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구약 성경 다시 읽기: 구원의 능력을 지닌 기도 지침서, 시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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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08-12 | 조회수6,390 | 추천수0 | |
[구약 성경 다시 읽기] 구원의 능력을 지닌 ‘기도 지침서’, 시편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1-3 참조)
시편, 예수님과 사도들의 기도
시편으로 기도하는 전통은 구약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무일도를 통해 150개의 시편을 4주에 걸쳐 나누어 바치지만 예수님의 시대만 해도 유다인들은 한주에 그 모두를 기도로 바쳤습니다. 예수님도 유다인이셨으니, 당연히 어려서부터 유다인들의 전통 기도인 시편을 외며 성부께 기도하셨겠지요. 그래서일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나 율법학자들과 토론하실 때 자주 시편을 인용하셨고,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까지도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시편 22,2),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시편 25,1) 하시며 시편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어릴 적부터 늘 입에 담고 계셨던 기도, 십자가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바치셨던 그 시편 기도를 두고, 우리가 무슨 다른 ‘더 좋은 기도’(?)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시편은 예수님과 함께 사도들이 드렸던 기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그분과 제자들은 파스카 음식을 나눈 뒤에(‘최후의 만찬’)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마르 14,26)고 하는데, 이는 파스카 축제 때 저녁 식사 전에는 시편 113-114편을, 후에는 시편 115-118편을 노래하던 유다인들의 관습 그대로였습니다.
언젠가 제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했을 때 그분은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지요. 좀 엉뚱한 생각입니다만, 만약 또 누군가 같은 청을 드렸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너희에게는 시편이 있지 않느냐? 시편으로 기도하여라.”
시편, 신앙의 정수(精髓)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루카 24,44)고 하셨지요. 유다인들의 성경(TaNaK)이 오경과 예언서와 성문서로 나누어짐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은 시편을 성문서 전체를 대표하는 책으로 언급하신 셈입니다. 과연 시편은 단순히 여느 구약 성경 책들 중 하나 정도가 아니라 매우 특별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오경과 예언서가 각각 하느님의 ‘율법’과 ‘말씀/예언’을 통해 위로부터 내려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면, 시편은 인간이 하느님께 올려드리는 ‘응답(기도와 삶의 실천)’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지요. 시편은 오경과 예언서의 내용, 곧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의 정수입니다. 거기에다 성문서의 내용인 신앙의 역사(창조∼유배 이후), 기도와 전례, 전통적 지혜의 가르침까지 모두 담고 있지요. 시편은 언제 지어졌을지 모르는 구전(口傳) 시대를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8세기를 훌쩍 넘는 긴 세월 동안(기원전 1000-200년) 수많은 기도자들에 의해 지어지고 사용된 책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임금 때 찬란히 빛났던 ‘왕국 시대’를 지나 ‘유배 시대’와 ‘귀환과 재건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발전되었던 이스라엘의 신관과 세상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성찰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책이지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시편은 완벽한 기도의 책입니다.
시편, 다윗 작사 작곡?
많은 시편의 머리글에는 사람 이름이 하나씩 있는데(다윗, 아삽, 코라의 자손들 등) 옛날에는 이들을 해당 시편의 저자로 여겼습니다. 특히 150개 시편 중 무려 73개의 머리글에 다윗의 이름이 들어 있어서인지, 유다 전승은 전통적으로 시편집 전체의 저자를 다윗이라 믿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시편 해석서인 미드라쉬 터힐림(기원후 3-9세기)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라 다섯 권을 주었고,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편집 다섯 권을 주었다.”라고 가르쳤지요. 구약 성경 역시 다윗을 “이스라엘의 노래들을 지은 이”(2사무 23,1)로서 시인(2사무 1,17.19-27; 3,33-34)이요 음악가(1사무 16,16-23; 18,10), 악기 발명가(1역대 23,5; 아모 6,5; 느헤 12,36)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을 연구해보면, 도저히 역사상의 다윗이 지었다고 볼 수 없는 대목이 많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시편은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신앙인들이 짓고 사용하고 전해준 기도들이 모이고 쌓여 이뤄진 책입니다. 유다인들이 시편집 전체를 다윗 임금의 저작으로 돌렸던 것은 단순히 책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신학적 이유에서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왕이요 고통받는 의인, 용서받은 회개자, 그리고 메시아의 예형으로 여겨왔던 인물인 다윗의 기도를 내가(!) 바침으로써 시련과 역경, 기쁨과 찬미의 다양한 순간에 참된 기도를 올렸던 다윗처럼 나 역시(!)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었지요.
시편집의 구조가 주는 가르침
우리 성경에 시편은 한 권의 책으로 실려 있지만 원래 시편은 다섯 권의 책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1-41편; 42-72편; 73-89편; 90-106편; 107-150편) 그냥 편의상 그렇게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기도의 마지막에 영광송을 바치듯이 이 다섯 권의 책들 끝에는 늘 종결찬양(영광송)이 있는데(41,14; 72,19; 89,53; 106,48; 150,6[또는 146-150편 전체]), 이것이 구분의 기준이 됩니다. 고대 근동 문화에서 오각형은 방패와 보호를 상징하였는데(cf. 미국 국방부 펜타곤), 유다인들에게도 숫자 ‘5’는 비슷한 의미였나 봅니다. 모세오경도 다섯 권(창세기-신명기), 지혜서도 다섯 권(욥기-집회서)인 것을 보면 시편 역시 다섯 권으로 나눈 것이 우연은 아닌 게지요. 분명 시편에는 참된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올바로 지키고 살아내려 했던 신앙 선조들의 굳은 결기가 담겨 있습니다.
시편집은 전체적으로 ‘호소와 탄원’에서 ‘찬미와 감사’로 옮아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개별 시편들을 보면 처음에는 탄원과 토로, 때로는 원망으로 시작하지만 차차 하느님께 믿음을 고백하며 결국 찬양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예. 시편 4-7편; 22편) 또 앞서 말씀드렸듯이, 다섯 권의 소(小)시편집 모두 한결같이 종결찬양(영광송)으로 마치고 있지요. 시편집 전체를 놓고 봐도 이러한 흐름은 분명합니다. 전반부는 탄원시편이 주를 이루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찬양시편의 비중이 커집니다. 게다가 시편집 전체가 찬양시편들(‘할렐루야 시편’: 146-150편)로 끝나지요. 이렇듯 ‘탄원에서 찬양으로’ 나아가는 시편의 구조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순수한 찬양과 감사로 마쳐져야 한다.’는 가르침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뭔가를 청하거나 호소하며 일방적으로 자기 얘기만 하는 기도에 그치곤 합니다만, 사실 순수한 찬미와 감사의 기도만큼 그분께 큰 기쁨이 되어드리는 기도가 또 있을까요. 시편집을 지칭하는 히브리말(‘터힐림’, ) 자체가 ‘찬양가들’이란 뜻입니다. 시편으로 기도할 때에 우리는 어렵지 않게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찬양 기도를 바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시편, 행복의 길을 보여주는 책
시편 1편과 2편에는 머리글이 없습니다. 시편집 1권의 나머지 시편들(3-41편)과의 큰 차이점이지요. 다른 시편들과 구분되는 이 두 시편은 흔히 ‘시편집 전체를 여는 서언(prologue)’으로 여겨집니다. 시편 1-2편은 마치 하나의 시편처럼 결합되어 있는데, 그 시작과 끝은 똑같은 말로 시작하고 끝납니다. 그건 바로 “행복하여라!”( ‘복되다’: 1,1; 2,12)라는 감탄사입니다. 문득 산상설교 때 예수님께서 하셨던 ‘행복선언’(마태 5,3-12; 루가 6,20-23)을 떠올리게 되네요. 시편 저자는 시편 1-2편의 행복선언을 통해 우리가 행복으로 향하는 그 길을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시편 1,1-2),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2,12)
“행복하여라!”라는 말은 시편집에 무려 28번이나 등장합니다. 시편은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하는 안내서이니, 시편을 읽고 기도하면서 행복의 길로 나아가라고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지요. 시편은 기도를 제대로 하고 싶은 열망은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올바른 기도를 가르쳐주고, 깊은 내적 평화를 얻도록 인도하는 ‘기도의 참고서’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과 멀어진 듯 느껴지는 일상 속에서 마음이 참담했던 분이 혹여 계시다면, 시편 102편(머리글: “낙담하여 주님 앞에 자기 근심을 쏟아붓는 가련한 이의 기도”)을 한 줄 한줄 천천히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읽으면서, 진심을 담아 하느님께 말씀을 건네 보시면 어떨까요?
시편, 기도의 힘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마태 27,46) 십자가 위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예수님께서 부르짖으실 때 그곳에 서 있던 사람들은 “이자가 엘리야를 부르네.”, “가만,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주나 봅시다.”라고들 했습니다. 예수님의 외침을 ‘하느님은 대체 어디 계시기에 나를 버려두시는가?’ 하는 한탄이나 ‘도와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같은 간청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시편 22편의 첫머리(1절)를 인용하여 기도하신 겁니다. 비록 한 구절밖에 외치지 못하셨지만 평소 늘 성부께 기도하시던 그대로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시편으로 기도하신 것이지요. 시편 22편의 내용 전체를 알아야 예수님의 그 단말마와 같은 외침의 참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편 22편은 극도의 고통과 박해 속에서 하느님을 소리쳐 부르던 한 의인이(1-22ㄱ절) 마침내 하느님의 응답을 받고 서(22ㄴ절) 이스라엘의 후손들뿐 아니라(23-27절) 세상 끝날까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28-32절)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게 될 것임을 확신하며 찬양을 드리는 노래입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라는 단말마의 외침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세말까지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될 것임을 아셨기에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성부께 의탁하며 그분을 찬양했던 예수님의 ‘희망과 찬양의 노래’였던 것 이지요. 기도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영혼은 결코 절망 속에 머무르지 않고, 반드시 확신과 내적 충만함으로 인도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본보기의 의미요, 하느님의 약속인 것이지요.
올 초에 몸 관리를 잘 못해서 한 주 내내 목이 쉬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강의 때문에 목소리를 크게 내려 해도 얇은 쇳소리만 났었지요. 가끔은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나태함에 스스로 무너져 버렸거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무언가로 상처받아 스스로는 도저히 신뢰와 찬미의 기도를 드릴 힘을 내지 못할 때가 있지요. 그러나 그럴 때조차도 그저 시편을 꺼내어 펼쳐들고 따라 읽기만 해도 어느샌가 시편의 거룩한 저자들과 함께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괴로움 속에서도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가장 작은 이를 하느님께서 얼마나 어여삐 여기시는지는 잘 알고 계시겠지요. 기도할 줄 모르는 내가 확신과 내적인 평화를 회복하고 다시 하느님 안에서 강인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이끌어주는 힘을 지닌 기도의 책이 바로 ‘시편’입니다.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응답을 받고 확신을 얻고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새롭게 시작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길 빕니다.
[월간빛, 2019년 8월호,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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