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부활은 이미 오늘 일어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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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11-14 | 조회수7,889 | 추천수0 |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부활은 이미 오늘 일어난다(Auferstehung geschieht schon heute)
그 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카 20,38) 예수님의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치 죽은 이들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신다는 뜻일까요? 우리의 삶은 생명으로 충만한 삶, 그야말로 생명이 흘러넘치는 삶이라는 말씀일까요?
사실 어떤 이는 살면서도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이는 내적으로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어쩌면 말끔하게 치장된 모습일지 몰라도, 내부는 공허한 채로 아무 희망 없이 살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사회적 통념으로는 이른바 ‘삶의 질’을 결정하는 모든 것을 다 잃은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심각한 질병을 앓는 예가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이가 진실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믿는 이들과의 친교 속에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제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이들 가운데는, 중병을 앓아 겉으로는 심각한 타격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거의 움직일 수조차도 없게 된 이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서는 수많은 건강한 이들보다도 그들을 더욱 생생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빛납니다.
한번은 죽음을 앞둔 한 자매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병은 나을 수 없는 중병이었고, 그분은 이미 마지막 단계에 있었습니다. 완전히 야위어 있었지요. 병실에 들어서기에 앞서, 저는 사제로서 그분에게 무엇인가 영적인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보자마자, 그런 말은 필요하지도 않을뿐더러 당치도 않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미소를 지으며, 모든 것에서 해방된 커다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위로를 준 게 아니라, 그분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분이 저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마카베오 형제들
이처럼 한 사람의 죽음이 생명일 수 있고, 다른 이들에게 빛을 선사할 수도 있습니다. 죽음 한가운데서도 생명으로 빛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마카베오기에서 일곱 형제와 그 어머니를 그런 사람들로 우리에게 전해줍니다(2마카 7,1-42 참조). 잔인한 폭군은 이들을 모두 고문하고 처형하게 합니다. 그들이 토라의 규정들을 어김으로써 유다 신앙을 저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럴 마음이 없고, 자신들의 신앙이 다른 모든 것보다 더 거룩하기 때문에, 죽음을 택합니다.
그들에게 본래 죽음은 안티오코스 임금의 부하와 형리들을 통해 가해지는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법이 우리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이미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만을 바라고 세상에서 그분 것만을 갈구하는 순간에, 그들은 죽었고, 이 죽음 한가운데서 이미 생명으로 건너간 것입니다.
부활은 이미 오늘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은 죽음 이후에야 시작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여기 이 지상의 시간에 신앙으로 살던 바가 바로 부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이 시간의 결실이고 우리 삶의 열매이며 우리 역사의 결과입니다. 수확한 뒤에 하느님에 의해 영원한 생명으로 바뀌게 될 모든 것은 그에 앞서 여물고 익지 않으면 안 됩니다. 먼저 씨를 뿌리고, 천천히 성장하고, 꽃을 피우고, 여무는 일 없이 수확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을 위해 거두어들이는 것들은 먼저 꽃을 피우고 한껏 여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 ‘지금’ ‘오늘’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누군가 온전히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기대한다면, 세상에서 오롯이 하느님의 일을 찾고 ‘하느님의 영광’ 외에는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바로 거기에서 이른바 ‘본연의 것’, 곧 ‘영원한 삶’이 이미 시작됩니다. 그런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거기 이미 죽음과 부활이 일어납니다.
이 사실을 가리켜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바오로는 에페소 공동체에 보낸 서간에서 더욱 날카롭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에페 2,6)
대개 우리는 그런 말씀들을 흘려듣습니다. 원래는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커다란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씀인데도 그렇습니다. 매일같이, 매 순간, 우리 삶에서 이미 죽음과 부활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곧 우리가 세상의 악과 우리 안의 악에 저항하는 가운데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 속으로 투신한다면, 거기 이미 죽음과 부활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세례의 신비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세례를 매일 매 순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사두가이 몇 사람과 논쟁을 벌일 때, 예수님께서 하느님 백성의 선조들을 두고 하신 말씀도 바로 그런 의미였습니다(루카 20,27-40 참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아버지 집을 뒤로하고 약속의 땅을 찾아 떠났습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지상의 삶 한가운데서 이미 ‘영원한 삶’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사두가이들의 오류
루카 복음서 20장 27-40절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두가이들의 논쟁은 처음에 이상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층이던 사두가이들은 죽음 이후의 삶을 부정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내세우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이댑니다.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루카 20,29-33)
이 이야기는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부활에 대한 생각이 터무니없음을 드러내려고 하는 말일 따름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을 우습게 만들려고 합니다. 우스꽝스럽게 하면 이긴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먼저 예수님은 지어낸 그 이야기를 반박하십니다. 그 이야기가 부활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밝히십니다. 부활은 모든 것이 지금처럼 똑같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부활은 새 창조이며 이 창조를 통해 인간은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하십니다(루카 20,36 참조).
물론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해서, 이것이 몸이 없어지고 자신의 모든 역사가 뒷전으로 밀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는 천사들처럼 인간 존재도 순전히 하느님을 섬기는 봉사가 되고, 다른 이들을 위해 온전히 파견받은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오롯이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찬양에 봉사하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상할 수조차 없는 최고의 복입니다. 천사들과 같아진다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고 사두가이들이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마르 12,27)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대답 가운데 첫 부분에 해당할 뿐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훨씬 더 근본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반대자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은 대략 이렇게 옮겨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주장의 근거를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서 찾는다. 옳은 일이다. 하지만 너희 주장대로 너희는 아주 오래전에 죽은 이들에게서 근거를 찾는데, 이미 이 세상 한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부활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곧 그들이 옛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가운데 새것을 찾아 모험을 감행한 바로 그 순간에 부활이 시작되지 않았겠느냐?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아브라함이 아버지의 집을 떠났을 적에, 그에게는 하느님 안에서 새 삶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 말씀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우리 자신을 두고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나 자신의 개인적인 계획과 원의와 꿈들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집을 떠날 때마다, 하느님을 향해 새로운 발걸음을 감행할 때마다, 그분과 그분의 교회를 위해 작은 무엇인가를 할 때마다, 함께 모여 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때마다, 이미 지금 부활이 시작됩니다. 그때마다 이미 오늘 우리의 부활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감히 우리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이미 이 지상에서 시작된 이 부활을 하느님께서 마지막에 완성하시리라고 참으로 희망해도 좋습니다. 그때에 그분은 우리를 충만한 빛과 광채 속으로, 영원한 삶과 끝없는 축제 속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니까요.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 Gemeind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이 칼럼은 저명한 성서신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보내오는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9년 11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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