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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사도행전 이야기32: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다(사도 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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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9-23 조회수6,042 추천수0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32)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다(사도 11,1-18)


이방인들을 향한 복음 선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다

 

 

예루살렘의 할례 받은 유다인 신자들은 베드로가 카이사리아에서 한 행동이 못마땅했지만, 베드로의 설명을 듣고는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들에게도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며 하느님을 찬양한다. 사진은 지중해변 카이사리아 도시 유적.

 

 

유다인이 아닌 이방 민족들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들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는 소문은 예루살렘의 제자 공동체에 전해집니다. 그들은 이 소식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달갑잖은 사촌격인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졌을 때도 놀라서 확인하고자 베드로와 요한을 직접 사마리아에 보내기까지 했었습니다.(8,14-17)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가 돌아오자 따져 물었고, 베드로는 그 연유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본문을 따라가면서 살펴봅니다.

 

 

예루살렘 제자 공동체의 힐문

 

카이사리아에 있는 이방 민족들, 곧 코르넬리우스와 그 집안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문은 사도들과 유다 지방의 형제들에게까지 퍼집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오자 할례받은 신자들, 곧 유다인으로서 말씀을 받아들여 제자 공동체에 합류한 이들이 베드로에게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니요?” 하고 따져 묻습니다.(11,1-3)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아직 유다교의 테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공동체는 유다인들이 배척한 나자렛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선포한다는 점에서 유다교와는 완전히 구별됐지만, 그 뿌리는 여전히 유다교였고 유다교의 많은 전통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 이방인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특히 그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지 않는다는 것 등도 그대로 지켰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이 공동체는 그래서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고 또 율법과 예언서의 가르침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멸시하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베드로와 요한을 직접 파견해 확인하기까지 했지요.(8,14)

 

그런데 코르넬리우스는 사촌격인 사마리아인들과 사정이 전혀 달랐습니다. 코르넬리우스는 말 그대로 완전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가 하느님을 믿고 있다고 하지만 할례를 받아 유다교로 개종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코르넬리우스와 그 집안은 유다교의 전통에서 볼 때는 어울려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의 교회 공동체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유다교의 전통을 엄격히 고수하는 신자들 - 할례받은 히브리계 유다인들 - 과 옛 전통을 지키는 일에 비교적 관대한 신자들-주로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섞여 있었을 것이라는 점도 생각해 둡시다.

 

 

베드로의 설명

 

이제 본문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베드로에게 따져 물은 신자들은 유다교의 전통을 엄격히 고수하고자 하는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 눈에는 이방인들과 어울려 며칠씩 함께 지낸 베드로가 못마땅했습니다. 그들이 볼 때 베드로는 율법을 어긴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의 설명은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야포에 머무를 때에 무아경 속에서 본 환시입니다. 큰 보자기 그릇 속에 온갖 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보였고,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소리에 “절대로 안 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하고 거절하자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하는 소리가 다시 들렸고, 이런 일이 세 번이나 거듭됐다는 것입니다.(11,5-10)

 

둘째 부분은, 카이사리아에서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아왔고, “주저하지 말고 그들을 따라가라”고 성령께서 이르시는 대로 그들을 따라 카이사리아에 갔더니 사람들이 구원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있었고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는 중에 그들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는 것입니다.(11,11-15)

 

셋째 부분은 이런 제반 상황에 대한 베드로의 깨달음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에 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11,16)

 

마지막으로, 자신을 질타하는 예루살렘 신자들에 대한 베드로의 항변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11,17)

 

베드로의 이런 설명을 들은 신자들은 잠잠해졌습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그리고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라는 묘사로 이 이야기를 끝맺습니다.(11,18)

 

베드로가 이방인과 어울린 것을 못마땅해 하던 유다인 신자들이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며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것은 이제 다른 민족들, 곧 이방인들을 향한 복음 선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받아들이고 또 알리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봅시다

 

코르넬리우스와 그 집안이 복음을 받아들인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서가 전하는 ‘가나안 여자의 믿음’에 관한 일화(마태 15,21-28)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가나안 여자는 마귀 들린 자기 딸을 구해 달라고 거듭거듭 예수님께 부르짖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시자,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면서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또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재차 거절하시자, 그 여자는 “그렇지만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하시며 그 여자의 딸을 치유해 주십니다. 여기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출신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엎드려 절하고 부스러기라도 먹으려는 간절함이 드러나는 믿음입니다.

 

가나안 여인과 마찬가지로 코르넬리우스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심이 깊은” 이방인으로서 “온 집안과 함께 하느님을 경외하며 유다 백성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고 늘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믿음을 실천하는 이방인이었고, 그 믿음은 구원의 말씀을 목말라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 믿음이 그와 그의 온 집안을 구원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이제 유다인 중심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모든 민족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믿음에는 어느 정도나 간절함이 담겨 있는지요?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9월 22일, 이창훈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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