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사도행전 이야기7: 첫 신자 공동체의 생활(사도 2,42-4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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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03-03 | 조회수8,111 | 추천수0 | |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7) 첫 신자 공동체의 생활(사도 2,42-47) 첫 신자 공동체, 사귐과 나눔으로 하느님 섬기다
- 사도행전에서 전하는 첫 신자 공동체의 생활은 오늘날 소공동체 운동에서 추구하는 소공동체의 모델이다. 사진은 지난 2015년 대전교구 정하상교육회관에서 열린 본당 소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사목 연수의 한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감화되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3000명가량 되는 신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120명가량 되는 첫 제자들과 함께 첫 신자 공동체를 이룹니다. 루카는 이제 이 공동체의 생활을 요약해서 전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2,42) 루카는 여기에서 첫 신자 공동체의 생활이 네 가지 일로 이루어짐을 이야기합니다.
첫째,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일입니다. 사도들은 신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베드로가 첫 오순절 설교에서 설파한 것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곧 그들이 증인으로서 보고 듣고 깨달아 배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전하고 성경 곧 구약성경을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비춰서 새롭게 풀어 설명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관한 내용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실현됐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그리스어로 ‘디다케’(διδαχη)라고 하는데, 교리교육 혹은 신앙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둘째, 친교를 이루는 일입니다. 그리스어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ια)라고 하는 친교는 원래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우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코이노니아는 단순히 우정의 친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도들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신자들 사이의 친교이고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가운데 이뤄지는 친교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형제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신앙과 사랑의 친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친교는 빵을 떼어 나누는 데서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셋째, 빵을 떼어 나누는 일입니다. ‘빵을 떼어 나눈다’는 표현은 복음서에서는 딱 세 군데에 나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마태 14,19; 마르 6,41; 루카 9,16; 요한 6,11. 요한복음에는 ‘떼다’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습니다), 최후 만찬(마태 26,26; 마르 14,22; 루카 22,19), 그리고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엠마오 이야기(루카 24,28)입니다. 이 구절들은 모두 성찬례와 직간접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이 대목에서 ‘빵을 떼어 나눈다’는 표현은 성찬례를 가리킨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학자가 이를 성찬례와 결부시킵니다. 다른 한편으로 빵을 떼어 나누는 일은 친교의 구체적인 표현이기도 하지요.
넷째, 기도하는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도인지는 이 구절 자체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 생활을 부연 설명하는 그다음 구절(2,47ㄱ)을 통해 이때의 기도가 찬미의 기도임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루카는 계속해서 이 네 가지를 조금 반복하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먼저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2,43)라고 기록합니다. 루카는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2,22)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이적들과 표징들이 사도들을 통해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요. 여기서 두려움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하시는 놀라운 일들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이어 친교를 이루고 빵을 떼어 나누며 기도하는 생활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2,44-47ㄱ)
신자들은 말하자면 공동생활과 공동 소유를 통해 친교를 이룬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공동생활과 공동 소유는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이었으며, 집단적이라기보다는 느슨한 형태의 공동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신자들이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나누었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이야기(5,1-11)에서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였다’는 표현은 첫 신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왜 성전에 모였을까요? 기도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3,1; 5,21 참조)
그러나 신자들은 성전에만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집 저 집에서 모였습니다. 집 모임에서 신자들은 △빵을 떼어 나누고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빵을 떼어 나눈다는 것은 성찬례를 거행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성찬례가 친교의 잔치를 겸했음을 알게 해줍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에 거행하라고 분부하신 성찬례가 첫 신자 공동체에서는 성전에서가 아니라 집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예루살렘의 첫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성전에서도 모였지만, 가정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확산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이 기도하는 곳이자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자리라고 한다면, 집은 성찬례와 친교의 음식 나눔이 이루어지고 찬미의 기도가 울려 퍼지는 자리였습니다.
루카는 첫 신자 공동체의 이런 생활이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2,47)고 전합니다.
생각해봅시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는 마지막 문장은 첫 신자 공동체의 성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장하도록 해주시는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이 말은 교회의 성장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만 맡기고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지요? 아닙니다. 이 문장 바로 앞에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었다”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온 백성에게 호감을 주었을까요? 첫 신자들의 생활입니다. 가르침을 받고 가진 것을 팔아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고 빵을 떼어 나누고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삶이, 한마디로 나눔과 사귐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삶이 백성에게 호감을 주었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신자들의 무리에 합세한 것입니다. 사도들 또한 자기들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선포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겠지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참으로 성장하려면 인간의 말재주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하며, 나눔과 사귐과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일은 멀리에서가 아니라 가까이에서, 가정에서, 이웃에서, 직장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3월 3일, 이창훈 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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