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주제는 영성입니다. 영성(spiriruality)은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의 활동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성서는 역사적 사실, 설화, 우화, 비유, 상징 등을 통해 성령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는 모습을 알려줍니다. 하나의 이야기에 이런 여러가지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성서에 있어 역사적 사실성(factuality)은 부차적인 요소가 됩니다. 성서를 이해하는 방법은 단 하나, 스스로 영적 사건을 일으켜서 성령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가장 쉽고 단순한 행위입니다. 당연히 어려운 지식도 필요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시도하겠습니다. 물론 저의 답이 꼭 옳다고는 할 수 없으니 비판적으로 수용하시기 바랍니다.
1. 사람이 하느님께 드리는 최상의 예물은 자기 자신입니다. 기도는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행위입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기도를 반기시는지 반기지 않으시는지는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반기시지 않는다면 자신을 돌아보고 온전한 기도를 드려야만 합니다. 온전한 기도란 자아를 포기하는 ''내적'' 활동을 가리킵니다. 즉, 밖의 현실에 불만을 품는 대신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내적 평화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불만을 품은 사람은 반드시 형제에게 적의를 품고 미움, 도둑질, 살인 등의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카인과 아벨이 형제이듯이 온 인류는 하느님께서 낳으신 형제입니다.) 카인은 곡식, 아벨은 동물을 바치는데 물론 유목민이 농경민보다 우월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농경민은 이 세상에 집착하는 육적 자아, 유목민은 스스로 이 세상의 나그네임을 인정하는 영적 자아를 상징적으로 암시합니다.
2. 인간적인 기준에서 야곱의 행위는 대체로 비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끈질기게 하느님을 향하는 내적 인간이라는 사실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야곱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찾아 어떤 여정을 걷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3.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평등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종과 주인으로 나누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인간 사회에는 늘 계급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 형태만 달라질뿐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계급이 생기는 원인은 욕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욕망을 억누르지 않으시며 따라서 억지로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시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에 사람들이 성령을 통하여 스스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 자신이 주인이든 노예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주인이라면 노예를 형제로 대할 것이며 그가 노예라면 정성을 다해 주인을 섬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회적 정의를 원하시지만 그 목적과 방법이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4. 성전의 구조와 각종 예배는 사람의 내적 구조와 영적 활동을 가시적으로 드러냅니다. 자세한 것은 연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을 모세 등의 예언자들에게 알려주셨을 수도 있겠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겪은 영적 친교의 경험이 융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5. 이스라엘은 영적 인간들의 공동체(하늘나라), 이집트는 육적 인간들의 공동체(세상의 왕국)를 상징합니다. 출애굽 사건 자체는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구체적 내용들이 모두 역사적 사실은 결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집트 안의 맏배들을 모두 죽이셨다는 기사는 육적 인간은 세상을 상속받지 못한다는 영적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상의 왕국이란 정치적인 국가를 포함하여 감성적 애착, 이해타산, 이념 등으로 얽힌 각종 집단들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구약과 신약을 꿰뚫고 있는 주제는 하늘나라입니다.
성서를 처음 읽으신다니 저도 처음 성서를 접할 때의 설레던 마음으로 돌아오는 듯합니다. 의문나시는 것은 대충 얼버무리지 마시고 꼭 해결하십니오. 다른 사람의 권위에 의존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사람을 반드시 이끌어주십니다.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