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구약 성경 다시 읽기: 환시와 상징의 예언자 에제키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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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05-11 | 조회수7,054 | 추천수0 | |
[구약 성경 다시 읽기] 환시와 상징의 예언자 에제키엘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여 살아라.”(에제 18,30-32 참조)
남유다 멸망 직전, 거짓 예언자들의 낙관
‘네부카드네자르’, 이 이름 많이 들어보셨지요? 남유다가 멸망할 무렵의 역사 기록에서 자주 언급되는 바빌론 임금의 이름입니다. 예전 공동번역 성경에서 사용했던 이름 ‘느부갓네살’이 더 익숙한 분도 계실지 모르겠네요. 네부카드네자르는 남유다를 세 차례나 침공하여(기원전 605년[2열왕 24,1-2], 598/7년[24,10-17], 587년[25,1-21]) 그때마다 성전을 무참히 약탈하고 유다 임금을 갈아치우거나 아예 귀족들과 백성들까지 엮어서 바빌론으로 끌고 갔던 인물입니다.
기원전 598/7년 여호야킨 임금과 1만여 명의 백성들이 낯선 땅으로 끌려갔던 ‘제1차 바빌론 유배’ 이후에도 여전히 남유다에는 회개와 쇄신의 기미가 없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유배는 곧 끝난다. 하느님께서 바빌론 임금의 멍에를 부수실 것이다.’라는 감언이설로 임금과 백성을 현혹시키며 사태를 막연하게 낙관했습니다.(예레 28장; 에제 13장) ‘아직 왕국과 성전이 건재한데다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닌가.’라는 무책임한 자세로 일관하는 이 백성을 하느님께서는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자손들”(에제 2,4), “반항의 집안”(2,7)이라 부르셨지요. 이 시대에 멸망으로 치닫는 당신 백성을 돌려 세우시려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부르신 예언자가 둘 있었습니다. 남유다에 남아 활약했던 예레미야(기원전 627-587년 활약)와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 그곳에서 부르심을 받았던 예언자 에제키엘(593-571년 활약)입니다.
에제키엘, 바빌론의 포로 정착촌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다
에제키엘은 제1차 바빌론 유배 때(기원전 598/7년)에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사제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유배 생활을 한 지 다섯째 해(기원전 593년경)에 당시 유다인 포로 정착촌이 있던 바빌론 땅 크바르 강가(“텔 아비브”: 에제 3,15)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지요.(1,1-3) 에제키엘은 환시 중에 천상 어좌에 좌정하신 하느님의 눈부신 영광을 보았는데, 그분의 비탄과 탄식이 적혀 있는 말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을 때 그것이 마치 꿀처럼 입에 달았다고 증언합니다.(3,1-3)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하여 귀를 닫은 백성 앞에 나서야 했던 에제키엘, 그가 부르심을 받은 첫 순간에 가슴 속 깊이 느꼈던 이 ‘하느님 말씀의 달콤함’이야말로 그에게는 평생토록 가장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주었을 테지요.
에제키엘의 소명 사건에는 하느님의 ‘영’이 늘 함께했습니다.(2,2; 3,12.14.24) 하느님께서는 가장 먼저 당신의 영을 에제키엘에게 불어 넣으시어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2,2; 참조 3,12.14) 또 그의 ‘얼굴과 이마를 단단하게 만드시어 그가 유다 백성 앞에서 겁을 먹거나 두려워 떨지 않게’ 하셨는데(2,8-9) 이는 과연 그의 히브리 이름 ‘예헤즈케엘’(‘하느님께서 강하게 하신다.’)의 뜻 그대로였지요. 에제키엘처럼 성령과 함께라면 그 어떤 불가능도 두려움도 걱정도 있을 수 없음을 알기에 우리는 매일 아니 매 순간 하느님께 성령을 청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예언자가 벙어리가 되다?
에제키엘은 부르심을 받자마자 벙어리가 되어 집 안에 갇혀 지내게 됩니다.(3,25-27) 이것은 그 자체로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통교의 단절(!), 곧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백성의 모습’과 ‘백성의 회개 없는 호소에 대한 하느님의 침묵’을 의미하는 표징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위기와 경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에제키엘은 부르심을 받은 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약 6-7년간(기원전 593-587년) 침묵 속에서 여러 상징 행위들을 통해 예언을 이어갔습니다.
에제키엘은 비록 자신의 집에 갇혀 지내기는 했지만 ‘하느님의 영’은 환시 속에서 그를 들어 올려 이곳저곳으로 자유롭게 데리고 다닙니다.(8,3.14.16; 11,1.24; 37,1-10; 40,2; 43,5) 그렇게 에제키엘은 환시 속에서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장면들과 표징들을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 의미를 알아 듣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말이 아닌 상징적 행동으로 드러냈지요. 이는 과연 하느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3,25-27 참조)
에제키엘이 선포한 예언의 주요 내용
소명 사화(1-3장) 이후로 이어지는 에제키엘서의 내용은 예루살렘 함락(기원전 587년)을 기점으로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남유다의 멸망 이전에는 ‘심판’이 예고되고(‘유다와 예루살렘에게 경고와 파괴 예고’[4-24장], ‘이민족들에 대한 신탁’[25-32장]), 멸망 이후에는 반대로 ‘구원’이 선포됩니다.(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33-39장], ‘에제키엘의 토라’[40-48장]) 에제키엘은 모두가 막연히 미래를 낙관할 때(제1차 바빌론 유배 이후) 심판을 예고했고 나라가 망하고 모두가 절망에 빠졌을 때(유배 시기 중) 희망을 선포했지요. 그의 메시지는 꼭 ‘청개구리’ 같지만 이는 그만큼 하느님의 백성이 그분의 뜻을 정면으로 거슬러 제멋대로 살며 죄 중에 머물러 있었음을 드러내 줍니다.
남유다 멸망을 목전에 둔 때, 본토에 있는 사람들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으면서도(6장; 8장) 헛된 희망과 무사안일주의로 일관했고, 유배 와 있는 사람들은 주변에 널린 바빌론 우상들을 섬기며 이방인들처럼 풍요롭게 살고 싶다는 신앙의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에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본토인들과 유배자들 모두에게 이대로 가다가는 곧 예루살렘이 멸망한다는 것을 상징 행위들로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멸망할 수 있단 말인가
에제키엘서 전체를 관통하는 대표적인 환시는 ‘예루살렘 성전과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것입니다. 사제였던 에제키엘에게는 당연히 가장 큰 관심사이기도 했겠지요. 그가 처음으로 보았던 환시는 하느님의 영광스런 신현이었고(1,1-28) 이후 그는 예루살렘, 그것도 성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추악한 우상 숭배의 현실을 환시 중에 지켜보았습니다.(8장) 성전에서 방마다 온갖 종류의 이교 우상들을 세워놓고 숭배하고 있는 백성의 모습에 하느님은 징벌을 예고하셨고(9장) 당신의 영광이 성전 동쪽 문으로 나와 커룹들을 타고 성전을 떠나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10장) 사실 계약 궤를 모신 예루살렘 성전, 그분의 유일한 거처인 성전에 더 이상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며 당신을 철저히 배신하였기에, 당신도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셨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도성은 솥이고 우리는 그 안에 담긴 살코기다”(11,3)라고 하면서 오만과 방종 안에 머물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함락될 수 있는가.’를 설명했던 에제키엘서의 답변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제도나 형식도 하느님을 ‘볼모’로 잡아 둘 수는 없습니다. 자칫 안이한 자세로 신앙생활을 긴장감 없이 형식적으로 이어가기 쉬운 우리들도 한 번 쯤 꼭 생각해 볼 대목입니다.
상징적 행위들의 의미
하느님께서 에제키엘에게 가장 먼저 명하신 상징 행위들은 임박한 남유다의 멸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에제키엘은 예루살렘 도성 지도가 새겨진 벽돌을 놓고 그 주변에 전쟁 무기와 장벽 모형을 쌓아, 곧 도성이 포위되어 함락되리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4,1-3 참조). 또 그는 온 몸을 밧줄로 묶은 채 왼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390일(햇수로 북이스라엘이 세워진 때로 부터 바빌론 유배시기까지를 의미),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40일(햇수로 남유다의 유배기간을 대략적으로 의미) 동안 누워 두 나라의 죄의 역사를 몸소 짊어지게 됩니다.(4,4-8) 그리고 누운 채로 390일간 제한된 분량의 음식과 물로 연명하며 인분(부정함의 표징)으로 구운 빵을 먹으라는 말씀은 적들에게 포위된 도성의 주민들이 겪을 기근과 수난을 상징하지요.(4,9-17) 에제키엘은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아(포로가 당하는 모욕) 불태우고 자르고 흩어버리고는 일부만 남겨 옷자락에 묶어 두는 행위를 통하여 전쟁으로 죽고 잡혀가 흩어지게 될 대다수 백성과 그 징벌의 시기에서 살아남을 일부 백성의 운명을 선포하기도 합니다.(5,1-4)
에제키엘은 유배(피난) 보따리를 꾸려 사람들이 보도록 대낮에 밖에 내어 놓고서 저녁에 맨손으로 흙벽을 뚫고 나가 그 짐을 메고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표징을 통해, 임박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여줍니다.(12,1-16) 또 불안과 걱정에 떨면서 빵을 먹고 물을 마심으로써 곧 닥칠 예루살렘의 운명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드러내기도 하지요.(12,17-20) 바빌론 임금의 칼이 갈 길을 그리고서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세운 것은 바빌론 군대가 쳐들어오리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었습니다.(21,23-32)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을 맞더라도 슬퍼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바로 다음 날, 에제키엘은 아내를 잃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명에 따라 애도조차 못했는데, 이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하느님을 등진 이 백성에게 얼마나 심각하고 경황없는 큰 충격이 될 것인지를 드러내는 표징이 되었지요.(24,15-27)
처음에 군중들은 에제키엘을 두고 “비유나 들어 말하는 자”라고 조롱하며 무시했습니다.(21,5) 그러나 정작 예루살렘의 함락소식이 들려오자(33,21) 사람들은 그제야 그가 이제껏 보여주었던 상징 행위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저희들끼리 궁금함을 토로하다 결국 그에게로 몰려옵니다.(33,30-31ㄱ) 이제 입이 열린 에제키엘(33,22)은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지 않았지요.(33,31ㄴ-33)
예루살렘 멸망 이후 희망의 메시지
바빌론까지 전해온 예루살렘의 함락 소식과 함께 에제키엘의 메시지는 구원과 희망의 약속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성경 본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이러한 결정적인 변화를 위해 인간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만큼이나 나약한 저로서는 ‘깨어져 버린 관계의 회복은 언제나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라는 이 사실이 어찌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나의 양떼”라 반복하여 일컬으시면서 ‘양떼를 찾아보지도 않는 목자들’(이스라엘의 임금들)을 거슬러 이제는 직접 당신의 양떼를 구하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34,11-16 참조) 회개할 줄 모르고 스스로 멸망으로 향했던 당신 백성에게 이제 직접 정화수를 뿌려 정결케 하시고, 그들 안에 ‘살로 된 새 마음’과 ‘새 영’을 넣어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36,24-28)
에제키엘은 마른 뼈들(멸망했던 이스라엘)이 다시 생명을 얻는 환시와 두 개의 나무토막(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을 하나로 연결하는 상징 행위를 통해 하느님 백성의 부활을 선포합니다.(37장) 그리고 그는 이제 새 성전이 세워지고 그곳으로 하느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환시 중에 바라봅니다.(40-43장) 이는 보속과 정화의 시기를 거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다시 사랑해주시는 자비로운 하느님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47장이 전하는 성전의 모습은 천상 예루살렘의 자태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은 온 세상에 생명과 희망을 되돌려 주며 온 땅을 풍요롭게 적십니다. 이스라엘의 새 성전이 절망에 빠진 백성에게 새로운 구원의 시작을 알리며 생명을 불어 넣었듯이 우리 곁에도 메마른 일상 속에서 구원의 생명수를 길어 마실 수 있는 성전이 있습니다! 새로운 시작과 구원을 선포하는 에제키엘의 우렁찬 목소리가 성가 67번 “성전 오른편에서”와 함께 들려오는 듯 합니다. “성전 오른 편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보았노라, 알렐 루야! 그 물이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이 구원되어 노래하리라, 알렐루야!”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마른 뼈들이 생명을 얻는 환시(37,1-14)를 통해 에제키엘은 창조주 하느님의 무한한 권능을 깨닫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바싹 마른 채 계곡 바닥에 버려진 무수한 뼈들은 죽음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바빌론 유배민의 비참한 운명을 의미합니다. 사실 죽어서 매장되지 않고 버려진다는 것 자체가 유다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혐오스러운 일이었습니다.(신명 21,22-23; 코헬 6,3)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그러자 그가 대답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선뜻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거나 ‘주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지요.’ 하지 않고,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라고 했던 에제키엘의 대답이 문득 가슴 속에서 묵직하게 울려옵니다. 계곡 바닥에 버려진 바짝 마른 뼈들처럼 우리도 때로는 아무런 기쁨도 생기도 없는 팍팍한 일상에 갇혀 무심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면 하느님의 뜻을 생각해 보기보다는 나 혼자만의 생각과 결정으로 어느 샌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지요. 매 순간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그분께 주도권을 내어 드릴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 얼마나 복된 삶일까요. 그때에 우리의 매일이 ‘마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 살갗이 덮이고 하느님의 영을 받아 숨 쉬는’ 신명나는 순간의 연속일 테니 말입니다. 혹시 요즈음 무덤 같은 어둠 속에서 힘든 분이 계시다면, 잠시 라도 조용한 자리를 마련해서 “주 하느님, 당신께서 모든 것을 아십니다.” 라는 고백과 함께 하느님께 말씀부터 건네시면 좋겠습니다. 그 순간 말라버린 뼈처럼 앙상했던 내 마음과 일상을 하느님께서 풍요롭고 거룩하게 바꾸어 주시고 반드시 희망과 생명의 길을 새로이 열어주실 것입니다. 아멘!
[월간빛, 2019년 5월호,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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