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이해에 ‘왜’라는 게 꼭 필요한가?
부분적으로는 필요하지만 때론 무의미하기도 할 게다.
왜냐면 여러 경우가 있으니까?
그 여러 개를 꼭 하나로 정의하려하면 곤란한 경우가 쾌나 된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왜’라는 질문은 최대한 자제해야 하리라.
일단은 믿고 보면 그 ‘왜’라는 게 갑자기 깜쪽 같이 없어지더라.
최소한 저의 경우엔 그렇다는 거니 오해는 말아 달라.
예를 들자.
창세기의 하루가 지금의 하루와 시각의 간격이 같다면 그게 가능이나 할까?
난 말한다. 같다. 그게 신비이니까? 그 신비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혹자는 그 시간 간격이 다르다고 하더라.
아니 성경 어디에 창세기의 천지창조 그 6일간의 시각과
지금 아폴로로 달나라 가는 시각의 간격이 다르다는 게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이 성경 어디에 정확하게 있다고 답을 할 수가 있을까?
이건 간단한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나는 성경의 이해해 관한 핵심인 두 가지에 대해서 거듭 요청하고자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다 성경에 기록했다고는 믿어서는 결코 안 된다.
두 번째는 성경의 이해는 ‘그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자.
일단은 ‘믿고 보면’ 그 ‘믿음’이 확실한 믿음으로 고정될 게다.
꼭 정답을 만들라고 애를 태우지 말라. 다 때가 오면 알게 될 게다. 그때가 오면.
사실 우리가 무턱대고 믿는 게 얼마나 많을까?
셀 수도 없을 것이다. 정말 모래알보다도 더 많을 것이다.
그러기에 따지면서 믿으려하는 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아브람이 파라오에게 거짓말을 했느냐, 부정직한 행동을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사악한테 사기를 친 거냐, 이사악이 알고도 속아 준 건가?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느냐? 예수님이 유다를 이용했느냐?
이 모든 게 과연 중요한 이슈일까?
제발 그 때가 오면 이해될 걸 ‘나만이 정답을 만들 수 있다.’라는 그 지저분한 속단은
제발 이 사순의 시기에 불태워 버려라. 부탁한다.
묻고 답하기에서 제가 혼자 묻고 답한 것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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