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구약 성경 다시 읽기: 저승(셰올)을 넘어서 불멸의 영광을 향하여! 지혜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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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12-12 | 조회수7,376 | 추천수0 | |
[구약 성경 다시 읽기] 저승(셰올)을 넘어서 불멸의 영광을 향하여! 지혜서
“의인들의 영혼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 의인들은 영원히 산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보상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그들을 보살피신다.”(지혜 3,4-5; 5,15 참조)
히브리 성경에는 없는 책, 지혜서
지혜문학 오 경 중 지혜서와 집회서는 히브리 성경(TaNaK)에는 없고, 그리스어 구약 성경인 칠십인역(Septuaginta)에만 수록되어 있습니다. 칠십인역을 구약 성경으로 받아들인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가톨릭 구약 성경에는 당연히 이 책들이 포함되어 있지요. 특히 이번에 살펴볼 지혜서는 구약의 지혜문학 중 유일하게 원래부터 그리스어로 쓰여진 책이란 점에서 독특합니다.
저자는 스스로를 ‘하느님께 지혜를 간청하여 받은 임금’(7,7-14; 8,9-16; 9,1-18)이요 ‘성전을 지으라는 명을 받은 임금’(9,7-8)으로 자칭합니다. 이 때문인지 칠십인역 성경은 이 책에 ‘솔로몬의 지혜서(소피아 살로모노스)’라는 제목을 붙였지요. 그렇지만 헬레니즘적 사고와 수사학적 기교들로 가득한 이 지혜서가 기원전 10세기경 이스라엘 임금 솔로몬이 쓴 책일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잠언과 코헬렛의 저자들처럼 지혜서의 저자 역시 현자의 표상인 솔로몬의 명성을 빌어 책의 권위와 내용의 정당성을 내세우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 지혜 전통과 그리스 철학의 만남
마케도니아의 젊은 임금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정복하여 근동 일대를 차지한 후, 기원전 332년경 시리아와 이스라엘을 거쳐 이집트까지 정복했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리스 문화와 맞닥뜨리게 되었고, 이 무렵 문서화되었던 이스라엘의 지혜문학들은 그리스 철학과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되었지요. 이 또한 하느님의 섭리였을까요, 이때 구약의 신학은 또 한 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지혜서는 지혜문학 오경 중 가장 늦게 쓰여졌으며, 가장 헬레니즘적인 책입니다. 저자는 구약 성경과 유다교 전통에 대한 깊은 지식은 물론이고(예. 창세기[10,1-15]와 탈출기[10,16-19,21]에 대한 미드라쉬적 해석) 그리스 철학과 수사학 등에도 탁월한 조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지혜서의 저자가 기원전 1세기 말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디아스포라에 살던 유다인으로서, 헬레니즘 철학과 문화에 능숙했던 지식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특이한 점은 지혜서 저자는 그리스 철학에 정통하고 수려한 그리스어 어휘를 구사하는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보이면서도, 결코 헬레니즘적 사고에 젖어 신앙 전통에 소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세상과 신앙, 모든 면에서 지혜로웠던 그는 진정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의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선포된 하느님의 지혜
지혜서는 이방인들과 유다인들 모두를 위한 책입니다. 유다교를 폄하하던 이방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신앙과 지혜의 우월함을 알리고(1,1: cf. 6,1-2), 헬레니즘 문화에 젖어 조상들의 전통을 잊어가던 유다인들에게는 신앙과 지혜를 지켜가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치는 책이지요. 지혜서는 헬레니즘이라는 세련되고 매혹적인 사조에 매료되어 신앙의 순수한 가치와 구원의 힘을 소홀히 대하던 이들에게 외칩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1,1) 그렇습니다. 지혜서는 2,000여 년 전 그때처럼 세상의 매력적인 것들에 온통 시선이 빼앗겨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길을 걷는데 소홀해져 가는 우리들을 하느님의 지혜를 따라 걷는 구원의 길로 여전히 초대하고 있습니다.
저승을 넘어서는 불멸의 영광을 노래하다
구약 성경의 전통적인 내세관에 따르면, 사람은 죽으면 누구나 저승(‘셰올’)으로 내려갑니다.(창세 37,35; 42,38, 민수 16,33) 유다인들은 저승이 땅 밑에 있는 어둡고 적막한 동굴과도 같은 곳으로 세상과는 관계없는 망각과 무위의 장소이고(욥 14,21) 하느님조차 더 이상 기억하시지 않는 곳(시편 88,6)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아무런 상벌도 없다고 여겼으니 이 세상에서 겪는 길흉화복을 그 자체로 하느님의 심판이라 믿었던 게지요.(전통적인 인과응보 사상) 그러나 구약 시대 말미에 이르러 사람들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의인의 불행과 빈곤, 악인의 행복과 풍요를 목도하며 전통적 인과응보의 원칙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고, 지혜문학, 특히 욥기와 코헬렛은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제시하려 했습니다. ‘의인의 고통 앞에서 하느님의 주권과 전적인 자유를 선언’하는 욥기나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일상 속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으라’는 코헬렛보다도 진일보한 신학적 성찰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 바로 지혜서인데요, 지혜서는 내세에 대한 희망, 곧 ‘의인의 영혼의 불멸과 영원한 상급’에 대해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의인의 부활과 사후의 보상’ 개념이 신약 시대만의 것이라 생각하시는데, 사실 이것은 구약 시대 말미에 이미 대두된 것이었습니다. 지혜서의 영혼불멸 사상은 인간을 영혼과 육신으로 구분하는 희랍 사상의 영향을 받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 근거하여 의인의 영원한 복락을 선포한다는 점에서(3,1-9; 8,13; 15,3) 그리스 철학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 악인들
지혜서는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다.”(1,13-14)면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셨다.”(2,23)고 단언합니다. 애당초 하느님은 인간의 죽음과 멸망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럼 도대체 죽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지혜서 저자는 죽음을 초래한 이는 바로 악인들 자신이며 악한 말과 행실로 스스로를 죽음에 맡겨버린 것이라 말합니다.(1,16; 2,21.24)
악인들은 쾌락과 방탕한 삶을 즐기고 의인을 박해하는 등 이 세상이 전부인 양 살아갑니다.(1,16-2,24) 그들은 “우리가 알기로 저승에서 돌아온 자는 없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몸, 뒷날 우리는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될 것이다.”(2,2)라며 하느님의 뜻이나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오늘날 역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세? 이 세상 살고 나면 다 끝이니 이것저것 따지지 말자.’ 하며 선하고 의로운 가치들을 폄하하고 조롱하며 애써 외면하는 이들이 여전히 우리 주위에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불사불멸의 영광을 누리는 의인들
반면 의인의 삶과 운명은 악인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3,1-5,23) 악인들의 그릇된 삶의 결과는 상실과 저주일 뿐이지만(3,10-12) 의인의 영혼은 불사불멸의 영광을 입고 주님과 함께 사랑 속에서 영원히 다스리며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3,1-9; 5,15-23)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3,1.4-5ㄱ.9ㄱ)
이러한 신학적 사고는 ‘의인이나 악인이나 죽고 나면 차별 없이 저승으로 내려간다.’고 믿었던 전통적인 내세관을 완전히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자식 없는 의인’(3,13-4,6)과 ‘의인의 요절’(4,7-19)에 관한 지혜서의 말씀으로 이는 전통적 개념에 따르면 그저 ‘하느님께서 주신 벌’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혜서는 자식이 없는 것이 제 죄 때문이 아니며 믿음과 덕이 있다면 특별한 은총을 받고 불사를 누릴 것이라 말합니다.(3,14-15; 4,1-2) 또 의인의 요절은 제 죄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 사랑을 받았고 일찌감치 생의 완성을 이루었기에 죄와 악으로부터 들어올림 받은 것이라 설명합니다.(4,7.10-14ㄱ)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가르침은 당연한 것이지만 구약의 백성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깨달음이었고, 의인의 고통과 멸망에 회의를 품고 절망하던 수많은 신앙인들에게 구원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여러분도 잠시 시간을 내어 의인의 운명에 대한 지혜서의 말씀들(3-5장)을 찬찬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고된 일상 속에서도 의로움을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나를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해 두신 불멸의 영광에 대한 약속에 분명 큰 위로와 힘을 얻으실 겁니다.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온다
지혜문학은 ‘영원한 생명이 오직 하느님의 지혜에서 온다’고 한결같이 가르칩니다.(잠언 9,10; 지혜 8,21)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 지혜를 가질 수 있을까요? 아, 질문 자체가 틀렸네요. 지혜서는 ‘내가 지혜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혜의 방문을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6,13)
지혜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7,21-30)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하느님의 벗이요, 말씀의 예언자로서의 삶은 제 힘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지혜로 가능한 일이라는 말이지요. ‘지혜의 표상’인 솔로몬 임금의 삶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여곡절 끝에 피의 숙청으로 임금이 되었고 파라오의 딸과의 혼종혼(混宗婚)과 산당 제사로 그 출발부터 어그러졌던 솔로몬이 그야말로 ‘후세에 길이 남을 지혜로운 임금’으로서의 삶을 힘차게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느님께 지혜를 간청했기 때문입니다.(1열왕 3장).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지 않는 이에게 그분의 지혜가 자리잡을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혜서는 경솔하고 부족했던 과거의 모습을 떨쳐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말하고 생각하는 지혜의 삶(지혜 7,15-16)으로 옮아가길 원하는 모든 이들을 ‘솔로몬의 기도’(9장)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하늘에서 지혜를 파견하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어좌에서 지혜를 보내시어, 그가 제 곁에서 고생을 함께 나누게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제가 깨닫게 해 주십시오.”(9,10)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지혜를 청하는 이에게 필요한 지혜를 반드시 주시는 분이십니다.
과거의 구원 역사의 재해석
지혜서는 창조부터 이집트 탈출 이후까지의 역사를 되짚어 기술하면서(10-19장) 이스라엘 구원의 역사를 이끌었던 주인공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내세웁니다. 아담에서 모세에 이르는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이 미드라쉬적 방법으로 설명되는 가운데, 구세사 안에서 ‘하느님의 지혜’의 역할과 그 중요성이 훨씬 더 명확해집니다.(10장) 특히 저자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지혜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스라엘)과 그렇지 못한 이들(이민족)의 삶이 맺는 결실이 얼마나 다른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의 방문을 받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지혜서의 저자처럼 자신의 과거를 성찰하면서 늘 나와 함께 계셨던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고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과거 하느님의 도우심에 감사할 줄 아는 이만이 현재에도 그분의 도우심을 희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의미가 신약에서 오롯이 드러나다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아, 상선벌악, 인과응보에 대한 이해가 시대별로 이렇게나 달랐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모세의 가르침(신명기) 이래, 구약 시대 대부분에 걸쳐 사람들은 이 원칙을 철저히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보상과 징벌’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다 구약 후반에 들어 상선벌악의 원칙은 ‘도전’을 받고(욥기, ‘왜 의인에게 고통이 주어지는가?’) ‘거부’를 당하는 듯 보이기도 하는데(코헬렛, ‘의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죽기는 매한가지이니 허무로다!’), 마침내 ‘내세의 영원한 보상’을 말하는 지혜서에 이르러서야 확고하게 자리를 잡습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상선벌악의 원칙에 ‘도전’하지도, 그것을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세상에서 복을 누릴지라도 죽음을 맞을 때 모든 것을 잃게 되지만 현세에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의인들은 내세에서 하느님 곁에서 평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게 된다.’는 믿음 안에서 비로소 상선벌악, 인과응보의 참 의미가 드러났기 때문이지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선포하실 하느님 나라를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토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구약의 시대를 마무리하시면서 신약의 시대를 열 준비를 하셨던 것이었지요.
긴 구약 시대 동안 다양하게 자리잡은 신학사상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눈에는 때로는 제각각인 듯, 때로는 인간의 부족한 지성 탓인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결국 하느님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지식을 알아들을 만큼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약의 모든 계시의 내용을 충만히 드러내 밝혀 주셨지요.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의 그 긴 세월 동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몸소 열어 보여주신 소중한 계시와 신앙의 유산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균형있게 읽으면서 ‘구세사 전체’를 통해 내게 말씀하고 계신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의 힘으로 언제나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교우 분들이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 그동안 ‘구약 성경 다시 읽기’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과 연재를 맡아주신 강수원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월간빛, 2019년 12월호,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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