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사 6,9-10은 반어법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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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3-01-28 | 조회수550 | 추천수1 | 신고 |
1.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제자들에게는 이해하는 주시고 2. 바깥 사람들에게는 당신 말씀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
이 인용구는 이사 6,9-10을, 예수님 당시에 쓰이던 구약 성경의 아람 말 번역본인 타르쿰에서 그리스 말로 옮긴 것이다. 이사야서의 이 구절은 예언자의 설교가 실패 하리라는 사실을 예고한다. 백성은 고집스럽게 예언자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음 으로써, 그 죄가 더욱 무거워지는 것이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교 선교가 유다인들 사이에서 실패한 사실과 관련하여 이 본문을 사용한다. 유다인들의 완고함이 이미 예언자들에게서 예고되었고, 하느님의 계획 안에 포함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요한 12,39-41; 사도 28,26-28).
예수님께서도 이 같은 완고함에 부딪혀 실패를 체험하셔야만 했다. 그러나 예언서의 구절이 여기에 인용된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메세지를 감추시고 "바깥 사람들"의 회개를 원하지 않으셨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의 실패가 성경이나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과 일치한다는 점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의 최종적 이유는 제시되지 않는다(로마 11,7-16. 29-32 참조). 그렇다고 하느님의 섭리에 관한 생각이 인간의 책임성을 결코 약화시키지 않는다(24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섭리가 인간의 책임성이라는 두 전제 아래 당신의 실패를 이해하셨을 것이다.
마르코는 이러한 숙고를, 어쩌면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된 상황 때문에 초대 그리스 도교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워진 비유들에 적용한다. 비유들은 그것들이 전제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따라 이해되어야 하는데, 바로 예수님의 언행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그 다음에는 교회 공동체에 계시되는 것이다.
출처: 주석성경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한 말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주님 ,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습니까?' 그들이 믿을 수 없었던 까닭을 이사야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였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분에 관하여 이야기한 것이다."(요한 12,37-41)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하고 내가 아뢰었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16)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 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8-10)
16. 직역:" ... ... 마음을 기름지게 하고," 마음 곧 심장에 기름기가 너무 끼어 둔해지고 결국 움직임을 멈춘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반항적이며(1,2-5.19-20; 3,8-9;30,1) 알아들으려 하지 않는 (특히 30,9-11 참조), 청중들에게 메세지를 선포한다. 예언자의 선포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한 것은 이 때문이며(29,9-12), 예언자는 아하즈 임금의 일에서도 이러한 경험을 분명히 하게 된다(7,2.12-13; 8,6.14-15). 이런 소명을 받은 것은 이사야만이 아니다(예레 1,10; 에제 2,3-10; 3,4 참조) ㅡ 출처: 주석성경
"이들은 거역하는 백성 거짓된 자식들이며 주님의 가르침을 들으려 하지 않는 자식들이다. 이자들은 선견자들에게 '계시를 보지 마시오.' 하고 예언자들에게 '우리에게 올바른 것을 예언하지 말고 솔깃한 말이나 하고 환상같은 것들이나 예언해 주시오. 정도를 버리고 바른길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에 대한 말은 우리 앞에서 이제 그만 하시오.'' 하고 말한다."(이사 30,9-10)
"너희는 깜짝 놀라서 어리둥절해하리라. 스스로 눈을 들어붙게 하여 눈이 멀리라. 포도주 없이도 취하리라. 술이 없이도 비틀거리리라. 주님께서는 너의 위로 너희 예언자들의 눈을 감기시며 너희 선견자들의 머리를 덮어 버리셧다. 이 모든 것에 대한 환시는 너희에게, 봉인된 문서의 말씀처럼 되어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글을 아는 이에게 '이것 좀 읽어 주시오.'하고 그것을 내주면, 그는 '봉인되어 있어서 못 읽겠소.'하고 대답한다. 그리고 글을 모르는 이에게 '이것 좀 읽어 주시오.'하고 그 문서를 내주면, 그는 '나는 글을 모르오.'하고 대답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니 나는 이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놀랍고 기이한 일을 계속 보이리라. 그리하여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는 사라지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는 자취를 감추리라.'"(이사 29,9-14)
200주년 기념 해설서 내용입니다. 12절은 이사 6,9-10 인용문인데, 히브리어 원문이나 그리스어 칠십인역을 따르지 않고 예수시대 이스라엘 상용어인 아람어역을 그리스어로 중역한 것이다. 비신도들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밀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알아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도록 예정하셨기 때문이라 한다.
어불성설이다. 어덯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묵시문학계에는 예정설이 성행 했는데 그 여향을 많이 받은 어느 신도가 비신도들의 불신현상을 예정설로 설명 했을 것이다. 위의 여러 논거로써 11-12절의 단절어는 유다계 그리스도 교회에서 만들어 전한 말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내용을 요약하면,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했더니 그것을 받아들여서 신도가 되는 사람들과 물리쳐서 비신도로 남는 사람들로 양분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누군가 이 현상을 묵시문학적 예정설로 설명했다.
말하자면 신앙과 불신의 현상을 철두철미 신론적 관점에서 해설한 것이다. 인간론적 관점을 일체 고려 하지 않은 극히 일방적인 해설이다.
끝으로 마르코 자신이 10-12절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필 차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청중으로 하여금 쉽게 알아듣게 하려고 자주 비유로 말씀하셨다. 즉 구체적 예를 드신 것이다.
그런데 마르코는 10-12절에서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 비유 이론을 전개한다. 예수님은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비유는 혼자서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라는 것이다. 예수님 친히 설명해 주셔야 비로소 그 뜻이 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제자들에게만은 따로 비유를 풀이해 주셨다 한다(4,13-20.34).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예를 드는 선생이 세상 어디 있겠는가? 마르코가 어떻게 이런 비유 이론을 전개해게 되었을까? 마르코 자신의 독특한 그리스도론 때문에 그런 비유 이론을 내세운 것 같다.
마르코가 주창한 그리스도론인즉, 이승의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밝히기는 고사하고 오리려 당신 신분을 감추셨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 셨다는 것이다. 그분의 정체는 수난하시는 가운데 비로소 드러났다는 것이다 (14,62; 15,39).
예외적으로 제자들에게만은 당신이 수난할 메시아라는 사실을 밝히셨다는 "메시아 비밀사상"이다(해제 V,3;4,ㄱㄴ 참조). 그리고 백성에게는 알아들을 수 없는 비유만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는 따로 비유를 풀이해 주셨다는 "비유 이론", 이 두 가지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이상으로 공부한 내용을 종합하여 이해한 내용을 정리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소명 이야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에서 누구를 보낼까 하셨을 때에 이사야가 그 소리를 듣고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아뢰었을 때에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9-10)
이 말씀은 반어법이라고 배웠습니다. 자신있게 자신이 가겠다고 하는 이사야 예언자에게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얼마나 완고한지를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함은 위의 성경 구절 이사 29,9-14과 30, 9-10을 참조하시면 아실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을 전해도 역시 그 때와 다를 바 없이 똑같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하여 위의 두 질문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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