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사도행전 이야기9: 베드로의 솔로몬 주랑 설교(사도 3,11-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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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03-19 | 조회수8,106 | 추천수0 | |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9) 베드로의 솔로몬 주랑 설교(사도 3,11-26)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죄를 용서받아라”
- 예루살렘 성전 모형도. 정면 앞쪽이 솔로몬 주랑이 있는 곳이다.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베드로가 성전 아름다운 문 곁에서 구걸하던 불구자를 고쳐주자 사람들은 “경탄하고 경악하였다”(4,10)고 사도행전 저자 루카는 기록합니다. 단지 경탄하고 하느님을 찬미했다는 것이 아니라 “경악했다”고 표현함으로써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질 것임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봅니다. 우선, 베드로의 솔로몬 주랑 설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치유된 그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주랑에 있었는데, “온 백성”이 그리로 달려갑니다.(3,11) 온 백성이란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불구자가 온전히 성하게 되어 하느님을 찬미하는 모습을 본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솔로몬 주랑은 예루살렘 성전 광장 동쪽 벽 쪽에 있었던 주랑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솔로몬 주랑에서 설교했고, 또 신자들이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한 것으로 보아(사도 5,12), 솔로몬 주랑은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장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성전 봉헌 축제 기간에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요한 10,22-23) 그렇다면 사도들을 비롯한 예루살렘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솔로몬 주랑을 거니시던 일을 추억하며 그곳을 모임 장소로 사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이후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첫 제자들이 함께 지냈던 그 집은 좁아서 모임 장소로 사용하기 어렵게 되자 솔로몬 주랑을 모임 장소로 대체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베드로는 달려온 백성을 보고 “이스라엘인 여러분” 하면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첫 부분은 불구자가 어떻게 치유됐는지를 설명합니다.(3,12-16) ‘불구자를 걷게 한 것은 우리(베드로와 요한)의 힘이나 신심이 아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배척해 죽였지만, 우리 조상들이자 여러분의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서는 당신 종 예수님을 죽인 이들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시어 영광스럽게 하셨다. 우리는 그 증인이다.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분의 이름이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한 것이다.’
첫 부분에서 몇 가지 눈여겨볼 점이 있습니다. 오순절 첫 설교에서 베드로는 자기들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다고 말했는데, 여기서는 불구자가 완전히 나은 것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때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이 낫게 했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낫게 했다는 것을 말하지요.
베드로는 이 설교에서 또 예수님을 “하느님 당신의 종”(3,13),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3,14), “생명의 영도자”(3,15)라고 부릅니다. 생명의 ‘영도자’는 생명의 ‘창시자’ 또는 ‘지배자’라고 옮길 수도 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종은 구약성경 이사야 예언서(42─53장)에 나오는 표현이고, ‘의로우신 분’ 역시 이사야 예언서(53,11 참조)에 나오는 표현으로,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수님을 구약에서 예언한 바로 그분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용어들은 메시아(그리스도)라는 표현과 함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예수님을 지칭하는 중요한 표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입니다.(3,17-26) 설교의 둘째 부분은 다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전반부입니다.(3,17-21) ‘백성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의 탓이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예고하신 바이기도 하다. 그러니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죄를 용서받아라. 그러면 생기를 찾을 때가 올 것이고,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메시아 예수님을 보내주실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만물이 복원될 때까지 하늘에 계셔야 한다.’
이 부분만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죄를 용서받을 뿐 아니라 생기를 찾겠지만, 생기를 찾게 될 그때가 언제일지 확실하지 않은 듯합니다. 생기를 찾게 되는 그 시대가 한편으로는 만물이 복원되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때 곧 역사가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시대를 의미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생기를 찾을 것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설교 둘째 부분의 후반부를 정리합니다.(3,22-26) ‘모세는 하느님께서 자기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주실 것인데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이스라엘에서 잘려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또 모세의 뒤를 이어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께서 그 예언자를 일으켜주실 때를 예고했다. 하느님께서는 그 예언자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이 악으로 돌아서게 하여 복을 내리게 하셨다.’ 이 후반부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①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이스라엘에서 잘려나갈 것이다. ② 예수님은 이미 오시어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복을 내리셨다.
따라서 베드로 설교의 둘째 부분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셨는데 여러분은 무지해서 그분을 배척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회개해 우리가 전하는 그분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죄를 용서받고 복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만물이 복원될 것이고, 완전히 생기를 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생기를 찾게 되는 시기는 언제일까요? 회개하고 돌아와 죄를 용서받으면 생기를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생기를 찾는 것은 만물이 복원되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면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 그러나 종말에 가서야 완성될 하느님 나라’의 개념이 이 설교에 반영돼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요?
생각해봅시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바라봅니까? …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주었습니다.”(3,12-16) 베드로 사도는 이 설교에서 불구자 치유가 자신의 힘이나 신심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사람을 낫게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낫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믿음조차도 베드로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곧 예수님에게서 온다고 이야기합니다. 베드로는 믿음조차도 은총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런 태도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을 해놓고도 마치 자신의 업적인 양 은연중에 치켜세우곤 하는 사람들의 태도와는 크게 대비됩니다. 성령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이 된 베드로는 부르심을 받아 파견된 사도가 어떤 자세로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지를 되새기게 해줍니다. 오늘날 하느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이들에게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자세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3월 17일, 이창훈 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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