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구약인물과 함께하는 치유여정: 신비를 품고 산 예언자 호세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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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06-12 | 조회수5,769 | 추천수0 | |
[구약인물과 함께하는 치유여정] 신비를 품고 산 예언자 호세아
말의 쓰임새는 시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떤 시대에 널리 회자되던 어휘들이 다음 시대에는 사라지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신비, 영원, 진리, 의미와 같은 단어들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고 그 대신에 외적인 맛과 멋, 재미와 편리가 이목을 끕니다. 이런 단어들이 일상의 회화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한 영역이 무시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우리 삶을 한 차원 더 높게 이끌어줄 신비의 영역이 축소될수록 사람들 사이 긴장을 완화시켜줄 완충 영역도 사라져갑니다. 그래서인지 물질적으로는 더 풍요로워졌어도 삶의 질은 점점 빈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우리 시대만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8세기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였던 호세아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 안에서도 이 같은 시대 진단을 발견하게 됩니다.
호세아 예언자가 활동을 시작한 때는 예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절로, 이때는 북이스라엘의 제2의 중흥기로 일컬어집니다. 아시리아 제국의 힘이 일시적으로 약화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예로보암 2세는 시리아에 빼앗겼던 북이스라엘의 영토를 회복하고 주요 상업로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함으로써 국익을 증진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들떠 있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늘리는 일에 골몰하였습니다. 이때에 호세아 예언자는 그들의 잘못을 고발하는 하느님의 고소장(호세 4-5장)을 선포합니다. 이 고소장의 요지가 호세아서 4장 1-3절에 담겨 있습니다. 이 구절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히 꼬집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궁극적인 잘못은 하느님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헤세드)과 진실한 믿음(에메트)이 없고, 그분에 대한 앎(다아트)도 없습니다(1절).
하느님을 잊으면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신의와 진실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저주와 속임수, 살인과 도둑질, 간음과 유혈 참극이 그치지 않습니다(2절).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파괴되면 그 여파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땅이 통곡하고 들짐승과 하늘의 새, 바다의 물고기도 죽어 갑니다(3절). 호세아의 입을 통해 선포된 하느님의 이 고소장은 오늘의 현실에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이 세상에서 신비의 자리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느님, 영원, 진리, 절대적 가치의 자리에 편리와 속도, 거짓과 찰나의 쾌락이 비집고 들어오면서 세상은 점점 더 살기 힘든 곳이 되어갑니다. 예기치 않은 폭력이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자연은 총체적으로 병들어갑니다. 이런 세상을 두고 호세아 예언자는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불륜을 저질러도 자손이 불어나지 않으”(4,10)며, 허무를 심어 더 큰 허무만 거두는(8,7 참조)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애써 보아야 아무런 결실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유는 “하느님을 버리고 불륜을 저지른 탓”(4,13 참조)이요, 헛것을 뒤쫓으려 한 까닭(5,11 참조)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세상은 길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처럼 옷이 찢겨지고 사방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잃어버린 신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호세아의 삶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호세아는 전도유망한 젊은이였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경악할 만한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이가 손가락질하는 “바람끼 많은 여자”와 혼인을 합니다. 호세아의 선택은 사람들의 상식을 뒤집어엎는 것이기에 많은 이들이 그의 선택에 의문을 품었을 것입니다. 호세아는 자신의 선택이 하느님의 말씀에 기인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창녀와 창녀의 자식들을 맞아들이라”(1,2)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창녀와 창녀의 자식들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문은 “창녀짓 하는 경향이 있는 여자”와 “창녀짓 하는 경향이 있는 자식들”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런 명령을 내리신 이유는 당신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찾아나선 이스라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의 말뿐만 아니라 삶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입증하시려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디블라임의 딸 고메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하느님은 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그들이 다른 신들에게로 돌아섰다면 하느님도 그들을 저버리시면 되지 않을까요? 호세아는 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일까요? 만약 하느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향해 돌아선 이스라엘이 행복할 수 있다면 하느님은 환호하며 그들을 떠나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간 그 길에 어떤 행복도 있을 수 없다면, 하느님은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돌아서게 하려고 애쓰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참행복을 원하시는 까닭입니다. 호세아가 기꺼이 고메르를 아내로 맞이했던 것은 하느님의 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혼인한 부부의 관계에 빗대어 표현합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는 한 남편이신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창녀짓 혹은 불륜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이런 불륜을 저지르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들이 양식과 물, 양털과 아마, 기름과 술을 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의 원천이 되는 분이심을 잊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이스라엘의 모든 노력을 좌절시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이런 의지는 호세아의 세 자녀의 이름으로 표명됩니다. 호세아는 고메르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각각 ‘이즈르엘’ ‘로 루하마’ ‘로 암미’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신들을 향하여 돌아선 ‘이스라엘의 활을 이즈르엘 평야에서 꺾으실 것’(이즈르엘)이며, 그들을 ‘더 이상 가엾이 여기지 않을 것’(로 루하마)이고, 그들에게 ‘내 백성이 아니다’(로 암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은 “이제 가야지. 첫 남편에게 되돌아가야지. 그때가 지금보다 더 좋았는데…”(2,9)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넉넉할 때 이스라엘은 그것을 주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모든 것이 거두어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참행복의 원천이신 분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호세아 예언자가 광야 시대를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첫정을 바치던 가장 순결했던 때로 여기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의지할 데 하나 없는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순수하게 하느님께만 의탁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다시 그 광야의 시대로 돌아가자고 호소하십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 이전의 잘못이 무엇이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스라엘과 다시 혼약을 맺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나의 남편”이라 부르고,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영원한 아내”로 삼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실 약혼 선물은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즈르엘은 풍성한 수확을 얻고, 하느님은 ‘로 루하마’를 ‘가엾이 여기실 것’이며, ‘로 암미’에게는 ‘나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회복입니다.
호세아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이를 사랑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잊어버린 하느님의 사랑을 상기시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 그를 당신의 아들로 삼으시고 사랑하셔서 이집트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어머니처럼 그 아들을 품에 안고 걸음마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를 사랑하여 볼을 비비고, 입으로 씹은 음식을 먹여 길러주셨습니다(11,4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저버리고 주변의 강대국들이 힘이 되어주겠거니 기대하며 그들을 향하여 돌아섭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이스라엘의 기대를 배반하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거듭 배신을 당하였지만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차마 저버리지 못하십니다. 호세아는 자신의 결혼생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애끓는 사랑을 드러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호세아의 삶은 신비를 잊은 세상에서 신비를 품고 산 삶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호세아의 선택과 삶에서 그들이 잊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상처 입은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하느님을 잊어가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등대처럼 신비와 영원을 품고 살면서 결코 포기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비출 수 있다면 세상은 다시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게 될 것입니다(14,6.8 참조).
* 김영선 -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소속 수도자로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마음을 치유하는 25가지 지혜』 『기도로 신학하기, 신학으로 기도하기』 등이 있다.
[생활성서, 2019년 6월호, 김영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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