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님 때문에 누리는 평화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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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3-06-23 | 조회수545 | 추천수1 | 신고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평화를 살아보지 못하고 누려보지 못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처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개신교에 다니는 분이 들어보라고 테이프를 하나 선물을 해 주었습니다. 그 테이프에서 들은 내용인데 지금까지 제 가슴에 살아서 움직이는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아버지와 아들이 놀이 공원에 놀러 갔습니다. 하루 종일 아주 재미있고 즐겁게 놀았습니다. 맛있는 점심도 먹고, 놀이기구도 타고 무지 무지 재미나게 놀았습니다. 그렇게 놀다가 어쩌다가 아이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너무 노는데 정신을 팔다가 그만 아버지가 계신 곳에서 너무 멀리 갔던 모양입니다. 아버지도 아들이 없어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서로 찾아 헤메이게 되었습니다. 온 놀이공원을 뛰어다니며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간절하게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주 커다란 개 한마리가 아이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가 안 보여 무서워서 엉엉 울고 있는데 그것도 시커먼 큰 개가 아이 앞에 턱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까무라칠 지경이 아니겠는지요? 아이는 어쩌지도 못하고 무서워떨며 울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아이 앞에 탁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탁 잡아 주었습니다. 이때 아이가 누리는 평화를 아시겠는지요? 아버지가 나타나셔서 아이의 손을 잡아 주었을 때에 아이는 어떤 마음이겠는지요? "아, 난 이제 살았다. 이제 아버지가 오셨으니 아버지께서 지켜 주실 것이니 난 살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타나셨지만 여전히 아이 앞에는 시커먼 큰 개가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 세상에서 이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놀이공원에 놀러 온 듯 참 재미있게 살고 있지 않는지요? 그러나 시커멓고 큰 개(환난과 고통)를 만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이와 같이 아버지의 손을 잡으면 누리는 평화를 우리도 누려야 하는데 실제 신앙생활에서 이 평화를 누리고 살고 있습니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살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 시커멓고 큰 개가 나타나면 두려움에 떨며 고통스러워하며 살고 있지는 않으시는지요?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또 다른 예화입니다. 어느 할머니가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평화버스에 타셨습니다. 그 버스는 누구나 공짜로 타는 버스였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그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평화버스 기사가 물었습니다. "할머니, 무거우신데 머리에 이고 있는 짐은 내려 놓으시지요." 그러자 할머니 하시는 말씀입니다. "버스도 공짜로 탔는데 미안해서...!" 우리들이 이렇게 살고 있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 공짜 평화버스에 탔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무겁게 이고 지고 있던 짐을 내려 놓고 쉬어도 좋으련만... 예수님의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또한 복음에서 누리는 평화란 예수님 때문에 누리는 평화입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는 해야하는 자유의지와 해서는 안 되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 나는 어떤 일을 하기가 싫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 때문에 사는 것이 평화입니다. 참행복 행복하여라, 예수님 때문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예수님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예수님 때문에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예수님 때문에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예수님 때문에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예수님 때문에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예수님 때문에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예수님 때문에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예수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은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어떻게 보면 평화와 안식과 사랑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결국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첫 인사로 빌어준 바로 그 "샬롬!"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요한 20,19)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도 우리에게 참평화를 주시려고 오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는 거짓 행복과 참 행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도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 행복이고 참 평화일 수 있겠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다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지만 맘대로 다 한다고 해서 다 행복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하고 싶지만 예수님 때문에 하지 않아야 하는 자유도 있고 하기 싫지만 예수님 때문에 해야 하는 자유 의지를 살 때에만이 참 행복과 참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배우고(기도) 배운 것을 내 삶 안에서 살아내는 가운데 누리는 평화가 복음서(예수님)의 참평화입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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