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빌라도]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예수님]
두 재판의 최종 판결문을 묵상해 본다.
누구의 재판이 더 재판다운지는 각자의 뜻에 두련다.
빌라도 그는 예수님을 재판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를 재판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본시오 빌라도, 그를 재판한 그이도 재판했으리라.
그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예수님이 땅바닥에 손으로 무얼 쓰셨는지 모르듯이.
아래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 관한 저의 묵상글입니다.
원문은 간음하다 잡힌 이 여자가 ‘막달라 여자 마리아’임을 묵상한 내용입니다만
이곳에서는 단순히 예수님의 육하 원칙에 꼭 부합되는 세기의 판결문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는 내용만 옮겨 봅니다. 그저 참조만 하십시오. 좀 깁니다.
부담 줄이시고 읽으시기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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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이 날로 늘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오르셔서 성전에 계셨는데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분은 그날도 그들 앞에 앉아 가르치고 계셨는데,
갑자기 여러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현장에서 간통죄를 범한 여인을 끌고 와서는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예수님께 질문하였다.
현행범으로 군중 앞에 끌려 나온 그 간음한 여자를
여기 모인 군중이 유대의 율법대로 현장에서 돌로 쳐서 죽여야 할지,
아니면 용서하라고 할지, 자칭 메시아라고 하는 당신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이다.
쉬운 말로 왜 그걸 예수님께 질문하였는지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대에 알려진 많은 율법 학자가 판을 치고 있었던 상황임에도
굳이 설교하시는 예수님께 그 어려운 결단을 요구하는 군중 심리며,
예수님을 난처하게 만드는 꼬락서니 하고는 정말 율법 학자의 직무 유기이다.
좌우지간 예수님께서도 대단히 난처하신 모양이었다.
복음은 예수님이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시고 계셨다고 기술하고 있다.
몸을 굽혀 땅바닥에 무엇을 쓰셨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예수님이 직접 기록하여 남긴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만, 복음의 이 부분에서 그분께서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셨다고 기록은 되어있지만 무엇을 쓰셨는지의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여하튼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의 자신에 대한 올가미 작전과
고발의 구실을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난감하셨던 모양이었다. 그들이 하도 재촉하기에 예수님께서 희대의 명답을 하셨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이 육하원칙에 들어맞은 명답을 하시고는,
계속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셨다고 복음은 기록하고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돌을 던지되 죽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죽지 않을 만큼 던지라는 것도 아니다.
죽이라는 말씀은 분명히 없었다.
‘돌로 쳐 죽일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첫 반응이다.
돌로 쳐라.
그것도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죄가 거의 없는 사람부터가 아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던지라고만 하셨다.
죄 없는 사람이 예수님 말고 그곳에 과연 단 한명이라도 존재하였겠는가?
사실 죄는 우리 인간에게는 어쩜 필수의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에 따라서 죄는 쌓이고 죄의 내용은 커져만 갈 것이다.
그것이 우리네 삶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쓰셨다는데 과연 무엇을 쓰셨을까?
도둑놈,
거짓말 한 사람,
사기꾼,
불효한 사람,
노름꾼,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
계명을 어긴 사람 등등.
좌우지간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쓰시고 계셨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 버리고,
예수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그 여자만이 남았다.
나이 많은 사람부터라면, 나이에 따라 죄가 커지거나 많아지기 때문일까?
나이 든 사람이 요령이 많아, 남아 있다가는 별로 볼일이 없을 것으로 여겨져,
아니면, 땅바닥에 적힌 자기 것에 해당하는 죄명을 보고는
죄책감에 쌓여 서둘러 줄행랑치듯 그곳을 떠나갔을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이 말씀에 그 자리에는 예수님과 간음한 여자만이 남고, 죄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토록 벌주기를 원했고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고 했던 그 죄 많은 군중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순수 그 자체이신 예수님이 보는 앞에서
감히 죄로 얼룩진 그들이 몸 둘 바를 알았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났고 두 사람만 멍하니 남았다.
벌주기를 좋아하고 예수님께 대한 올가미 작전과 고발의 구실을 만들려는
죄 많은 군중은 떠나갔고 간음한 여자와 주님만이 그곳에 계셨다.
이 상황에서 누가 먼저 이 적막을 깨뜨려야 했겠는가?
“너의 죄를 묻던 그들은 다 어디 가고 아무도 없느냐?”라고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주님, 아무도 없습니다.”라며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보시다시피 저 죄 많은 놈,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등등,
그 간음한 여자는 아무런 변명도 없이 그저 ‘주님’이라 대답하였다.
주님은 구세주를 의미한다.
어떻게 죄인이 죄인을 벌할 수 있을까?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하나하나 떠나는 동안,
그 여자는 분명히 들리지 않는 큰 소리로 외쳤을 것이다.
‘주님, 죄 많은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다시는 죄짓지 않겠습니다.’하고, 거듭거듭 뉘우치는 회개를 하였을 것이다.
복음의 주된 의미는 예수님과 하느님 나라의 인정이다.
이것은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용서를 비는 이 회개의 시간에
그 많은 죄인은 나이순으로 떠나가고,
죄의 용서를 비는 간음한 여자와 원죄조차 없으신 주님만이 남았다.
주님과 주님이라 부른 여자와의 관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주님을 주님이라 인정하지 않은 자와
주님을 주님이라 인정하고 있는 이 간음한 여자를, 주님은 어떻게 차별하여 대하실까? 죄를 빌어야 할 죄인들은 줄행랑쳤고,
진정으로 뉘우치면서 주님을 인정하는 이 여자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그토록 수많은 죄인이 묻고자 하였던 너의 죄를 말이다.
죄를 묻지 않아도 잘못을 충분히 뉘우친 여자에게
죄를 묻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리고는,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라고 당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보통의 사람에게 언제나 너의 죄는 용서 받았다고 하셨지,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하신 적은 없는 것 같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
이 말은 이 간음한 여자에게는 두고두고 뼈에 사무치는 말씀일 것이다.
돌팔매질의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고
진정으로 용서하시는 주님의 이 말씀에, 과연 누가 그를 잊을 수 있겠는가?
아니 또 죄를 지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주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품은 이 여자야말로 진정으로 복 받은 여자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 수난의 그늘에서 언제나 함께 하고,
예수님의 그 크신 고통을 언제나 마음 아프게 지켜보았다고 여겨진다.
지금까지도 이 여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문제는 이 시각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수없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 여인과 다름없는 현행범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시각에도 우리에게 말한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당신을 수없이 십자가 처형으로 고발하는 우리를
그분은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죄인인 우리는 예수님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부활의 삶을 누려야 한다.
예수님 부활을 느끼면서 우리의 부활을 믿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는
그분 말씀을 새기면서 용서와 이웃 사랑에 충실하면 된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라는 그분 말씀을 늘 묵상하면서,
사랑과 용서의 자세로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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