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묻고답하기

제목 나무보다는 숲을 봅시다!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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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08-11 조회수436 추천수0 신고

먼저 아래 글[#6243]의 문제 출제자이신 윤재춘 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물에 대해 이야기해 주신 소순태 님께도요.
또 이 글을 쓰도록 간접적으로 소생을 일깨워 주신 예리하신 문경준 님께도요.
 

다들 아래글 #6243 의 질문[하바쿡 예언서의 말씀 중]을 읽지 않으신 분은
먼저 그걸 읽으신 후[가급적 정독하셔야 합니다] 소생의 이 글을 보시면
오해가 없는 이해를 하시리라 사료됩니다.
다들 보셨겠지만, 소생 것 빼고 두 사람의 댓글이 서른 개가 넘기 시작합니다.
소생은 그 댓글의 내용에서 ‘나무와 숲’을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질문서를 봅니다.
그리고 기억할 만한 댓글을 유심히 봅니다.
참신한 댓글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은 각자 아니면 후일 그분께서 판단하실 겁니다.

소생의 견해를 밝힙니다.
하바쿡서는 남 왕국이 바빌론에 의해 멸망[기원 전 587년]하기 전에 침탈자에게 약탈당하는 유다인들의 실상을 예언한 것으로 3장으로 구성된 짧은 예언서입니다.
다시 말해 ‘환시로 본 내용의 예언'입니다.
해서 일반적인 실제 상황과는 좀 거리가 있을 수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질문은 두 번째 주님께 대한 탄원 내용입니다.
소생의 댓글[1,2번째]을 참조하십시오.
‘살려 달라.’라는 것인 것 같은 이 내용은 약탈자들의 잔혹함을 묘사하고 있죠.
투망으로 사람을 잡아 모아 재물로 바치고 그 그물에 분향까지 하면서 말이죠.
쉽게 말해 사람을 잡아 달달볶고 찌진답니다.
이렇게 ‘그들은 그물을 계속적으로 비워대고 무자비하게 죽여도 됩니까?’라고
예언자는 탄원합니다.
이것이 예언자가 의도하는 실상의 폭로입니다.
 

그 실상에 사용하는 살상용 용도의 그물[사실은 ‘그물’일까?]이
지금 쬐끔 논쟁의 대상입니다.
그 그물의 이름을 두고요.
좽이[seine : ?], 후리[영어 모름], dragnet[우리말 모름] 등의
다양한 그물의 종류가 등장합니다.
지금 이 그물 갖고 따질 이유가 뭐죠.
그물이라고 하면 갈릴레아 출신 고기잡이 명수 베드로 사도한테 여쭤보면 딱인데요.
왜 그 예언서의 그물 가지고 여기에서 놉니까?
소생이 분명히 느끼는데요, 이곳 ‘묻고 답하기’에 종종 그물 치는 사람이 있더이다.
그 그물에 걸리면 맥을 못춥디다.
빠져 나오기 정말 힘든 안타까운 모습입디다.
누구신지 몰라도 제발 그물치지 마십시오.
 

사실 하바쿡서 예언서의 그 저자는 그 그물을 보았을까요?
우리의 일제 강점기에도 그물을 쳐 사람 잡았다는 내용은 소생은 아직은.
암튼 소생은 그물을 쳐가며 사람을 잡아가두는 잔혹 그 자체로 동족의 버림받고 있는 모습을 주님께 리얼하게 탄원하기 위한 있는 것으로 그물을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여 그게 좽이면 어떻고 후리면 또 저인망이면 어때요.
어떤 이가 왜 그 그물을 ‘이 댓글의 주제로 끌어가느냐?’가 소생의 고민입디다.
그래서 보다 못해 소생이 평소에 느낀 예리하신 분, 그분이 딱 일침을 가하데요.
정말 번득입디다.
이걸 두고 촌철살인이라 하나요.
가슴이 펑 뚫려집디다.
그 그물은 작으면서도 땅바닥까지 일망타진용이면서 여러번 자주 쓸 수 있는 것이겠죠.
 
그러면서 소생이 하고픈 이야기, 아니 꼭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잘도 들립디다.
‘제발 성경 번역하면서 밥 먹고 사시는 분 욕 좀 하지 마시라고.’
그렇습니다.
성경 번역, 그 엄청난 작업 아닙니까!
생전 만나지도 못한 그분 말씀을 우리에게 그 감동하나 변하지 않게 고운 우리말로 다듬고 고치시면서 밤을 세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지센 그분들의 그 엄청난 역작을 심심하면 ‘번역, 번역’ 왜 외쳐 됩니까?
 

사실 저는 그 번역 과정이 어떤 경로로 이루어지는 지 잘 모릅니다.
아니 몰라야합니다.
알면 그분들 일자리 없어집니다.
정말 몰라도 됩니다.
그분들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의 그 내용만 봐도 때론 가슴이 뭉클한데,
굳이 영어 불어 그리이스어 히브리어 아람어 등, 심지어는 일어 중국어까지 등장시킬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되례 성경 보는 눈만 흐리게 만들기도 합디다.
언어는 나무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꼭 나무만 보고 숲은 도외시합니다.
아니 꼭 나무만 보려합니다.
그물도 그렇더군요.
이건 초대 교황님 베드로 사도의 예수님 만나기 전의 주 전공분야 아니십니까?
 

이름 모를 하바쿡 예언자는 말합디다.
예언자의 항변[이 대목은 둘째 항변에 해당 됨]과 주님의 말씀[1,1 ~ 2,4]을 들어라.
그리고 ‘불의한 자에 대한 저주[2,5 ~ 20]를 보아라.
그리고는 하느님의 기도가 담긴 하바쿡의 노래[3,1 ~ 19]를 들어라.’라고 말합니다.
이게 예언서의 개요입니다.

요약하면 유다인들의 죄인에게는 바빌로나아 제국을 통해 심판하시겠다면서
그들의 폭정을 하소연하고, 주님의 대답을 기다리는 예언자에게는
당신의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그때가 반드시 오기에,
신앙인은 성실함 속에서 굳건히 기다려야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믿어야합니다.
우리말 성경을 읽고 그 성경속의 그분 가르침을 보아야합니다.
그물이라는 나무를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발 이곳에서는 그물을 치지 맙시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물로 사람을 때려잡았다.’라는 실제 상황은
소생은 아직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고기 잡는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하셨지 꼭 어떤 그물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더군요.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져라.’라고 하셨지 ‘어떤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져라.’라는 없었습니다.[그물에 대한 자세한 것은 이곳 '굿뉴스'의 '자유 게시판'에서 '목차'에서 소생 이름을 클릭하시면 ‘베드로의 첫 번째, 마지막 순명’을 참조해 보시면 어떤 그물인지 ‘그냥 그물’인지 상세히 언급되어 있음.]
분명한 것은 그물은 고기잡이였지 사람 잡는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은 것 같더군요.

끝으로 예리하게 그게 그 그물이 아니고 이 그물일 것이라는 명쾌하신 언급으로 이 묵상을 하도록 이끌어주신 분및 이 소재를 제공하신 분께 다시 한 번 더 감사를 드립니다.

암튼 소생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성경은 지식의 암기가 아닙니다.
느낌입니다.
사랑과 용서입니다.
겸손이죠.
이건 나무를 통해서는 아닐 겁니다.
숲을 통해서 일겁니다.
소생은 며칠 전까지는 나무를 보긴 했습니다만 이젠 숲으로만 가려합니다.
신선한 공기가 있는 그 아름다운 숲으로요.
좀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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