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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마리아회(상), (하)-----가톨릭 신문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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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타한인성당 쪽지 캡슐 작성일2012-06-05 조회수1,171 추천수0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마리아회(상)

 

 

사진말 - 창설자 샤미나드 신부의 시복식 장면.

 

 

창설자와 발전

성자 샤미나드 신부의 생애

 

마리아니스트라고도 불리우는 마리아회는 1817년 샤미나드(Guillaume Joseph Chaminade, 1761-1850) 신부가 개인의 성화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프랑스 보르도에서 설립한 수도회로 이탈리아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다.


1761년 4월 8일 보르도 동북쪽 70마일 거리에 있는 소도시 페리구(Perigeux)에서 태어난 마리아의 위대한 사도 윌리암 요셉 샤미나드신부는 15명의 자녀 가운데 열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아기를 거쳐 성장한 아이는 그 중 불과 여섯명, 그 여섯 중에 4명이 사제가 될 정도로 신심이 두터운 가정에서 성장했다. 맏형은 예수회, 동생 한명은 프란치스코회, 그리고 샤미나드신부는 다른 또 한 명의 형제와 함께 교구 사제가 됐다.


1789년 프랑스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프랑스 교회는 모두 국유화됐고 정부는 모든 성직자들이 「성직자 공민헌장」에 따라 교황청과 분리되어 국가적 기반위에 새롭게 구성되는 교회에 속하도록 선서를 요구했다.


샤미나드 신부는 그러나 「비선서 성직자」로 남아 땜장이로 변장해 지하에서 성무활동을 계속하다가 1797년 스페인의 사라고사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그는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항하며 마리아를 통해 복음을 전파할 마리아 신심회와 남녀 수도회 설립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1800년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샤미나드신부는 1802년까지 바자 교구의 교구장 직무를 대행하다가 사라고사에서 계획했던 것을 실행에 옮겨 그해 12월 8일 마리아 신심회를 조직했다.


마리아 신심회는 이전과는 달리 신분, 나이, 성별에 관계 없이 교육, 자선사업, 불우청소년 돕기, 양서 보급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후 신심회원들 중에서는 수도생활을 희망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마리아의 사도를 세상에 파견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었던 샤미나드 신부는 마침내 남녀 수도회의 설립을 추진해 1816년 5월 25일 「티없으신 마리아의 딸 수녀회」를 아장(Agen)에서 설립했고 이듬해 10월12일에는 보르도에서 마리아회를 설립했다.

 

 

마리아회의 발전

 

창설자인 샤미나드 신부는 초창기, 어떤 활동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확고한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수도회가 그릇된 출발을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던 샤미나드 신부는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목표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혁명 후 프랑스에서는 교육문제가 가장 큰 것 중 하나였다. 아장에 무료학교를 개설하는 것으로 시작한 샤미나드 신부는 교사를 사도적인 교육자로 양성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교방법이라고 생각해 마리아니스트가 있는 곳에서 사범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839년 마리아회는 스위스에 첫 진출하고 1849년에는 미국 신시내티에도 진출해 교육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는 19세기 말엽부터 진출하기 시작해 1888년 1월 5일 일본 요코하마에 진출, 전국에 5개의 명문학교를 설립해 관심을 불러왔다.


1850년 1월 창설자인 샤미나드 신부는 병석에 누워 거룩한 삶을 마감하게 된다.


마리아회는 1865년 8월11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공식적인 승인을 받고 1891년 7월24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회헌에 대한 최종 인가를 받았다. 오늘날 마리아회는 한국을 비롯해 스페인, 이탈리아, 벨기에, 일본, 인도, 아르헨티나, 칠레, 스위스 등 전세계 32개국에서 2000여명의 수도자들이 믿음과 마음의 가난, 그리고 주님께 귀 기울이신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 교육 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사도직활동을 실천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6월 16일, 박영호 기자]

 

 

 

마리아회(하)

 

 

영성과 사도직 활동

 

 『무엇이든지 그 분이 시키는대로 하여라』(요한 2, 5)
하느님의 인류 구원의 섭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모 마리아가 가르쳐주신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이 성서 구절을 모토로 삼고 있는 마리아회는 『우리의 목적은 그분과 똑같이 닮고 그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데 있다』(생활 규칙 1장 2조)고 명시한 설립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


창립자인 샤미나드 신부는 사회의 모든 악이 인간의 영혼을 마비시켜 무감각한 이기심을 갖게 하며 윤리적인 타락 상태로 몰고가는 「종교적 무관심」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쳤다. 이에 따라 회원들은 「마리아의 선교사」로서 살아간다.


창립자의 정신 안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정배이며 우리의 어머니이고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에 동참하신 분이다. 따라서 마리아를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회원들은 마리아의 겸손과 믿음, 청빈과 단순성, 신중성을 본받아 구원사업에 동참한다. 영성생활 측면에서는 창립자의 독특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묵상 기도 및 정화의 덕, 완성의 덕, 대신덕을 생활화하고 있다.


마리아회의 한국 진출은 1950년 광주대교구 헨리주교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이에 앞서 1908년 조선대목구장 뮈텔주교가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교육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마리아를 초청하고 1923년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도 초청의사를 보였으나 자체 회원 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했었다.


1960년 9월17일 마리아회 태평양 관구 소속 3명의 수도자가 입국해 광주 주교관과 대건신학교(현 광주 가톨릭대학교)에서 거처하게 됐고 1963년 2월 목포에 수도회를 마련했고 이어 1970년 서울에도 수도원을 설립했다. 1984년에는 인천 산곡동에 「샤미나드 피정의 집」을 완공했고 1991년 11월에는 서울 망원동에 「마리아 가족회관」을 건립했다. 1973년 12월1일 지부로 승격된 마리아회는 1994년에는 지구로 승격돼 현재에 이른다.


한편 1988년 구성된 마리아니스트 평신도공동체는 1989년부터 공식적으로 봉헌생활을 시작해 현재 서울과 인천의 마리아니스트 평의회 산하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마리아회의 영성에 따라 생활하면서 소외 계층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교육 사업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마리아회의 사도직활동에서는 우선 1966년 학교 법인 목포 마리아회의 설립 인가와 1967년 9월 목포 마리아회 중학교의 설립 인가를 거쳐 1968년에 목포시에 마리아회 중학교를 개교했으나 이후 없어졌고 1975년 3월 목포 마리아회 고등학교를 설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2년에는 서울 망원동에 효성중등학원을 개원해 불우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중학교 과정과 교리교육, 직장 알선까지 담당해 활발한 무료 교육 사업을 전개했다. 하지만 생활 여건이 나아짐에 따라 입학자가 줄어들어 1985년 문을 닫았다.


1983년 2월에는 인천교구로부터 인천 대건고등학교의 운영권을 넘겨받아 운영하고 있다. 1988년 중학교를 폐지하고 현재 고등학교만 운영하고 있으며 1998년에는 인천 연수동에 신축교사를 마련해 학교 부지를 이전했다. 교육을 통한 청소년들의 참된 인간성 형성을 위해 1993년 망원동 마리아 가족 회관 내에 문을 연 「가톨릭 교육 문화원」은 학생들은 물론 교사와 학부모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각종 정보 제공 및 상담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편 마리아회는 지난 2000년 10월 망원동 마리아 가족회관 내에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마리아 전문 도서관을 설립한데 이어 지난 5월18일에는 마리아학 관계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한국 마리아학회」를 창립했다.

 

[가톨릭신문, 2002년 6월 23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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