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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신약 성경 다시 읽기: 우리는 무엇에 간절한가 - 테살로니카 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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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2-10 조회수8,039 추천수1

[신약 성경 다시 읽기] 우리는 무엇에 간절한가 - 테살로니카 일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건 설레는 일이다. 얼마 전부터 겨울 방학이다. 방학을 기다리는 건 학생뿐 아니라 가르치는 이들에게도 설레는 일이다. 설레는만큼 방학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간은 꽤나 지루하고 더디기 마련이다. 학기 중에는 그렇게 금방 지나간 시간이 12월에 들어오면서 너무 느리지 않는가! 얼른 오라는 방학의 그날은 그렇게도 가르치는 이의 마음을 애태우고 또 애태웠다.

 

신약 성경 역시 그 시작은 기다리는 일이었으되 꽤나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짚어낸다. 이 땅 위에 한 인간으로 사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철석같이 믿는 것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설레는 일이였다. 이 믿음을 위해 사도 바오로는 줄곧 떠났고, 떠나서 만났고, 만나서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을 선포했다. 그럼에도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힘들었다. 빨리 오셔서 힘겨운 현실의 문제를 모조리 해결하셔야 할 텐데, 빨리 오셔서 그리스도인이 믿는 것이 진리이며 예수님처럼 영원히 살아 숨 쉴 수 있는 행복을 누려야 할 텐데 예수님은 곧장 오지 않으셨다. 기다리다 지치고, 기다리다 아프고, 기다리다 또 다시 기다리는 시간을 감내해야 했던 이들의 기록이 신약 성경이다. 어쩌면 신약 성경은 기다리는 ‘그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기다리는 이들’이 담아내는 설레지만 아픈 삶의 기록이 아닐까? 기다리던 이들은 저마다 다른 문화와 종교, 사상에 익숙했고, 로마 제국의 변방에서 살았던 인간 예수와 그 예수가 배우고 느끼고 체험했던 일상의 소소함에는 무지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데 필요했던 건, 예수가 누구냐의 문제에 앞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다양한 공동체와 그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가 먼저였다.

 

신약 성경의 첫 권은 테살로니카 일서다. 대부분 신자들에게 신약 성경 첫 번째 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마태오 복음서라고 한다. 지금 우리 눈에 펼쳐진 신약 성경은 시대순으로 엮여진 게 아니다. 예수님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복음서들부터, 복음 선포 역시 중요하니 복음서 다음이 사도 바오로 서간들로 이어진다. 복음이 전해진 교회 공동체의 삶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가톨릭 서간이 뒤를 잇고, 마지막으로 교회 공동체들의 갈등과 다툼, 로마 제국 안에서의 흔들림 없는 인내와 신앙을 요구하는 요한계 문헌이 신약 성경의 끝을 장식한다.

 

그러나 저술 시기로 보면 테살로니카 일서가 가장 먼저 쓰여졌다. 신약 성경의 첫 권인 테살로니카 일서는 두 편의 코린토서와 갈라티아서, 그리고 필리피서와 로마서, 필레몬서와 더불어 사도 바오로가 직접 쓴 편지로 여겨진다. 사도 바오로가 쓴 편지들은 예수가 누구냐에 앞서 예수를 따르기 위해 걸림돌이 되는 공동체의 문제들에 집중한다. 바오로의 편지는 신학적 가르침의 글이 아니라 사목적 충고와 격려의 성격이 강하고, 바오로의 편지를 읽는다는 건 지금 우리 공동체에 대한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테살로니카 일서는 바오로가 코린토에 머물 때 작성한 편지(1테살 3,6-10)로 50-51년 경에 쓰여졌는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 겨우 20여 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테살로니카 교회는 바오로가 실바누스와 티모테오와 함께 세운 공동체(사도 17,1-9)로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모여든 곳이었다.(1테살 1,9) 다양한 문화와 사상을 지닌 사람들이 더불어 한데 모이다 보면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서로 부딪히다 보면 서로의 탓을 들먹이며 갈라지기 일쑤다. 그럼에도 테살로니카 교회는 달랐다. 다른 서간들과 달리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일서를 시작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말을 길게 쏟아낸다.(1테살 1,2-10) 그 감사는 유다의 교회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말씀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살아내는 테살로니카 교회를 향한 사도 바오로의 애정과 맞닿아 있다.(1테살 2,13-16) 테살로니카 일서는 사도 바오로의 주요한 신학 주제들, 곧 의화, 율법, 죄, 죽음, 새로운 인간 등등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신학을 개진하기 앞서, 정갈한 믿음의 개념들을 나열하기에 앞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애정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애정 어린 삶은 흔히 말하는 공감이나 소통의 실천만이 아니다. 사도 바오로는 어머니처럼 자녀를 위해 스스로를 내어 바치는 애정을 말하고 있다.(1테살 2,8) ‘어머니’… 그 한마디로 우리의 뇌리에 가득 차는 것이 무엇인가? 눈가가 촉촉해질 만큼 희생과 아픔을 겪어낸 가련한 여인으로 ‘어머니’를 떠올린다면 우린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어머니’를 곡해하고 만다. 1테살 2,8은 ‘어머니’를 ‘아이’에 비유한다.(우리말 번역은 ‘아이’를 ‘온화한’으로 번역하고 있다.) 한 여인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문화에 종속된 가련한 여인이 아니라 스스로 겸손되이 자신을 비워낼 수 있는 ‘작은 아이’로서의 어머니를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애정’을 드러내는 형상으로 제시한다. 요컨대 어머니’는 서로를 담아내기 위한 ‘빈자리’다. 나 혼자만 중요하다는 애착에서 서로를 향한 애정에로의 해방이다.

 

믿음은 딴 게 아니다. 믿음은 서로 부족하고, 서로 탓하면서도 어쨌든 함께 살고자 하는 결기다. 테살로니카 일서는 이러한 결기를 ‘거룩함’이란 단어로 대체한다.(1테살 4,1-8) 거룩함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내어놓는 ‘애정’과 유사한 믿음의 특유한 무늬다. 거룩하게 사는 건 비교 우위의 차별화된 삶을 그려나가는 것이나 남부럽지 않은 신앙의 그럴듯한 모델을 선정하고 그 모델을 닮아가는 게 아니다. 함께 살을 맞대고 사는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이웃과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일이다. 흔히 사랑하며 살자 말한다. 사랑은 제 진심을 다른 이에게 드러내는 게 아니라 다른 이의 처지를 꼼꼼히 눈여겨 살필 줄 아는 ‘자기로부터의 해방’이다. 사랑은 ‘서로에게 좋고 또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을 추구하는 일’(1테살 5,15)이지 제 자신의 욕망(긍정적이든 선한 것이든)을 타자에게 투사시키는 철부지의 응석이 아니다.

 

분명한 건 거룩한 삶은 공동체적이라는 사실이다. 공동체로서의 거룩한 삶을 개인 수련의 도구로 전락시킨 건 오로지 현대인의 종교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본디 종교는 공동체적이다. 테살로니카 일서가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건 예수님을 기다리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고(1테살 1,10;2,19;4,16), 시급한 만큼 함께 사는 이들과 애정을 나누고 형제로서 서로를 위해 내어놓는 일이 다급했기 때문이다.(1테살 5,13) 그리고 거기에는 모든 희망이 무너져 내린듯 사라져간 죽은 이들조차 예외일 수 없었다. 예수님 안에 모두는 살아있고 모두는 서로를 향해 격려하고 위로해야 할 숙제와 권리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겐 무엇보다 중요했다.(1테살 4,13-18)

 

사는 게 전투고, 굳이 다른 이와의 경쟁에서 이겨야 행복과 성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여기는 오늘날, 함께 사는 것이 낯설고 불편한 우리의 민낯을 테살로니카 일서와 함께 포개본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이웃을 밀쳐낸 위선을 거룩한 삶으로 바꾸는 유일한 길은 언제나 기뻐하고, 언제나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다.(1테살 5,16) 내일의 욕망에 집착하면 가진 게 부족하다며 언제나 슬퍼하고, 되뇌이며 복을 비는 걸 기도라 여기며,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불평만 늘어놓기 마련이다. 함께 살면 저절로 기쁘고 즐겁고 감사할 것이다. 함께 사는 은총이 신앙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 이웃은 우리의 간절한 바람이 된다.

 

[월간빛, 2020년 2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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