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천상과 지상의 전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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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02-13 | 조회수7,677 | 추천수0 |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천상과 지상의 전례(Eine himmlisch-irdische Liturgie)
이사야서 6장은 불가사의한 이야기 하나를 전합니다. 모든 게 이해하기 힘든 환시에 속하지요(이사 6,1-13 참조). 이사야 예언자는 갑자기 천상 전례 한가운데로 드높여집니다. 그는 하느님을 뵙습니다. 물론 그가 본 것은 그분의 옷자락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옷자락만으로도 이미 하늘 성전이 온통 가득 차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느님의 어좌 둘레를 날고 있는 사랍(세라핌)들을 봅니다. 이 사랍들은 사랑에 불타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세 번에 걸쳐 ‘거룩하시다’를 외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어좌 둘레의 천사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외치는 그 소리가 하도 커서 하늘 성전의 문지방이 흔들릴 지경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그다음에 이어질 일의 전조이자 도입부일 따름입니다. 곧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에 파견됩니다. 머나먼 땅 끝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몸소 택하신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보내집니다. 이 백성을 거쳐 가는 길을 통해서만 세상이 제 질서를 찾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선택에 대해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의 사명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 이스라엘의 사명인데도 그렇습니다. 때문에 환시의 마지막 부분은 성경에 적합한 신학적 언어로, 하느님 백성이 보려 하지 않고 또 깨닫지 않으려 한다고 말합니다. 이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는 막혔으며, 눈은 들어붙었다고 말합니다(이사 6,9-10 참조).
비현실적 이야기?
하늘 성전과 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하느님의 옷자락, 그리고 하느님의 어좌에 둘러선 천사들(세라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곧바로 이런 의심을 품습니다. “말도 안 돼! 그런 걸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없어. 열심한 신앙심이 그런 환시를 만들어낸 거야. 21세기에 그런 동화적 환상이 무슨 의미가 있담!”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너무 안일하게 보는 사람입니다. 이사야서의 이 이야기 전체가 말하고 있는 바가 실제로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날마다 경험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부르신 이들이 들으려 하지 않는 경우가 수없이 많습니다. 하느님 것을 위해 일하는 데 큰 능력을 받은 이들이 그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려는 경우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은 돌로 된 심장을 가졌습니다. 기꺼이 자신을 파견해주시라고 나서는 이들을 하느님은 늘 적게만 발견하십니다.
물론 이 적은 수의 사람들은 이사야처럼 스스로 자신에 대해 분명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이사 6,5)
이 부분에서 이사야서의 말씀은 놀라우리만큼 정확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 우리 자신 안의 현실을 예리하게 꿰뚫어봅니다. 이 점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저는 이 이야기가 말하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계시고, 그분이 한없이 거룩하시며, 실제로 그분을 체험하는 이들은 다만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일찍이 베드로 사도도 비슷한 체험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려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자,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에게서 ‘거룩하신 하느님’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면서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과의 만남 안에서 자신의 미천한 존재를 알아차립니다. 그러니 그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하지만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미천함에 대한 체험이 마지막 말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이사 6,7)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베드로에게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
이는 달리 말해, 하느님 것을 위해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하느님에게는 아주 귀하고 중요해서 그분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런 말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곧 아무리 보잘것없고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봉사일지라도 하느님 것에 대한 봉사는 무엇이나 이미 그 자체 안에 한 가닥 치유와 용서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화해가 내재되어 있다고요.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룩해지는 일 말입니다.
삼중의 ‘거룩하도다’
이사야서 6장이 전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파견 소명은 기원전 739년에 일어납니다.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이지요.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에 파견된 자신의 강력한 소명 체험을 일이 일어난 뒤 곧바로 이른바 ‘비망록’의 형태로 적어두었음이 분명합니다.
삼중의 ‘거룩하시다’라는 외침은 이미 당시 예루살렘 성전 전례의 일부였습니다. 교회는 이 삼중의 ‘거룩하시다’를 매우 이른 시기에 성찬례 거행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감사 기도에서 감사송이 끝난 다음에 바로 이 ‘거룩하시다’를 노래합니다. 그러니 미사의 이 ‘거룩하시다’는 거의 삼천 년의 역사를 지녔습니다. 거의 삼천 년 동안이나 이 ‘거룩하시다’가 처음에는 예루살렘 성전 전례에서, 이어 유다인들의 회당 예배에서, 그다음엔 교회의 성찬례에서 울려 퍼진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이런 예를 찾아볼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제도적으로 그처럼 오래되고, 삼천 년 전 그대로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살아 있는 텍스트가 달리 또 없습니다.
물론 그 오랜 역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삼중의 ‘거룩하시다’가 하느님의 어좌 둘레에 선 천사들의 찬양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천사들의 이 찬양을 바로 하느님 예배에서 감히 함께 외친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의미를 지닙니다.
곧 교회는 감히 그렇게 함으로써, 지상의 공동체가 함께 모여 하느님의 업적과 하느님을 찬양하는 바로 그 순간에 하늘과 땅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선포합니다. 곧 교회의 전례에서, 지상에 모인 공동체의 하느님 찬양과 천사들의 하느님 찬양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 하늘이 이미 우리 한가운데 있습니다.
이처럼 주일에 함께 모여 와 거룩한 집회에서 드리는 찬양은 교회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큰 것입니다. 하느님 찬양보다 더 위대하고 더 나은 일은 없습니다. 삼중의 ‘거룩하시다’를 노래하는 가운데 우리는 이미 영원 속에 들어가 사는 것입니다. 영원이란 오롯한 하느님 찬양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온전히 자신을 잊고 축복으로 충만한 가운데 오직 하느님만을 찬양하는 것이 바로 영원입니다. 우리의 영원도 가장 순수하고 가장 심오한 기쁨이 될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곁에 있으면서 그 품 안에서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일보다 더 큰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봉사의 소명
마지막으로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일 말이 있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이사야서 6장의 이야기는 이사야 예언자가 봉사의 부르심을 받는 내용으로 끝나는데, 이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곧 우리가 삼중의 ‘거룩하시다’를 글자 그대로 입에 올렸다면, 필연적으로 이는 하느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빛나는 데 나도 기꺼이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선언입니다. 세상이 그분이 다스리시는 장소가 되는 데에 나도 기꺼이 함께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께서 쓰시도록 봉사의 소명에 자기 자신을 내맡긴다는 의미입니다. 진지하고 단호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분명 그러합니다.
그러니 기원전 739년에 이사야 예언자에게 일어났던 일이 우리가 바치는 하느님 예배에서도 매번 늘 또다시 일어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예배에서 우리 역시 거룩하신 하느님 대전에 서 있습니다. 거기서 나 자신이 참으로 어떤 존재인지 깨닫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그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치유되고, 우리의 삶과 세상 한 귀퉁이가 다시 제 질서를 찾으며,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이 세상에 밝히 드러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바가 결국 비현실적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요? 동화적 환상에 불과하다고요?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엄중한 현실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우리가 함께 모여 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만 한다면!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이 칼럼은 저명한 성서신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보내오는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9년 2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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