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쟁기잡고 뒤돌아보면 어찌되게?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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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3-06-22 | 조회수735 | 추천수1 | 신고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어떤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때에 예수님의 대답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냥 단순하게 그래라, 말아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이 말씀을 하시고 계실까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 그런데 다음 장면은 더 이상합니다. 정작 당신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는 그래라, 말아라, 라는 말씀을 주시지 않으셨으면서 왜 다른 사람에게는 "나를 따르라."고 요청하시는가? 이것이 더 궁금했습니다. 정작 따르겠다는 사람에게는 "여우도 굴이 있고 ...." 그러시면서 왜 다른 사람에게는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시고 계실까? 제가 묵상해본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셈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라고 어느날 느꼈습니다. 어느 것이 남는 장사인가? 따져 보는 것을 즐겨 하시고 우리도 그렇게 하길 원하신다고 어느날 느끼게 되었습니다. 바로 루카 14,25 버림과 따름을 통해서입니다.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하시면서 당신을 따름에 있어서 어느 것을 먼저 선택하는 것이 남는 장사인지 따져 보면 알지 않겠느냐고 스스로 자유의지로 선택하시길 요청하시고 계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9장에서 보여주는 제자들의 영적인 수준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영적인 수준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컸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아직 예수님의 수난을 통한 구원 여정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라고 보여집니다. 바로 앞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하는 말을 통해 그렇게 보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 들이지 않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른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무엇을 보고 따르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하였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고 합니다. 어떤 말로 꾸짖으셨을까요? 왜 꾸짖으셨을까요? 그동안 배운바로는 예수님의 구원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기적과 힘과 뭐 이런 것으로 일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따르던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진정 나를 따르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정확하게 보라고 요청하시는 말씀이 바로 "여우도 굴이 있고 ..." 이 말씀이며, 이래도 나를 따르겠느냐? 하고 생각해 보길 요청하시는 것으로 저는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진정 나를 따르는 목적이 무엇이냐?" 이것을 올바로 보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정작 따르겠다고 하던 사람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따르겠다고 하였는가? 그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그래도 따르겠다고 하지 않자 다른 사람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 하고 부르시는데 여기서 그가 하는 말을 묵상해 보면 얼마나 그 핑게를 그럴듯하게 거절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 "여우도 굴이 있고..." 를 듣고 보니 자신이 생각하고 따랐던 것과 완전 달랐습니다. 그래서 따르기를 거절하려고 하는데 그냥 그 자리에서 싫다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핑게를 대는데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사람은 아직 그가 예수님을 따라 나서기 전에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계신 상태가 아니라 이미 예수님을 따라 나섰고 지금까지 잘 따라다니던 사람이 예수님의 "여우도 굴이 있고..." 이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보고 따져 보고 이제 집으로 가야하는 구실을 말하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 사람의 아버지가 방금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러 가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보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자신이 기대했던 예수님이 아니기에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장례를 치르겠노라고 하며 예수님을 따를 것을 거절하는 것으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라고 죽은 이들의 장사보다 더 우선 적인 일이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는 일이라고 그 일을 하라고 요청하시는 말씀으로 묵상해 봅니다. 여기서 죽은 이가 영적으로 죽은이라고 할 때에 이 사람이 예수님의 요청대로 따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죽은 이가 죽을까요? 살아날 가능성이 있을까요? 그가 이 사람이 전하는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고 그 나라를 받아 들인다면 말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에서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상황은 앞의 사람은 따르지 않겠다는 의미로 이 사람이 이해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사람은 따르긴 따르겠는데 먼저 해야 할 일을 먼저 하고 따르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이상한 것은 그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사 하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가족을 떠났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떠날 때에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이 사람은 주님을 따르긴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상태임을 감안하면 이 사람은 이미 쟁기는 손에 잡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닐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제가 시골에서 농사짓는 모습을 많이 봐서 아는데 쟁기로 밭을 갈 때에는 어떻게 하는가? 앞, 곧 자신이 밭을 갈고자 하는 앞만 보고 가야지 뒤를 돌아보면 자신도 엎어지고 쟁기도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미 당신을 따르겠다고 따라 나섰으면 당신만 바라보고, 곧 하느님의 나라만 바라보고 가야지 이미 떠나온 곳, 세속적인 곳을 바라보고 뒤돌아 가려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시는 말씀으로 묵상해 봅니다. 여기까지 묵상해 보니 성경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고 광야 생활로 어찌나 힘들었는지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 "온 공동체가 소리 높여 아우성쳤다.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다.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와 아론에게 투덜거렸다. 온 공동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아니면 이 광야에서라도 죽어 버렸으면! 주님께서는 어쩌자고 우리를 이 땅으로 데려오셔서, 우리는 칼에 맞아 쓰러지고, 우리 아내와 어린 것들은 노획물이 되게 하는가?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않겠나?' 그러면서 서로 우두머리를 하나 세워 이집트로 돌아가자.' 하고 말하였다. ...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푼네의 아들 칼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가로지르며 정찰한 저 땅은 정말 무척이나 좋은 땅입니다. 우리가 주님 마음에 들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저 땅으로 데려가셔서 그곳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민수 14,1-9 참조)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겠지만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사 청하는 사람에게 이미 따르려고 나섰으니(출애굽을 했으니), 광야 생활(여우도 굴이 있고...)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 광야 생활 너머에 당신이 약속하신 나라, 하느님의 나라를 봐야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대로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시는 말씀으로 묵상을 마무리 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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