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좋은 말씀 덧붙입니다. 우리는 자주 묵주와 염주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윤회사상과 부활사상에 대하여 묵상도 하겠지요. 그러면서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려 노력하고 “처음과 같이 이제로부터 영원히”라는 기도에 매진하기도 할 것입니다.
오늘 어떤 성인께서는 ''그리스도 단성론''이라는 이단사상과 싸운 일화를 보여주십니다. 인성은 없고 신성만 있다는 이단사상을 지적하신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그러한 묵주에 찜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필자도 성령 가득한 친구가 다짜고짜 성당에서 파견 되는데 내 허락 없이 안수를 주기에 신부님께 다시 받은 적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돌아보면 그 조차 과거가 아닌 추억으로 정화하는 것이 소중하답니다.
사람에 따라서 베드로 성인의 성장기처럼 즉각 문을 열고 주님 품에 안기려는 달란트가 있고 바오로 성인처럼 하느님이 주시는 지혜로 무장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저마다 무쏘의 뿔처럼 당당히 홀로 어딘가를 향합니다. 그런데 왜 자살자도 많고 우울한 사람들도 여전히 많을까요? 묵주에는 그러한 것을 치유할 엄마 약손이 담겨있을 것입니다. 이런 스킨 쉽 많이 받은 사람이 우울증도 적다는 통계가 있기에 어느 한 사람 공인의 자살과 베르테르 효과를 차단하는 것도 묵주기도의 힘으로 얻게 되겠지요?
가톨릭은 여타 개신교와 달리 엄정한 율법이 존재하기에 율법 자체를 겁내지 마세요. 어린아이처럼 엄마랑 놀 듯 총천연색 묵주를 혼자 가지고 노는 것도 양호합니다.
그것을 축성해줄 수 없는 신부님 입장 고려해서 일반 장난감처럼 생각하면 될 것으로 보여 집니다. 신부님들은 성물 외에 일반 물건 등에 축성해 달라 하면 축성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론 해 주셔야 할 때도 많겠지요? 어떤 이는 그럼 자동차 축성은 왜 해주실까? 의문이 들겠지요?
묵주와 염주차이도 크게 보면 같은 것인데 그리스도 신자가 조심해야 할 것은 신성만 있고 인성이 없다는 이단사상도 경계해야 할 것이고 염주를 열심히 돌리고 목탁을 두드리지만 이것과 연계된 명리학(사주팔자) 등으로 호기심에 속는 신도들을 스스로 육보시에 속아 유린하는 현실도 묵과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특징 또한 자기죄를 알지만 엄마 스킨쉽 부족 현상인 것이지요. 아무튼 개신교에도 이런 땡초 목사들이 난립해 있는데 가톨릭의 제2의 예수이신 사제는 99% 없는 점이 왜 그럴까요? 변할 수 없는 전례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피는 생명, 물은 죽음이되 이 때의 성령은 셋이자 하나라는 믿음 자세로 가볍게 날아가면 된답니다.
2013. 1. 11. 海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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