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새아담/새하와여 아듀!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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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12-08-09 | 조회수450 | 추천수0 | 신고 |
새아담과 새하와가 의미하는 게 무엇일까?
이 정의가 우리에게 어떤 믿음을 줄까?
우린 하느님만을 믿는 사람인데.
하느님 그분만을 믿고 그분 계명을 따르면 되는데.
그 계명 속에 담긴 그분 사랑과 그분 사랑하는 이웃을 소생도 사랑하면 되는데.
그 이웃 하나에 소순태라는 이도 있는데
나는 왜 그이를 미워할까?
사랑하자고 몇 번이나 판공의 중심에도 두었는데.
왜 그이는 집요하게 새아담과 새하와를 거명하는지.
그것도 집요하게 남의 심기를 비아냥하면서까지.
새아담과 새하와가 어떤 의미가 그이에게 또는 나에게.
성경은 하나같이 하느님구원 계획과
그 계획의 구체적 실천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끝없이 예표하는데.
그 과정에 아담이, 셋도 나오고, 노아도, 셈도, 아브라함까지
이게 그분 출현을 이루는 창세기의 족보인데
이 족보엔 또 하나같이 몇 살에 누굴 낳고 얼마를 더 살아 몇 살까지 살았다고 하던데.
결국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정사실화하려고
그것도 끝내는 민족까지 선택하면서 아브라함을 택하셨는데
그리고 이사악, 그 아들 또 그 아들 요셉까지 또 이름 모를 수없는 아들들
해서 나중엔 성모님을 통해 성령을 통해 현품으로 출현하신 우리 예수님
이 예수님이신 우리 하느님과 아담과의 관계는?
그 아담과 새 아담은 도대체 또 어떤 다른 의미를 가지면 그 관계는 뭐가 있나.
그리고 성모님은 도대체 누구이며 예수님과의 관계는
한마디 말도 남기시지 않는 요셉과의 또 그 관계는
창세기 시대로 가서 아담이 작명한 그 하와와의 관계는 또?
아니 하와와 새하와와는 또 어떤가?
참 복잡하다.
믿음은 이렇게 참 복잡한가보다.
아니 복잡한 게 믿음인가?
그럼 나는 복잡한 것을 믿는 놈인가?
정말 단순해지기위해서
단순해진다고 확실히 딛는 마당에 들어선 놈인데.
그리고 정말 단순해지는 게 이 믿음의 세상이라고 믿는데.
그 단순에는 ‘하느님만’이,
그분 실천 계명인 ‘사랑만’이 있는데.
살다보면 가끔 그 ‘만’도 빠지나보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단순과 복잡으로 오고가고 하는가 보다.
믿음의 세계에서도,
세속인 삶의 세계에서도 있듯이.
이제 나는 다시 단순함의 세계로 돌아서련다.
새아담과 새하와에 결코 ‘새’자를 붙이지 않으련다.
그저 38년간 그래도 하나라고만 믿어온 하느님만을 보련다.
주위에서 그 ‘만’을 빼고 아무리 다른 걸 보태어도 소생은 그걸
여러 미신적인 것들로 간주하고 흘리련다.
그렇지만 성모님은 꼭 보듬어 가련다.
그분마저 ‘만’의 대상에서 빼면 소생의 믿음이 무너질 것 같기에.
사실 성모님을 정의하기위해 새하와가 등장했단다.
새하와가 등장하려니 새아담이 등장했단다.
그러려니 자연히 새아담이 예수님과 대조되는 인물이 되었다나.
이건 소생의 결론이다.
따지지 마라.
묻지도 마라.
그저 각자가 그 하느님만 믿어라.
성경은 하나같이 그분의 인간 구원 계획을 위해
족보로서 예수님까지 이어가려했다.
셋도[셋의 자손 에녹도],노아도, 셈도, 아브라함도 다 ‘새’만 붙이면 예수님 화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성모님은 이런 연결고리가 없다.
하와밖에 없다.
우리 믿음의 스승님 교부님들은 성모님에 관해서 수없이 토론을 했을 게다.
그 결과 하와가 새하와로,
아담이 새 아담으로,
그래서 예수님으로 성모님으로 대비되도록 정의된 게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다시원점으로 가자.
새아담과 새하와는 헌아담 헌하와와는 어떤 관계이냐?
[‘헌’이 붙지 않는 아담과 하와를 지칭함]
아무리 고민해도 아담은 아담이고 하와는 하와다
그리고 감히 부르기에 두려운 하느님은 영원히 지존하신 분이시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생각하면 버릴 수 없는 여인이다.
그래서 하느님만의 나의 믿음에 반드시 포함되는 어머님이시다.
최종 원점으로 돌아가자.
누가 ‘새[New]’자를 이곳 ‘묻고 답하기’에 불러오는 바람에
소생은 넘 많은 새로운 것을 보았다.
그렇지만 그 새로움으로 들어오는 것이 있는 것 같지만
지나고 보면 또 허전하기는 매 한가지이다.
하느님이 새로운 것에 자꾸 파묻히는 꼴이 되었다.
그분이 뒷전으로만 가는 것 같다.
그분을 제일 앞으로 두기 위해서,
그분이 제일 좋아하는 ‘만’을 지키기 위해서
소생은 이제부터 ‘새’가 붙는 것에는 일단은 빠지련다.
그리고 나를 미워하는 놈마저도 사랑하는 놈이 되고자한다.
그래야만이 소생이 자유로워질 것 같다.
그렇다.
소생은 이 시각부터 ‘새’자가 붙은 ‘내’가 되었다.
이 ‘새’아니 딴 ‘새’는 더 이상 나에게는 없다.
새아담, 새하와, 그 ‘새’붙은 사람에 대해 나에게 묻지도 마라.
따지지도 마라.
각자가 스스로 가질 정의이고 ‘새’이다.
고해하는 심정으로 토로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뭐해야 하는 사람인가?
하느님 그분만을 믿고 그분 계명을 따르면 되는데.
그 계명 속에 담긴 그분 사랑과 그분 사랑하는 이웃을 소생도 사랑하면 되는데.
그 이웃 하나에 소순태라는 이도 있는데
그이마저 진정 이웃으로 두는 새사람이 되어야겠다.
새아담이여 이젠 아듀, 그리고 새하와여 이젠 당신도 또 아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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