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 당신은 왜 성당에 다니십니까? <하>
우리는 왜 성당에 나가는가? 우리는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실이기에 한 번도 자문해보지 않은 물음이다.
많은 이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과연 신앙생활의 목적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서울대교구 조규만 주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시사하는 바를 잘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말하는 마음의 평화는 주님의 평화가 아닌, 마음이 평안하고 가족이 안녕한 상태의 세속적 평화"라고 말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구원의 개념이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자손이 번성하고 가축을 먹일 땅을 얻고, 질병 없이 백수를 누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수님에 의해 재현되는 구원은 이러한 현세적, 물질적 차원을 넘어 하느님 나라에 미치는 평화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한 번도 눈으로 본 적이 없는 사랑과 평화의 나라''의 상태인 것이다."
조 주교는 "사람들이 현세적 차원의 평화에 머무르는 것은 예수님이 주시려는 구원과 행복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 원인이 있다"며 "이러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사제들의 예언자적 사명이자 교회가 빛이 되는 길"이라고 말했다. 또 "신자들은 매일 마음을 비우고 기도함으로써 성찰하는 시간을 가진다면, 진정한 평화에 다가서는 길을 하느님께서 일깨워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조 주교는 또 "이러한 평화는 나 중심으로 생각하거나 내 것을 움켜쥐려고 하면 절대 찾을 수 없다"며 "예수님이 가르치신 자선과 절제, 단식 등 어려운 이웃을 위해 베풂으로써 나ㆍ이웃ㆍ하느님의 삼중 관계를 잘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부원장 박문수(프란치스코) 박사는 이러한 관계 성립에 길잡이가 되는 것이 ''사회교리''라고 말했다. 사회교리가 복음적 가치를 삶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많은 신자가 주일이면 성당에 나와 하느님 아들ㆍ딸로 살지만, 미사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듯 세상의 법에 따라 산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교회 안팎의 삶이 같아지려면 이미 우리 안에 내재돼 있는 물질주의적 태도나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복음화해야 한다. 복음적 가치를 사회적으로 표현한 사회교리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인천가톨릭대 교수 송용민(강화본당 주임) 신부도 "이웃과 함께 하느님 사랑을 나눌 때 비로소 참된 하느님의 평화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죽음 등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현실을 외면하고 내세만을 고집하거나, 현실적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미성숙한 태도"라고 지적했다.
또 "하느님의 내재적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삶을 긍정하며, 이웃들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사랑을 서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복음적 사랑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 특유의 종교심성에서 비롯됐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평화만을 찾는 신앙은 왜곡된 신심과 편견을 만들어내기 쉽다"며 "교회는 이러한 신심을 성숙시키고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토착화시키는 지속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하느님 뜻에 맞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고된 일이다. 더 많은 희생과 고독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하느님 평화에 동참하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성화하는 ''가시밭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은아 기자 euna@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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