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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신약 성경 다시 읽기: 비움의 자유 - 필리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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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4-03 조회수7,525 추천수0

[신약 성경 다시 읽기] 비움의 자유 - 필리피서

 

 

교회 잡지에 ‘처음’으로 원고를 투고 할 때, 참 설레었습니다. 하고픈 말이 많아서 설레었고, 제 글을 읽어 줄 이름 모를 독자들과의 만남이 설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생각이 짧아도 어찌 그리 짧을까,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입니다. 글이란 게 참 무섭구나, 싶은 생각을 가지는 데 그리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습니다. ‘처음’의 설렘은 설익은 제 생각을 마구마구 내던지는 철부지의 응석이었던 것이지요.

 

필리피 교회는 사도 바오로가 처음 설립한 교회입니다.(사도 16,11이하 참조) 옷감장수 리디아 덕택에 필리피에 머물며(49~50년)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바오로에게 필리피 교회는 그야말로 사랑 자체였습니다.(필리 1,8) 거친 삶을 제 힘으로 챙겨나갔던 바오로임에도 필리피 교회의 물적 도움은 마다하지 않았으니까요.(필리 4,15-16;2 코린11,9) 처음 만든 공동체라 애정이 얼마나 컸을까요. 큰 애정만큼 하고픈 말도, 만들어 가고픈 계획도 차고 넘쳤을 테지요.

 

그런데 바오로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필리 1,13.20-24) 아마도 56~57년경 에페소였던 것 같습니다.(2코린 11,23) 사도 바오로의 편지들 중에 이른바 ‘옥중편지’로 분류되는 편지가 몇 개 있는데 필리피서, 콜로사이서, 에페소서, 그리고 필레몬서가 그것이지요. 옥에 갇히는 형벌

 

이 당시엔 존재했는지, 그리고 실제 바오로가 감옥에 갇혔는지를 두고 설왕설래가 있습니다만,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 감옥은 그 사전적 의미를 벗겨내보면 꽤나 무겁고 깊은 신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에게 닥친 일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필리 1,12) 사도에게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이 복음선포였습니다. 복음 선포의 주된 내용은 물론 부활한 예수님이십니다. 부활한 분을 선포하는 것과 감옥에 갇힌 바오로의 처지가 공명(共鳴)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오로는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겪는 것을 특권이라고 말합니다.(필리 1,29) 한걸음 더 나아가 고난의 자리를 믿는 이들과 함께 나누는 은총의 자리라고까지 단언합니다. “내가 갇혀 있을 때나, 복음을 수호하고 확증할 때나 여러분은 모두 나와 함께 은총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필리 1,7) 그래서인지 바오로는 자신이 살아온 육적인 삶의 흔적을 모두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4-11) ‘쓰레기’로 번역된 그리스말 ‘스쿠발론’은 ‘더 이상 가치없는 것’이나 ‘원치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흠잡을 데 없었던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면 족했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오로는 제 삶에서 가치있는 것,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한 분이면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감옥이라는 공간은 제한이나 억압의 공간이 아니라 고난을 은총과 특권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전이(轉移)’를 연습하는 자리가 됩니다. 그렇지요, ‘삶의 전이’ 때문에 누군가는 복음을 선포하고 또 누군가는 그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수많은 신앙인이 그리스도를 닮고자 제 삶에서 그리스도의 삶에로 움직였고,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감옥은 자신으로부터 해방하는 자유의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처음’의 설렘에 중독되면 ‘전이’의 삶을 위한 긴장감은 헐거워집니다. 제 진정성에 허덕이다가 증거해야 할 그리스도는 잊은 채 제 존재감을 증명하는 데 바빠집니다. 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과해서 상대에 대한 가벼운 판단들을 엄준한 정의의 심판으로 둔갑시키기도 하지요. 사도 바오로는 그런 복음 선포를 이렇게 비판합니다. “사실 어떤 이들은 시기심과 경쟁심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지만, 어떤 이들은 선의로 그 일을 합니다. … 다른 이들은 이기심이라는 불순한 동기로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필리 1,15.17)

 

이기심에 짓눌려 잘못된 길을 가르치는 이들을 바오로는 ‘개’에 비유합니다.(필리 3,2-3) 구약에서 ‘개’는 ‘남창’(신명 23,18)이나 악한 백성(시편 22,16.20)에 빗대어 사용되었습니다. 경쟁과 이기심에 저당잡혀 다른 민족과 문화, 그리고 다른 삶에 폐쇄적이었던 유다의 습속을 이어받는 이들에게 바오로는 분노합니다. 바리사이로 엘리트 교육까지 받은 바오로가 제 문화와 종교에 대해 ‘개’라고 언급하는 대목에서 저는 숨이 멎습니다. 삶이 고단하거나 복음을 실천하는 데 지칠수록 누군가 ‘잘 사는 법’ 하나라도 분명히 일러주면 좋을 텐데, 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지요. 그러나 비우는 데 낯설어 채우는 데 급급해지면 ‘다다익선’식의 신앙 실천에 마음이 빼앗깁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그러다 지치고 또 허하니 다시 채우려하고… ‘개’의 습성이 그러합니다. 필리피 교회에서는 에우오디아와 신디케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바오로는 분명히 경고합니다.(필리 4,2-3)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에 휘둘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비움의 정신에 걸맞지 않다고, ‘비움’의 정신은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공동체적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말입니다.(필리 2,2-4)

 

성경을 공부하다보면 이기적 경쟁에 매몰될 때가 많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일입니다. 사회적 약자와 살았고 시대의 주류와는 거리를 두고, 그 거리 때문에 십자가의 수난을 겪으신 예수님을 두고 제대로 알기 위해 학문적 주류의 자리를 탐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다고 성경을 함부로 읽거나 해석해서는 안되지요. 다만 제대로 된 읽기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은 열려있고 자유로워야 합니다. 성경의 문구나 구조에 저당잡혀 글 너머에 살아 꿈틀거리는 삶의 ‘전이’를 읽어내지 못하는 어눌한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이들의 삶과 함께 호흡하지 않는 복음 공부와 선포는 제 이기심과 욕망, 그리고 체면을 위한 노리개로 타락한다는 사실은 매번 글을 쓰면서 익히는 저의 반성이자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다시 다짐해 봅니다. ‘처음’의 설익은 예민함을 식혀 줄 진득하고 의연한 일상을 그려 나갔으면 합니다. 그 일상에 예수님은 또 다시 ‘비움’의 자유를 우리에게 일러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신앙의 힘은 바삐 움직이는 세상에 느린 반응을 보이는 절제에서 시작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절제가 신앙적 삶을 품위있게 가꾸어 나간다는 사실이 꽤나 무겁게 다가옵니다.

 

* 사족 : 코로나19로 많이 힘듭니다. 힘들수록 일희일비하는 호들갑보다는 진득이 기다려주고 응원하고 위로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에겐 더 값진 비움의 삶이 아닐까 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4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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