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구약 성경 다시 읽기: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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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04-19 | 조회수8,388 | 추천수1 | |
[구약 성경 다시 읽기]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20,7)
남왕국 유다의 멸망을 앞둔 시대
예레미야는 기원전 627년부터 587년 남왕국 유다가 멸망 할 때까지 약 40여 년간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그 무렵 남왕국 유다는 성왕 요시야의 종교개혁(기원전 622년)과 함께 잠시 하느님께로 돌아온 듯 했지만(2열왕 22,3-23,27) 요시야가 이집트의 북진을 막다가 므기또 전투에서 전사하는 바람에(기원전 609년) 참된 예배와 사회정의를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지요. 뒤를 이은 네 명의 악한 임금들(여호아하즈-치드키야)과 유다 백성은 또다시 하느님을 등지고서 강대국 이집트와 바빌론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이어갔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아 헛된 희망을 품고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바빌론에 저항하던 임금들 덕에(?) 남유다는 두 차례의 결정적인 침공을 받게 되었지요. 제1차 바빌론 침공 때(기원전 598년)에 여호야킨 임금은 항복하여 1만여 명의 백성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갔고, 마지막 임금 치드키야가 예레미야의 예언을 무시하고 또 반역을 일으켰다가 맞은 제2차 바빌론 침공 때(기원전 587년)에는 아예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이 폐허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왕국시대가 비극적으로 끝나고(기원전 1030-587년) 임금과 귀족들, 사제들과 수많은 백성이 바빌론 땅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바빌론 유배’입니다. 이렇듯 남유다가 멸망하기까지의 가장 비참했던 시기에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어느 예언자보다 파란만장했던 삶
죄와 고집으로 스스로 자초한 멸망을 목전에 둔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어찌 마냥 고울 수 있었겠습니까.(1,11-16) 당연히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주로 임박한 멸망의 경고일 수밖에 없었지요. 듣기 싫은 재앙과 심판을 선포하는 예레미야를 두고 고향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더 예언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고(11,21) 가족과 친지들마저 그를 배신하고 마구 소리를 질렀습니다.(12,6) 또 아무런 희망도 없는 미래를 백성에게 표징으로 보이라고,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혼인도, 자녀를 갖는 것도 금하셨지요.(16,1-2) 그는 사람들에게 놀림과 조롱을 받고(20,7-8) 대신들에게 붙들려 매를 맞고 저수 동굴에 오랫동안 감금되기도 했습니다.(37-38장) 가족과 동포들 그 누구에게서 한줌의 사랑도 받지 못한 예레미야의 고독하고 고통스런 삶은 남유다의 몰락으로도 끝나지 않고, 유배 이후까지 이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바빌론 군대가 돌아간 다음, 남아있던 유다 왕족 이스마엘은 암몬인들의 사주를 받아 바빌론 임금이 세운 총독 그달야와 바빌론인들을 살해했는데(2열왕 25,22-26; 예레 41,1-3) 이에 대한 바빌론의 보복을 두려워한 권력자들은 이집트로 도주하면서 예레미야를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예레 43,1-7) 하느님의 심판의 도구인 바빌론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예언했던 예레미야를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아껴 대우했기에(예레 39,11-14; 40,1-6) 그를 인질삼아 데려간 것이지요. 납치되듯 끌려간 이방인들의 땅에서 철저히 외톨이로 살면서도,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에 대한 신탁을 충직하게 이어갔습니다.(예레 43,8-45,5; 46-51장)
예레미야의 소명(1장)
기원전 627년경(요시야 재위 13년)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고을 아나톳의 젊은이 예레미야를 부르셨습니다. 사제 가문 출신이니(1,1) 어려서부터 깊은 신앙 안에서 자랐겠지요. 히브리 이름 “이르메야후”(‘주님께서 일으키신다’)의 의미 그대로, 과연 그는 하느님께서 “모태에서 빚기 전부터 이미 성별(聖別)하여 세우신”(1,5) 예언자였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모태에서부터 성별된 이’로 명시된 분은 예수님 외에 판관 삼손(판관 13,5), 세례자 요한(루카 1,15), 사도 바오로(갈라 1,15)로 손에 꼽힐 정도임을 고려한다면, 예레미야가 얼마나 중요한 예언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과 역사하심은 결코 허투루 이루어지는 법이 없으니까요.
모태에서부터 성별된 예언자라 하더라도, 평소 소극적이고 사람들 앞에 나서길 좋아하지 않는 그가 믿음 없는 세대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소명을 받들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 했던 예레미야의 소극적인 응답은 모세를 쏙 빼닮았지요. 물론 그 의미는 사뭇 다릅니다. 모세는 스스로 언변이 없다고 생각해 머뭇거렸던 것이지만(탈출 4,10) 예레미야는 자신이 아직은 대중 앞에 공적으로 나서서 말할 권리를 지닌 나이에 이르지 못한 젊은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응답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하시면서, 사람의 기준 때문에 주저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고 오직 당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라 명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러하셨듯(탈출 3,12; 4,12.15) 예레미야에게도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주리라.”고 약속하셨고(1,8.19),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서 허리를 동이고 일어섰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현존하고 계심을 가슴 깊이 품은 사람은 인간적인 걱정과 두려움을 넘어서는 법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갈릴래아에서 우리에게 당신의 영원한 현존을 약속하셨네요.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백성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하느님도 우시고 예언자도 울고
부르심을 받고서 예레미야가 첫 번째 환시에서 본 것은 ‘편도나무 가지’와 ‘북쪽에서부터 기울어진 끓는 냄비’였습니다.(1,11-16) 편도나무는 이른 봄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는 꽃이고 기울어진 끓는 냄비는 곧 쏟아질 판국을 의미하니, 곧 북쪽 적군들(바빌론)에 의해 닥칠 재앙을 가리키는 환시였지요. 그러나 분명 아직까지는 심판을 되돌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편도나무(히브리어 ‘샤켓’)는 ‘(보호하려고) 지켜보다’라는 뜻의 동사 ‘샤캇’(시편 127,1 참조)을 연상시키는 일종의 언어유희로서, ‘당신 백성이 죄로부터 돌아서길 기대하며 지켜보고 계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시사합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물레를 돌리며 진흙을 빚었다 뭉개길 반복하는 옹기장이의 모습을 예레미야에게 보여주시면서 당신 백성이 부디 충실했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주길 바라시는 마음을, 백성이 죄악에서 돌아선다면 재앙을 즉시 거두시겠다는 의지를 말씀하시기도 했지요.(18,7-11; 36,3 참조) 예레미야는 이렇듯 하느님께서 인내하고 계신다는 것을, 백성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의 온갖 비웃음과 놀림 속에 깊이 상처받고 탄식하면서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던 게지요.
“배반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너라. 나는 자애로우니 진노하지 않겠다.”(3,12-15.22; 4,1-2) 하시는 하느님의 호소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러겠다고 응답하지만 말뿐이었습니다.(3,22 ㄴ-25) 그 어떤 회유와 호소에도 꿈쩍도 하지 않고 스스로 멸망으로 치닫는 백성을 지켜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예레미야는 그분의 ‘눈물’로 표현합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도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14,17) 어리석고 완고한 백성을 차마 버리지 못하시는 하느님의 본마음을 알기에(9,1) 예레미야 역시 그분과 함께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내 머리가 물이라면 내 눈이 눈물의 샘이라면 살해된 내 딸 내 백성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울 수 있으련만!”(8,22-23) 죄와 불신으로 멀어진 이들에 대한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은 언제나 ‘연민’임을 알게 되는 대목입니다.
격렬히 고뇌하고, 불평하고 탄식하는 예언자
예레미야서를 읽다보면, ‘아니, 이 사람이 정말 하느님의 예 언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부정적인 모습과 인간적인 나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대목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깊은 고뇌와 쓰라림은 진실 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겪게 되는, 아니 겪어야만 하는 것이지요. 11-20장에는 다섯 개의 ‘예레미야의 고백’(11,18-12,6; 15,10-21; 17,14-18; 18,18-23; 20,7-18)이 있는데, 예레미야는 하느님 앞에서 자기 비하와 연민에 빠지기도 하고, 자신의 사명에 대해 불평과 분노를 쏟아내기도 하며, 원수들에게 복수를 해 달라고 간청하기도 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공정성을 문제 삼거나(12,1) 자신의 탄생 자체를 원망하고 저주하며(15,10; 20,14-18) 하느님께서 자신을 속이셨다고 원망하는 그의 모습(20,7-9)은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고뇌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예레미야의 고백’ 본문을 천천히 읽고 묵상하면서 예레미야의 기도에 자기 믿음을 비추어 보시길 꼭 권합니다. 예로부터 작은 믿음으로 아파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응답(13,5-6; 15,19-21) 또는 예레미야의 다짐(17,14.16-18; 18,19-23; 20,9.11-13)에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찾곤 했으니까요.
사실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듯한 예레미야의 이러한 모습은 그가 하느님과 그분께서 주신 사명을 부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의 고백은 그가 말씀을 그저 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비통한 심정과 처절한 백성의 운명을 뼛속 깊이 함께 아파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불평과 탄식 섞인 기도일지라도, 이웃에 대한 연민과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에 기초한 기도야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솔직한 기도’입니다.
새 계약
“새 계약”이라 하면, 우리는 즉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과 성찬례의 제정을 떠올립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20) 그런데 이 “새 계약”이란 표현은 일찍이 구약 시대의 예레미야가 사용했던 것으로, 후일 바오로 사도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새 계약의 대사제”로 선포합니다.(히브 8,8-12) “보라, 그날이 온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31,31.33) 예레미야는 ‘파괴와 징벌’ 뿐 아니라 유배 이후에 주어질 ‘회복과 위로’의 신탁을 전하면서(cf. 30,18-22) 이 “새 계약”을 선포합니다. 그는 탈출기 때에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서 주셨으나 백성이 깨어버린 ‘옛 계약’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돌판이 아니라 백성의 마음에 직접 새겨주시는 ‘새 계약’과 ‘새 계명’에 대해 말합니다. ‘새 계약’은 시나이 계약처럼 정치-행정적 개념에 기반하여 서로를 의 무로 구속하는 쌍무적(雙務的) 계약과는 다릅니다. 새 계약은 그 주도권이 오직 하느님께 있어 더 이상은 인간의 죄로 깨어져 버릴 수 없습니다. 새 계약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돌같이 굳은 마음을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당신께 대한 사랑과 성실의 마음으로 바꾸어 주시고, 백성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도, 결코 그들을 버리지도 않으시고 언제나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시는 ‘사랑의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고뇌하는 신앙인만이 성숙한 믿음에 이른다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던 날을 추억하며 한탄합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20,7) 정말로 주님께서 그를 꾀셨습니까? 그를 속이셨습니까? 예, 틀린 말도 아니지요. 수줍음 많고 마음이 여린 젊은이 예레미야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주리라.”(1,8.19), “그들이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1,18) 하며 꾀시어 사람들이 그토록 듣기 싫어하는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게 하시고서는, 정작 그 예언이 실현되기까지 40년이나 되는 세월을 예언자 홀로 그 큰 고독과 모욕과 폭력의 희생자로 살게 하셨으니까요. 사실 우리 주위에서도 이런 신앙의 회의를 갖고 계신 분들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이 정말 계시는가, 그렇다면 어찌 이렇게 보고만 계시는가?’, ‘하느님은 왜 나를 버려두시는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했는데, 왜 결과는 여전히 이러한가?’ 하는 의문들로 믿음을 꺾는 분들도 있지요.
예레미야의 삶에서 우리가 꼭 하나 알아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의 예언은 결국엔 그대로 이루어져 진실임이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그 예언의 실현까지는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40년은커녕 채 40일도 앞당겨 바라보지 못하고, 그저 당장만 보며 하느님의 뜻과 정의를 임의로 재단하고 그분의 존재를 문제 삼기까지 합니다. ‘침묵하고 계시는 하느님’이라면 이제 나도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고 그분을 탓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정하신 시기와 때는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예레미야의 기도는 결코 불평과 탄식, 의문과 자조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기도는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양날의 칼과도 같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가족과 친지, 동족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면서도 바로 그 말씀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기쁘고 즐겁게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15,1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감당하고 짊어져야 하는 무거운 짐이 있다면 예레미야처럼 하느님께 불평도 하고 탄식도 하고 어려움도 토로하며 기도를 드립시다. 그러나 바로 그 짐 때문에 우리가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 들게 된다는 사실만큼은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 1,21)
[월간빛, 2019년 4월호,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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