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 1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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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06-12 | 조회수7,454 | 추천수0 | |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히브리서, 야고보서 (1)
히브리서간은?
저자가 누구인지, 어떤 경로를 거쳐 쓰였는지, 사도 바오로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등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히브리서간은 신약 안에서 제일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문헌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 해석학?’
신학자 그래써르(E. Graesser)는 히브리서간 저자를 두고서 ‘신학적 해석학의 표본’이라고 하면서 그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냅니다. 히브리서간 저자는 구약의 여러 고백문 등을 새롭게 해석하고 표현하려 했습니다. 사실 신약 27권 가운데 히브리서간 저자만이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께 ‘사제[司祭 hiereus, Priest]’ 또는 ‘대사제[大司祭, archiereus, Highpriest]’라는 칭호를 부여합니다. 이로써 저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실로 엄청난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사제직뿐 아니라 제사와 전례 등 여러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주요 신학은?
히브리서 저자의 신학적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사제’로 해석하는 데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지상의 예수님은 사제 가문 레위지파 출신이 아니라 유다지파 출신이었습니다. 출신가문이나 혈통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은 우리네 표현으로 그냥 ‘평신도’였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마르 6,3) 복음사가 마르코는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출신 가문만 보고서 예수님을 업신여기는 장면도 전해줍니다.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6,3ㄷ)
예수님께서는 왜 대사제이신가?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구약의 대사제들은 수도 없이 예물을 바쳤지만 그 누구의 죄도 사해주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성부의 뜻에 따라 자신을 십자가에서 단 한번 희생 제물로 봉헌하심으로서 온 인류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만이 참으로 진정하고도 유일하며 멜키체덱의 예를 따른 영원한 대사제시라고 천명합니다. “그분께서는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히브 7,16-17)
구약의 사제들과 예수님의 사제직은?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의 사제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또한 다른 사제들은 죽음 때문에 직무를 계속할 수가 없어 그 수가 많았습니다.”(7,23) 구약의 사제들은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아 ‘생로병사’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기에 한정적이며 한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유일무이함과 영원성을 간략히 정의해줍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주십니다.”(7,24-25) 죄의 굴레 속에서 헤매던 구약의 사제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존재해오던 분으로서 앞으로도 영원히 사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기 자신의 죄와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날마다 제물을 봉헌해야 했던 구약의 대사제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7,27-2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주신 것입니다.”(10,14)
히브리서간의 문학양식은?
이 서간은 겉으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으로 전해져옵니다. 그럼에도 서간의 내용을 파고들면 그 실상이 다릅니다. 이 서간 맨 끝에 나오는 맺음말(13,22-25) 외에는 서간의 성격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서간의 저자는 줄곧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을 둡니다. 이 서간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가를 밝혀주는 ‘신학 지침서’라고 봅니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거나 절망의 늪에 떨어질 위험에 처한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유일한 인류 구원자시며 대사제이시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신학 지침서입니다.
야고보서는?
야고보서, 베드로1-2서, 요한1-3서, 유다서 등 일곱 권을 가톨릭서간이라고 부릅니다. 편지 발신인이 명시적으로 나오지만, 수신인은 믿는 이들 모두, 또는 여러 지역의 많은 신자들을 포괄적으로 이르기 때문에 가톨릭서간[공동서간]이라 칭합니다. 이러한 특징은 편지 인사말 안에서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합니다.”(야고 1,1) 여기서 수신인은 세상 모든 유다인이며,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전통적으로 이 서간 저자를 ‘주님의 형제 야고보’(갈라 1,18-19)가 집필했다는 견해가 우세해왔지만 저자에 대한 논란은 끝나지 않고 열려있습니다. 자신을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칭할 뿐, ‘사도’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 점에서도 ‘주님의 형제 야고보’ 사도를 저자라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야고보서 언어?
야고보서의 그리스말은 간단명료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을 뿐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흐름을 유지해줍니다. 이 서간의 비교법과 이야기 흐름은 누가 보아도 놀라리만큼 당차며 명확합니다. 저자는 창조성을 겸비한 뛰어난 예술 감각으로 글을 써내려갑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전승 자료를 찾아내어, 그것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가면서 자신이 의도에 걸맞은 용어를 첨가해가는 가운데 보다 설득력 있는 문체로 글을 이어나갑니다.
신약 다른 곳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단어를 야고보서 저자가 34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이와 같이 단 한 번 사용되는 단어들을 일컬어 하팍스레고메나[hapaxlegomena라 합니다]. 그는 자신이 강조하고자 할 때는 서슴없이 상승적 표현법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연쇄적 표현 방법을 사용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1,14-15)
문학 양식은?
이 서간에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한 지침이나 훈계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아, 야고보서를 일종의 교훈서로 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 유다교 문헌에서도, 지혜서나 집회서 등 구약 지혜문헌에서도 이러한 문학 양식이 자주 발견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6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용현5동성당 주임)]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야고보서 (2), 베드로 1서
야고보서 주제는?
네 가지 주제를 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완전성에 이름, 온전한 사람이 되어감’입니다. 이는 실상 야고보서간 전체의 맥을 이어가는 큰 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도달해야 할 궁극적 목표를 서간 맨 앞에서 명확히 제시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야고 1,2-4)
루터[Martin Luther]가 보는 야고보서는?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개신교에서는 지난 날, 야고보서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 서간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 너무 적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나아가 가톨릭에서는 행동이나 실천보다는 믿음에 치우치는 개신교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보아왔습니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상호간에 그러한 편견을 극복하고, 야고보서의 진정한 가치를 인정하게 되어 참으로 다행스럽다 하겠습니다.
‘완전하게 됨’과 관련된 구절은?
두 곳만 뽑아 봅니다.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아브라함]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2,22: 행함에서 완전함)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1,25)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1,25)?
이 구절에서 말하는 ‘완전한 법, 자유의 법’은 구약의 율법을 가리킵니다. 이 율법은 한마디로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사도 바오로도 사랑과 율법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줍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야고보서의 둘째 주제는?
지혜입니다. 야고보는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짧게 정의해줍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3,17)
야고보서의 셋째 주제는?
가난한 이들의 신심입니다. 부자와 비교하는 가운데, 야고보는 가난한 이들의 신심을 은근히 들어 높입니다. “비천한 형제는 자기가 고귀해졌음을 자랑하고, 부자는 자기가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꽃처럼 스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1,9-10) 저자는 부자들이 겪게 될 미래를 마치 눈으로 들판을 바라보듯이 입체적으로 풍자합니다.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만 골몰하다가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1,11)
이어서 저자는 모든 믿는 이들이 지향해 나가야 할 신심을 간추려줍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1,27)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2,5)
야고보서의 넷째 주제는?
믿음과 실천입니다(특히 참조: 2,14-26). ‘믿음과 실천(행동)’에 관하여 야고보는 자주 언급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2,14; 참조: 1,19-27; 3,13-18; 4,11 등) 다음 구절 안에 우리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나아가야 할 덕행의 길이 요약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4,17)
베드로1서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흔히 베드로2서가 신약 27권 가운데 가장 늦게 집필된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그에 반해 베드로1서는 사도 베드로가 순교한 후 일정 기간이 지난 80-90년경에 쓰인 작품으로 봅니다. 베드로1서는 아마도 로마에서 베드로의 가르침과 전통을 열심히 따르던 제자가 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가 로마 황제들의 박해 아래 이곳저곳에 흩어져 사는 신자들과 공동체에 용기와 힘을 북돋워주려고 이 서간을 집필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베드로1서의 내용은?
적어도 몇몇 부분은 용어 사용이나 내용면에서 사도 바오로의 신학과 아주 가깝습니다. 한 예로 바오로서간에 자주 등장하는 ‘그리스도 안에서[en Chriso]’가 베드로1서에서 여러 번 발견되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1베드 3,16; 5,10.14). 그렇다고 해서 바오로가 이 서간의 저자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초대 교회 곳곳에는 공통교리 자료가 전승되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한 전승 자료를 바오로뿐 아니라 베드로도 얼마든지 뽑아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베드로1서의 수신인은?
야고보서와 마찬가지로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베드로가 폰토스와 갈라티아와 카파도키아와 아시아와 비티니아에 흩어져 나그네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에게 인사합니다.”(1베드 1,1)
베드로1서의 신학?
이 서간의 주요 신학은 ‘보다 나은 그리스도신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14-15) 이제부터 거룩한 사람이 되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세례성사를 통하여 새로 입교한 교우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영세가 배움의 끝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실제로 세례는 배움의 종착역이 아니라 배움의 시작이며 자신의 성화와 이웃 복음화의 새로운[또 다른] 시작이 아닐까요?
베드로가 요구하는 신자들의 자세는?
사도는 다음 구절로 요약해줍니다.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2,2) 우리가 이제 다 자랐다는 오류나 교만에 빠지지 말고, 늘 본능적으로 엄마 곁을 찾고 그리워하는 갓난아기처럼 순수하게 주님을 찾고 그분께서 주시는 젖[말씀]으로 끊임없이 성장하여 구원을 얻도록 부단히 노력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목표? 야고보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2,3) 우리가 도달할 목표는 그리스도입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그분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좋으신 분으로 체험하고 더 깊이 맛보기 위하여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분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7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용현5동성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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