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구약 성경 다시 읽기: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노래한 묵시 예언자 다니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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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06-12 | 조회수7,292 | 추천수1 | |||||
[구약 성경 다시 읽기]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노래한 ‘묵시 예언자’ 다니엘
“임금님,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다니 3,17-18 참조)
세상의 종말 이야기, 묵시문학
‘묵시(默示)’라는 말 많이 들어 보셨지요? 묵시란 세상의 마지막 때와 그때에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 대한 계시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묵시문학(默示文學)’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이러한 묵시를 내용으로 한 기록이나 문헌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보통 예언서들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성찰과 회개를 요구하며 여전히 현세에 희망을 걸고 있다면 묵시문학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하는 종말론적 완성의 때를 고대합니다. ‘묵시’, ‘묵시문학’하면 많은 분들이 즉시 요한 묵시록을 떠올리실 텐데요, 사실 성경에는 묵시문학 양식을 띤 본문들이 상당 수 있습니다.
묵시문학은 세상에 종말이 임박했음을 알리면서 장차 일어날 천재지변(천체의 혼돈, 전쟁이나 지진), 선과 악의 대결과 하느님의 승리, 그리고 마침내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 대해 전합니다. 또한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파멸을 장엄하게 선포함으로써 박해와 고난의 시기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이러한 묵시문학은 구약 성경의 경우 주로 예언서에 담겨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책이 바로 다니엘서입니다.
다니엘 예언서
다니엘(‘하느님께서 판결하신다.’)이란 이름은 다니엘서뿐 아니라 구약 성경 여러 곳에 언급되는데, 특히 에제키엘서에서는 노아와 욥과 함께 의인으로 기억되기도 하고(14,14.20) 현자로 거론되기도 합니다.(28,3) 다니엘서의 저작 배경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한데, 일단 성경 본문에 충실하자면 다니엘서는 “유다 임금 여호야킴의 통치 제삼년”(다니 1,1: 기원전 606년)부터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삼년”(10,1: 기원전 536년)까지 바빌론 땅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학자들은 다니엘서가 실제로 쓰여진 시기를 마카베오 항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의 종교박해(기원전 167년경) 무렵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니엘서는 우선 크게 두 부분(1-6장; 7-12장)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 이야기의 내용과 문체가 사뭇 다릅니다. 첫 부분(1-6장)은 바빌론 땅에서 다니엘이 임금들의 꿈을 해몽해 주면서 벌어지는 일들과 신앙을 지키려던 다니엘과 친구들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가 구원받았던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는 참된 주권자는 바빌론의 신들이나 임금 따위가 아니라 오직 창조주 하느님이시며, 그분께 충실한 이는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지요.(‘지혜문학적’ 문체) 둘째 부분(7-12장)은 다니엘이 본 환시에 관한 내용으로 장차 일어날 일들과 종말론적 사건들을 예고하며 의인들의 최종적 구원을 약속하고 있습니다.(‘묵시문학적’ 문체) 아, 그리고 원래 히브리 구약 성경의 다니엘서는 12장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 가톨릭 성경은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도 유념하실 필요가 있겠네요. 이는 가톨릭교회가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그리스어 구약 성경 전승을 받아들였기 때문인데, 우리 성경에는 히브리어 성경의 내용에 더하여 다니엘의 친구들이 불가마 속에서 주님께 바쳤던 ‘세 젊은이의 노래’(3,24-90), ‘수산나 이야기’(13장), ‘벨 신상과 큰 뱀 이야기’(14장)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1-14장 전체가 한 권의 다니엘서인 게지요.
신앙에 반하는 관습에 맞서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는 이스라엘의 왕족과 귀족들 중 외모가 출중하고 지혜를 갖춘 이들을 뽑아 궁중에서 교육을 시키고 자신을 섬기게 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다니엘(‘하느님께서 판결하신다’), 하난야(‘주님은 은혜로우시다’), 미사엘(‘누가 하느님의 것인가?’), 아자르야(‘주님은 도움이시다’)라는 고결한 신앙의 이름들이 벨트사차르(‘제후의 생명을 보호하라’), 사드락(‘페르시아 달의 신 아쿠의 명령’), 메삭(‘누가 아쿠를 위한 자인가?’), 아벳 느고(‘바빌론 신 느코의 종’)라는 이교식 이름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1,6-7)은 그들이 처한 심각한 신앙의 위기 상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다니엘서를 읽으면서, 이방인들 한가운데에서 비신앙적(때로는 반[反]신앙적) 방식들을 강요받았던 이들이 때로는 지혜롭게 주위와 공존하고, 때로는 처절하게 목숨을 걸고서 신앙을 지켜갔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관용과 지혜로, 때로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단호한 결기로 세상 속에서 지혜롭게 살아가야 할 우리 일상의 청사진이 담긴 책이 바로 이 다니엘서이지요.
다니엘과 친구들에게 닥친 첫 시련은 바빌론 임금의 명으로 율법 상 부정한 음식과 술을 강요당한 일이었습니다.(1장) 다니엘은 내시장을 만나 채소만 먹고도 좋은 용모를 유지할 터이니 부디 자신들이 정결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하느님 앞에서 언제나 흠 없이 정결하고 싶었던 다니엘의 이 마음을 하느님께서 얼마나 귀히 보셨을까요. 과연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결과들이 이어집니다. 내시장은 ‘제 목이 걸린 일’(1,10)인데도 이방인 볼모에 불과한 다니엘의 청을 받아들여 주었고, 하느님께서는 다니엘과 친구들에게 바빌론의 다른 그 어떤 현자들보다 뛰어난 지혜와 예지를 주시어 그들을 들어 높이셨지요.(1,20; 2,46-48) 하느님께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 그 하나만 꼭 간직하고 산다면 모든 앞길은 하느님께서 몸소 열어주실 터인데, 그 단순한 사실을 우리는 왜 자꾸만 잊고 사는 것일까요.
타오르는 불가마와 사자 굴에서 찬미의 노래를
살다보면 주위와 어느 정도 타협해야 할 일들이 생깁니다. 내가 좀 더 편하기 위해서든, 주위 사람들을 배려해서든 자주 만나는 상황들이지요. 그러나 그런 타협이 내 신앙과 소신을 저버리길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때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음식 규정 정도는 어느 정도 현실과의 타협이 가능했습니다. 임금이 명한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먹는 척 해 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라는 임금의 명에는 절대로 따를 수 없었습니다.(3,1-18; 6,1-14) 그들이 고위 관직과 보장된 삶(2,48-49; 5,29)을 내던지고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또 굶주린 사자들이 득실대는 사자 굴로 들어간 것은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기 위해서였지요.
먼저 다니엘의 세 친구가 타오르는 불가마에 던져집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해 내시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당신의 신들을 섬기지 않겠소.’(3,17-18 참조)라고 말하는 그들의 믿음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걱정도 두려움도, 풍족히 누리던 그 모든 것들도, 심지어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하느님께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그들의 믿음에 먼저 응답하신 것은 바로 하느님이셨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불길을 가마 밖으로 내몰고, 가마 복판을 이슬 머금은 바람이 부는 것처럼 만들어 그들을 구해냅니다. 이때에 세 젊은이가 불렀던 찬미가(3,52-88)를 우리도 성무일도 주일 아침기도 두 번째 시편기도 때에 격주로 나누어 바치고 있음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 “주님의 모든 업적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영원히 주님을 찬송하고 찬미들 하라.” 하며 시작하는 이 시편기도를 바칠 때마다 나 역시 불타오르는 불가마 속에서 목숨 바쳐 찬미가를 부르던 세 젊은이와 함께, 또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들에게 찢겨 순교하기까지 목이 터져라 성가를 부르던 교회의 순교자들과 함께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느끼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니엘에게도 죽음의 위협이 닥칩니다.(6장) 그는 다리우스 임금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기도하지 말라는 법을 어기고서 하루 세 번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기도하다가 붙잡혀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하느님께서는 또 한 번 천사를 보내시어 밤새 그를 지키셨습니다. 다니엘에게는 털끝 하나 건들지 않았던 사자들이 그를 모함했던 악인들이 구덩이에 던져지자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것을 보았을 때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되었지요. 다니엘과 세 친구 이야기는 우리의 신앙과 세상의 가치가 충돌할 때 그저 마찰과 갈등을 피하려 쉽게 타협해 버리는 것만이 결코 능사가 아님을 말해 줍니다. 적당히 타협할 만도 한데 우직하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신앙인에게서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은 오늘날에도 숱하게 보는 일이기도 하지요.
사람의 아들에 관한 환시
7-12장은 다니엘이 보았던 환시들과 그에 대한 천사의 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본 환시들은 미래에 닥칠 일들에 관한 것이었는데, 예를 들면 바다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짐승 네 마리는 바빌론과 그 이후에 세워질 세 나라인 메디아,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을 의미하고(7장), 뿔 달린 숫양과 숫염소는 페르시아와 그리스를 가리키는 것이었지요.(8장)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해 하느님께 기도하는데, 천사는 속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예루살렘이 복구되고 하느님의 정의가 새롭게 펼쳐질 것임을 알려줍니다.(9장) 10장은 우주적 차원의 묵시로서 천사들의 전투를, 11장은 이후 일어날 왕국들의 역사를, 마침내 12장은 종말의 때 그 모든 재난과 박해를 믿음으로 이겨낸 의인들의 구원과 결정적인 승리에 대해 선포합니다.
천사는 신비로우면서도 두렵고 떨리는 형상들로 가득한 이 환시들을 설명해 주면서, 결국 모든 것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 안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알려줍니다. 특히 의인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부활 사상(12,1-3)은 구약 시대 후반에 들어 새롭게 계시된 내용이었지요. 다니엘이 본 일련의 환시들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밤의 환시 속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나타나 하느님께 인도되고,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이 그를 섬기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7,13-14) 예수님께서는 유다 최고 의회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그 “사람의 아들”이 바로 당신이심을 밝히셨지요.(마태 24,29-31; 26,57-64) 예수님의 말씀 이후 다니엘서 7장 13-14절은 재림하시는 주님의 영광스런 현현을 서술하는 전형적인 표현이 되었습니다.
수산나 이야기, 벨 신상과 큰 뱀 이야기
수산나 이야기(13장)는 욕정에 눈이 먼 두 원로가 아름답고 신앙 깊은 수산나를 모함했던 일을 전합니다. 이방인들의 땅에서도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다 박해받는 의인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돌보시는지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지요. 억울하게 사형이 선고되는 절망적인 순간에도 수산나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기도를 드립니다. “아, 영원하신 하느님! 당신께서는 감추어진 모든 것을 아십니다.” 철저히 혼자 버려진 듯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아무 조건 없이 당신께 의탁하는 영혼을 가장 어여삐 여기시는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에 즉시 응답하시어 다니엘을 통해 수산나를 구원하셨지요.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니엘이 바빌론인들의 우상인 벨이 거짓 존재임을 밝혀냈던 일(14,1-22)과 그들이 섬기던 큰 뱀을 죽였다가 또다시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상처 하나 없이 하느님께 구원받았던 일(14,23-42)을 전합니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쉽게 불평하며 탄식하기 쉬운 우리들이지만 사자 굴 속에서도 주님께 신뢰와 확신을 고백했던 다니엘의 기도를 우리도 자주 드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
우리 주변에서 매일 불의가 일어납니다. 악인들이 권력을 쥐고 의인의 숨통을 죄고, 스스로 짐짓 대단한 인물인 듯 행세하며 작고 의로운 이들을 볶아댑니다. 새삼 새로울 것도 없다 할 정도로 세상에 늘 있어왔던 일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은 나 혼자만 의를 행할 이유도, 희망으로 삼을 무언가도,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할 까닭도 없다며 갈등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렇게 뚜렷한 희망을 찾지 못하면서도 세상과 쉽게 타협하고 양심을 속이지는 않으려 하루하루 의롭게 싸워가는 이들의 삶의 자리에서 ‘묵시’는 움틉니다.
다니엘서가 실제로 기록된 때는 기원전 2세기 경 셀레우코스 왕조 치하의 극심한 종교박해 때였습니다. 하느님께 기도와 예배를 드리는 것을 공적으로 금하고, 온갖 부정하고 속된 것으로 스스로를 더럽히라 법으로 강요하며 이를 거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던 때였지요.(1마카 1,44-50) 신앙을 지키려면 목숨을 내 놓아야 한다는 것만 빼면 지금 우리의 시대 역시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수많은 유혹거리와 죄의 기회가 즐비하고, 하느님 때문에 한 번 더 생각하고 배려하고 고민하던 것들을 놓아버릴 수만 있다면 조금은 더 마음 편하게 좀 더 즐기고 누리며 살 수 있을 테니까요.
다니엘 예언서는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켰던 다니엘과 세 친구의 과거 영웅담만도 아니고, 미래에 있을 종말의 때를 기다리며 오늘도 무조건 참고 견디라 강요하는 책도 아닙니다. 단순히 옛 인물들의 용기와 기적적인 구원 이야기에 감탄하거나, 현실을 도외시한 채 새로운 세상을 마냥 꿈꾸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신앙인은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을 말하는 다니엘 예언서를 읽으면서, ‘현재’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를 깊이 생각합니다. 모순 가득하고 때로는 죄와 불의가 삼켜버린 듯한 세상 속에서, 의인을 끝까지 돌보시고 구하시는 분, 이미 이 땅에 시작하신 당신 나라를 지금도 꿋꿋이 완성해가고 계신 하느님을 믿고서 부당함과 맞서 싸우며 용기있게 나아가리라 다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하신 주님의 당부를 말이지요.(마태 5,13-16 참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각자의 자리에서 오늘도 작은 의인으로 살아가며, 사자 굴에서 다니엘이 드렸던 그 기도를, 하느님께서 기뻐 받으셨던 그 기도를 우리도 힘차게 드리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저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14,38)
[월간빛, 2019년 6월호,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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