 거기에 관심을 두기도 하지요.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참된 예언’이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꿰뚫어 보시는 분, 세상을 지으시고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느님 그분에게서 직접 받은 말씀(預言)입니다. 미래에 있을 일을 앞서 예고한 것(豫言)인지가 본질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삶을 성찰하여 변화를 가져오도록 깨우치고 촉구하는 것’이 참된 예언자의 사명입니다.

 

 

구약 시대 예언 운동의 시작

 

구약 성경 예언서는 히브리 성경에서 대예언서로 구분되는 세 권(이사, 예레, 에제)과 소예언서 열두 권(호세-말라)에다가 애가와 바룩서와 다니엘서를 합한 총 열여덟 권입니다. 전통적으로 예레미야와 관련된 책들인 애가와 바룩서는 예레미야서 뒤에 두고, 다니엘서는 책의 분량과 작중연대(作中年代)를 고려해 에제키엘서 다음에 놓지요. 이렇게 구약 성경 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예언서들(이사-말라)을 남긴 이들을 통틀어 ‘문서 예언자들’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문서 예언자들보다 훨씬 앞서 이미 예언자라 불렸던 이들도 있습니다. 성조시대의 아브라함(창세 20,7), 이집트 탈출 시대의 모세(신명 18,15.18)와 아론(탈출 7,1)과 미르얌(15,20), 가나안 정착시대의 여호수아(집회 46,1), 판관시대의 드보라(판관 4,4), 왕국시대를 열었던 사무엘(1사무 3,20) 같은 이들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 창조 때부터 우리와 함께 계셨고(창세 1,3; 요한 1,1), 단 한순간도 우리 곁을 떠나셨던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예언운동은 기원전 9세기경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엘리야와 엘리사에게서 시작됩니다. 이들은 오므리 왕조시대(기원전 886-841년)에 팽배했던 바알신앙과 종교혼합주의를 강하게 질책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믿음을 회복하라고 촉구했던 이들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관련 이야기는 예언서가 아니라 ‘역사서’인 열왕기 상· 하권에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1열왕 17-19장; 21장; 2열왕 1-9장; 13장),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단지 임금들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예언자들과도 언제나 함께해 왔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문서 예언자들의 시대상(時代相)

 

예언서는 역사서와 같은 시대(가나안 정착시대-희랍 지배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러나 역사서가 현재의 삶을 진단하기 위해 과거 역사 기술에 힘쓴다면, 예언서는 곧 닥칠 미래를 합당하게 준비하기 위해 현재를 진단하고 변화를 요구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언서는 정치, 종교, 경제, 사회정의 전반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이 당면했던 현실 문제를 하느님의 시선으로 다루고 있지요. 예언서 각권에 대해서는 몇 회에 걸쳐 앞으로 다룰 것이니, 여기에선 어느 예언자가 어떤 시대에 속하는지만 간략히 언급하겠습니다.

 

 

 

첫 문서 예언자들은 아시리아의 첫 침략을 목전에 둔 시대(기원전 8세기)에 등장했습니다. 임금들과 백성들은 현재의 평화와 풍요를 누리는 데 만족하며 미래를 무조건 낙관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고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니, 예언자들이 걱정하는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곧 닥쳐올 위기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든 예언자들은 당대의 신앙의 붕괴가 머지않아 지독한 국가적 위기(이방 강대국의 침략, 살육과 약탈, 왕국의 멸망)로 이어질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임금도 몇몇 있었지만, 대다수 임금들과 백성의 모습은 결국 바빌론 유배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돌아서서 이방 신들을 섬기고 주변 강대국들에게서 인간적 도움과 해결책만을 찾았던 불신의 백성이었기에, 그들은 견책을 위한 징벌과 정화를 위한 보속을 반드시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예언자들은 바빌론 유배 중에 있는 백성에게는 ‘하느님의 위로와 희망’을, 유배에서 돌아온 백성에게는 ‘회복과 구원에 대한 약속’을 선포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를 북돋았습니다.

 

 

문서 예언자들의 주요 활동

 

첫 문서 예언자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아모스와 호세아입니다. 아모스는 주로 이스라엘이 당면한 사회정의 문제에, 호세아는 종교적 타락 문제에 집중하면서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곧 닥칠 심판의 때를 경고했지요. 하지만 북이스라엘은 이를 무시하고 사회불의와 우상숭배로 점철된 역사를 고집스레 살아가다, 결국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 손에 처참히 멸망하고 맙니다.

 

이후 남유다에서도 본격적으로 문서 예언자들이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시리아의 공세가 계속되던 시절, 이사야는 궁중에서 활약하며 임금과 지도자들에게 외세가 아닌 오직 하느님께 의탁하라 호소했고, 같은 시기 미카는 도성 밖에서 대지주들과 상류층에 의한 경제정의 붕괴와 인권유린을 비판했습니다. 이후 바빌론 유배 전까지 남유다에서는 예레미야와 스바니야, 나훔, 하바쿡 예언자가 활약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창조주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선포하며 백성에게 진심 어린 ‘마음의 할례’를 요구했고, 다른 예언자들 역시 유다와 예루살렘을 거슬러 예배의 타락과 잘못된 정치적 판단을 질책하고 이방 민족들에게는 스스로의 교만으로 인한 멸망을 경고했습니다. 에제키엘은 제1차 바빌론 유배(기원전 598년)를 겪고서도 여전히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있는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회개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제2차 바빌론 침공(기원전 587년)으로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바빌론 유배 시기(기원전 587-538년)를 기점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왕국의 멸망으로 이전 예언자들의 말씀이 옳았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반성과 회개로 돌아섰습니다. 밑바닥까지 추락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느님의 도우심과 구원만 을 열망하게 된 것이지요. 이때부터 예언자들(에제키엘, 제2이사야)은 폐허 속에서 용기를 잃은 하느님 백성에게 다시 희망을 불어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50여 년의 유배생활, 그 정화와 보속의 시기를 거쳐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성전 재건을 위해 백성을 격려하고(하까이, 즈카르야) 해이해진 전례 규정을 다시 세우라 독려하며(말라키),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을 정의와 평화로 다스릴 메시아를 보내 주실 것이라는 메시아 구원 사상을 선포했습니다.(제3이사야, 즈카르야, 다니엘) 그렇게 구약 성경 전체의 마지막 구절인 말라키 3장 22~24절(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엘리야의 사명)은 신약 성경의 첫 이야기인 마르코복음 1장 1-8절(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의 선포)과 자연스레 연결됩니다.

 

 

박해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외치다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해야 하는 것만큼 곤욕스런 일도 없습니다. 모두가 ‘이대로 좋다’고, ‘아무 문제없으니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할 때에, 입바른 쓴소리를 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지요. 그것도 권력자들 앞에서, 온 백성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말입니다. 사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의 신분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예를 들어 이사야는 귀족 가문 출신, 예레미야와 에제키엘은 명망있는 사제 가문 출신, 아모스는 목양업자(단순한 목동과는 달리 큰 가축 떼를 소유)였고, 다른 대다수 예언자들도 백성의 지도자들과 설전을 벌이고 예언 전승을 남길 정도의 고등 교육을 받은 소위 ‘한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예언자들이 명망을 잃고, 가족과 친지와 고향을 잃고 외톨이가 되어 결국엔 유배를 가거나 목숨을 잃기까지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기를 그칠 수 없었던 이유를 우리는 예레미야의 고백 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는 지도자의 무능함, 하느님께 오롯이 의탁하는 용기의 부재, 잘못된 삶을 즉시 돌이키지 못하는 백성의 우유부단함은 구약 시대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주님의 인내가 모자란단 말이냐? 그분께서 그러한 일을 하시겠느냐?”(미카 2,7),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느냐? 우리에게는 재앙이 닥칠 리 없다.”(3,11) 하며 안일한 일상을 이어가다 비참한 운명을 겪어야 했던 구약의 백성의 어리석음이 오늘 우리에게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혹여 하느님을 더 이상 목말라하지 아니 하고 그냥 이대로가 좋다며 살아가는 가족, 동료, 이웃이 주위에 있다면, 그들을 위해 당장 나서야 하는 ‘하느님의 예언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돌 같은 마음을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만드시고 당신 말씀의 불씨를 심어주시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기를 마음모아 기원합니다.

 

[월간빛, 2019년 1월호,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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