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교황청 과학원] 갈릴레오 사건의 진상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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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타한인성당 | 작성일2012-10-12 | 조회수4,748 | 추천수0 | |
교황청 과학원, 갈릴레오 사건 해결 1주년 기념 특별 기고
갈릴레오 사건의 진상
김명자 헬레나(숙명여자대학교 교수)
교황청 과학원은 1992년 10월 31일 “갈릴레오 사건이 속한 16~17세기 천동설-태양 중심설 논쟁의 연구를 위한 교황청 위원회”의 활동을 마치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11월 10일, 아인슈타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갈릴레오 사건을 재검토하고 오류를 밝힐 것을 촉구했고, 1981년 7월 3일 연구 위원회를 구성시켰다. 10여 년의 연구 결과, 갈릴레오 사건은 교회의 잘못으로 인정되었으며 갈릴레오는 서거 350년 만에 이른바 복권되었다. 다음은 당시의 상황을 재현시키면서, 갈릴레오가 단죄된 이면을 소개하는 것이다.
지구가 하루에 한번씩 자전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는 내용 등을 담은 1543년의 코페르니쿠스의 “천구들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Libri Sex)는 1616년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수정될 때까지” 읽어서는 안된다는 금서 목록에 오른다.
코페르니쿠스가 그의 천문학 체계를 책으로 펴내게 된 데에는 루터교파의 수학 강사였던 레티쿠스의 권고와 도움이 컸다. 이 책의 서문은 시간에 쫓긴 레티쿠스로부터 의뢰받은 루터파의 오시안더가 쓰게 됐고, 그는 전통적인 교양 학문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오시안더는 코페르니쿠스가 비난받을 것을 염려하여 그 내용에 단순한 수학적 수단임을 강조하는 서언을 썼다. 그리고 그의 책은 교황에게 헌정됐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은 갈릴레오에 의해 지지되기 이전까지는 수리 천문학의 전문 학자들에 의해서 일부 수용됐을 뿐 거의 잠자코 있었다. 1609년 망원경으로 하늘 세계를 관찰함으로써 금성의 삭망 현상 등 태양중심설을 뒷받침하는 단서를 얻은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선다(1611~15년 사이). 갈릴레오는 세계는 수학의 언어로 쓰여졌고, 수학이 자연에 대한 열쇠가 된다고 믿었다. 그는 그 자신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의 신앙에 바탕하여 우주의 탐구에 열중했던 만큼, 교회가 그의 견해를 지지할 것이고 계몽된 가톨릭이 과학의 진보를 도울 것이라고 낙관했다.
가톨릭 교회는 처음에는 갈릴레오의 망원경 업적을 찬양했다. 갈릴레오는 교황 바오로 5세의 환대를 받았고, 체시 공은 그의 공로를 기려 린체이 아카데미(Accademia dei Lincei)에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갈릴레오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은 대학 내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차츰 평신도와 하급 성직자들로부터 비판이 일기 시작하면서 갈릴레오는 고발당하나, 교회측은 이를 기각한다.
갈릴레오에 대한 제재는 1615년 포스카리니(P.A. Foscarini)가 성서와 코페르니쿠스주의가 부합된다는 주장을 한 데서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한다. 그는 성서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과학적 언어가 아니라 대중적 언어를 이용했다고 변명했다. 갈릴레오 또한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 진실은 하나이지만 그것에 관해 논하는 데에는 두 종류의 말, 즉 일상적인 언어와 과학적인 언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갈릴레오가 지지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은 그리스도교 교리와 어떻게 상충되었는가? 우선 고대 이래로 우주의 중심이었던 지구가 태양과 자리바꿈하여 한낱 행성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지옥의 위치가 지구의 중심이라는 보편적인 믿음을 혼란시켰고, 예수의 승천에 대한 사실적 기초를 위태롭게 했으며, 창조의 목적이 인간 중심이었다는 관념을 약화시켰다.
갈릴레오는 성서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을 재해석하는 것을 통해 성서와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조화시키려 애썼다. 그는 성서의 목적은 과학의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며, 과학적 진리가 성서의 구절 해석과 상치될 때 그 구절은 재해석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갈릴레오는 바로니우스 추기경의 표현을 인용하여, “성령은 천국으로 가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지, 하늘이 어떻게 운행하는가를 말해 주려는 것은 아니다.”는 말로 그에 대한 비판에 반박했다.
갈릴레오는 지구의 운동에 관한 정확한 물리적 증거를 확보했다고 확신하면서, 조수 현상이 바로 지구 축 중심으로의 자전과 태양 주위로의 공전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갈릴레오의 이런 자신 만만한 주장은 로마에 태풍을 몰고 온다. 갈릴레오의 이 주장은 종교 재판소에 회부됐고, 그 결과 코페르니쿠스의 “천구들의 회전에 관하여”와 포스카리니의 서한은 금서 목록에 묶이게 된다. 그 과정에서 벨라르미노 추기경 등은 갈릴레오에게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권고했으나 그는 로마에 가서 많은 언쟁과 시비를 벌이게 된다. 결국 1616년 3월 5일 코페르니쿠스 체계는 참다운 철학과 신에 위배되는 틀린 주장이며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옳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강제 명령이 떨어지게 된다.
1623년에 그의 친구였던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새 교황 우르바노 8세로 선출되면서 갈릴레오는 여러모로 특혜를 누리게 된다. 새 교황은 진보적이고 이해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 금서 해제 요청과 관련해 여섯 번의 면담을 거친다. 그 결과 갈릴레오는 지구 중심설과 태양 중심설의 두 체계에 대한 장단점과 그 이유를 공정하게 살필 수 있는 대화편을 쓰도록 윤허받는다. 이 과정에서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설의 주장이 완전히 허용된 것으로 받아들인 반면, 우르바노 8세 교황은 이미 금지된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해 단지 문학적 가치의 작품을 쓰도록 함으로써 교회가 충분히 배려하고 있음을 보이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이 두 체계가 가설적인 체계라는 점은 이해하고 있었다.
갈릴레오는 플로렌스로 돌아와 1625년부터 “두 주요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Dialogo dei massimi sistemi del mondo)를 집필한다. 이 과정에서 갈릴레오는 몇 차례(1626~29년) 병치레를 하느라 탈고가 늦어진다. 갈릴레오는 지구 중심설과 태양 중심설들이 둘 다 순전히 가설이고 진리는 오직 신만이 안다고 강조하면서, 이 ‘대화’에서 세 사람의 등장 인물 사이의 사흘 간의 대화를 통해 우주 체계를 논한다. 즉 심플리치오(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 지구 중심설), 살비아티(코페르니쿠스주의자 : 태양 중심설) 그리고 사그레도(중도 입장)의 세 사람의 대화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 심플리치오가 바보스럽게 반박함으로써 결국 둘의 합세로 심플리치오가 조롱받으며 설득되는 것으로 결말난다. 따라서 독자들이 태양 중심설에 기울도록 쓰여졌고, 책은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 더욱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심플리치오가 교황을 모델로 했다는 소문이 돌고 그것이 교황의 귀에까지 들어가 교황의 격분을 샀다는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이밖에도 여러 가지로 일이 꼬였다. 갈릴레오는 이 책의 출간 허가 업무를 맡았던 친구 리카르디(Riccardi)에게 원고를 보냈고, 이 원고는 다시 비스콘티(Visconti)에게 보내졌다. 그런데 비스콘티는 점성술 계산에 의해 교황이 일찍 서거할 것이라고 예언한 모란디(Morandi)의 친구였다. 갈릴레오는 이 예언에 대해 잘 몰랐다고 하나, 이들과 어울렸던 까닭에 로마에서 평판이 나빴다. 모란디와 비스콘티는 이 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징계를 받았고, 교황은 점성술과 마술의 현혹에 개탄했다. 이 사건에서 갈릴레오의 이름이 거론됐음은 물론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르바노 8세의 문학 친구였던 치암폴리(Ciampoli)의 사건은 갈릴레오를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는 갈릴레오의 ‘대화’ 출간의 승인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치암폴리의 친구인 스페인 주교 보르기아(Borgia)가 1632년 추기경 회의에서 교황의 지위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한 것이 화근이 되어, 교황은 치암폴리를 추방한다. 그의 몰락은 갈릴레오에게 큰 타격을 안긴다.
실상 이 책은 원고 검열을 요구하는 복잡한 허가 단계를 거쳤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시비가 제기됐다. 리카르디는 플로렌스에서 이 책의 인쇄를 허가하면서, 서론과 결론의 사전 검열을 요구했다. 그리고 로마에서 최종 토론을 거쳐 매듭지을 것을 요구하다가 결국 책을 로마로 송부해서 자신과 치암폴리가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여곡절 끝에 리카르디는 문책을 받게 됐고, 그는 치암폴리가 그것을 인가했다고 변명했다. 이 인가에 대해 로마에서 말썽이 나자 리카르디는 플로렌스에 서신을 띠워 갈릴레오의 ‘대화’를 판금하도록 요청한다. 1632년 교황은 ‘대화’의 인가 경위에 대해 조사하도록 명령했고, 이때 종교 재판소에서 송부된 서명 없는 한 장의 메모가 접수된다. 그것은 1616년 지구가 운동한다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도 주장하거나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고, 이를 근거로 갈릴레오는 종교 재판소의 명령에 위배되는 행위를 범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1632년 12월 갈릴레오는 교황의 명령을 거역한 죄로 종교 재판소에 소환되나, 처음에는 불응한다. 1633년 2월에는 교황청에 출두하고, 4월 13일에는 첫 심문을 받는다. 그때 변호사가 입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5월에는 자기 변호를 하게 되는데, 그것에 관한 보고서가 갈릴레오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성됐다고 한다. 6월 16일에는 그의 태양 중심설 주장에 대한 전적인 부정과 철저한 참회에도 불구하고 유죄 판결을 받고, 그의 책은 금서가 된다. 그에게 내려진 형별은 무기 징역이었으나, 로마에 머물 때에도 상당히 안락한 여건이었고, 후에 피렌체로 가서 역학 체계에 관한 연구(Dialogue on Two New Sciences) 집필에 몰두한다. 그는 말년에 완전히 실명하고, 그의 역학 체계 원고는 네덜란드의 라이덴으로 밀반출되어 출간된다. 갈릴레오의 “두 주요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는 1823년에 이르러서야 금서 목록에서 삭제된다.
위에서 개괄적으로 살펴본 사건의 전개에서 보듯이, 갈릴레오 사건의 성격은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된 것으로 분석된다. 이탈리아는 개혁에 대한 신뢰의 상실에 따라 내적인 안정의 추구를 위한 권위 회복이 매우 중요했고 지지를 얻고 있었다. 특히 교회가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간접 경고로써 강경 조치가 취해졌던 측면도 있다. 또 수학적 경험주의의 과학자로서 갈릴레오는 그의 주장이 교회에 쉽게 용인되리라는 낙관적 믿음에 빠져 있었고, 자기 자신의 철저한 신앙심에 근거하여 우주에 관한 참된 지식이 신에 대한 거역이 될 수 없다고 믿었기에 현실을 직시하는 데 어두웠다. 그러나 교황은 철학자인 까닭에 과학적 발전에 대한 인식이 갈릴레오와는 달랐고, 우롱당한 것에 대한 개인적 감정도 작용했던 것으로 논의된다. 결과적으로 갈릴레오의 종교 재관은 종교와 과학 양쪽에 큰 고통을 주었다. 더욱이 그것이 마치 과학과 종교 사이의 전형적 관계처럼 인식되어 사실과는 다른 왜곡된 이미지를 굳혀 온 것도 손실이라 생각된다.
[경향잡지, 1993년 10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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