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른 여덟 해의 병고 / 그는 무엇을 희망했나?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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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3-06-28 | 조회수490 | 추천수1 | 신고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요한 복음 5장/ 베자타 못가의 병자, 그는 서른 여덟 해나 누구를 기다렸나... 가장 먼저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으면서 베자타 못가에서 치유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 병자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병자였습니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아마 세상에 태어나 가장 힘든 고통이 뭐냐고 묻는다면? 물론 누구나 자신의 손톱 밑에 가시가 가장 아프겠지만 자신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고통은 아닐까 합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스스로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먹은 것을 배설할 때에 그것을 처리할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 고통만큼 큰 고통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고통을 안고 서른 여덟 해나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서른 살이 못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병자는 꽤 오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더 힘들었을 그 상항에서 또한 물이 출렁거릴 때에 자신을 못 속에 넣어 주기만 하면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일을 해 주지 않고 있는 그 현실에서 그가 서른 여덟 해를 그 자리에 누워서 기다리고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기다렸을까?... 그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왔을까?... 그 정도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끊을 수 있는 상황일 수도 있었을텐데... 이 상황에서 저는 그 당시 유다인들의 마음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그 병자를 왜 못에 넣어주지 않았을까? 아니면 못에 넣어 줄 수 없었을까?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몸의 질병도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어떤 병(한센병)에 걸렸을 경우는 자신들의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내보내 함께 살지 않고 겪리 시키곤 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부정한 사람들이므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 사람도 어쩌면 부정한 사람이므로 부정한 사람의 몸에 손을 대서 자신도 부정해질 수 없었기에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병자는 이러한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으로 정해진 일이었기에 율법 조항이 바뀌기 전에는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현실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병자는 이러한 현실 앞에 무엇을 희망하고 있었을까 궁금해 집니다. 이 사람이 병에 걸렸지만 그의 신분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기에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건강해지고 나서 예수님을 성전에서 만났다는 것으로 보아 이방인은 아니요 성전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그 병든 몸을 지니고 서른 여덟 해나 베자타 못가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당시 사람들에게는 메시아 대망사상이 있었다고 배웠습니다. 혹시 그는 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루카 복음서의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서른 여덟 해를 기다렸으나 어느 누구도(유다인 형제들) 그를 그 간단하고 단순한 일일 수 있는 베자타 못의 물이 출렁거릴 때에 넣어 주기만 하면 되는 일임에도 해 주지 않는 현실에서 사람(유다인 형제들)에게 희망을 걸고 기다렸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그곳에 기존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만이 있었겠지만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면 온 유다인들이 축제를 지내러 모이는 곳이었음을 감안하여 생각해 본다면 이미 서른 여덟 해 동안 해마다 똑같은 사람들이 다녀갔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고 그 사람들은 이미 이 병자를 서른 여덟 번은 봤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병자에게 어떤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저의 궁금증이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희망 말고 다른 희망이 있으래야 있을 수 없는 현실이 보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그가 자신의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을까요? 참으로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병자는 예수님께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을 때에 이 말씀을 듣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는 그날이 안식일임을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들것을 들고 걸어갔을까? 그가 치유되고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말씀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는 그날이 안식일임을 알고 있었다고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그는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율법에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되어 있는 일(?)을 했을까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 병자가 그동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지 않앗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한 말씀을 듣고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미 온 유다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나 있었던 상황이 아니던가요? 예수님에 대해 소문만 듣고 기다리고 있던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그러자 그는 그렇기는 하지만 자신을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누군가 못 속에만 넣어 주면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이 그에게 있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못 속에 넣어 주시지 않고 그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말씀 앞에서 그 병자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하고 물음을 던져 봅니다. 자신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던 방식과 전혀 다르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바로 실행에 옮길 마음이 생길까요? 이 길은 대단히 어려운 길입니다. 제 인생을 돌아봐도 그렇고 파라오의 완고해지는 마음을 봐도 그렇고 또한 유다의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완고한 마음을 내려 놓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접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해 주었을까요? 이 사람은 서른 여덟 해나 줄곧 유다인들의 방식과 자신의 방식으로 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으로는 자신이 건강해질 수 없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던 상황에서 그럼 혹시 그 소문의 주인공이 바로 이 말씀을 자신에게 하고 계신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서른 여덟 해나 기다려도 이모앙 이꼴인데 이 분의 말씀을 까짓거 믿고 따라보자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이것은 제 입장에서 생각해 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그는 참으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들것을 들고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예수님은 왜 몰래 자리를 뜨셨을까? 이것이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요한 5,13) 아마 군중들을 배려하신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당시 군중들도 그날이 안식일임을 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일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군중들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예수님을 단죄함으로써 죄짓게 하고 싶지 않으셨던 배려(?)는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 사람은 성전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 모습은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분이 성전에 계신 것은 당연한 것이고 건강해진 그 병자가 자신을 건강하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러 성전에 온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 볼 때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성전에 들어 온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 짓지 마라."(요한 5,14)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 나쁜 일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몸이 병드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영혼이 병드는 일일 것입니다. 몸이 병들면 이 세상에서 살 때에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영혼이 병이 들게 되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과 관계되기에 더 중요할 수 있기에 그렇게 생각되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가장 먼저 병드는 곳은 몸보다 영혼일 수 있지 않는지요? 그러니 몸이 건강해진 그 사람이 이제 죄를 지으면 이제는 몸이 병드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병들게 됨을 기억하고 살기를 바라신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을까요? 그는 왜 유다인들에게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이 예수님이시라고 알렸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유다인들의 율법에 대한 도전이라고... "너희들 그동안 율법만 잘 지키면 복 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했지? 그런데 난 그렇지 못했어! 난 병이 들었기에 율법 조항을 어길래야 어길 조항도 없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절대로 행복하지 않았어.... 그런데 이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날 건강하게 해 주셨어... 너희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율법이 답이 아니라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이 답이야!" 이렇게 용감하고 당당하게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치유의 힘임을 선포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7) 바로 아버지의 일은 건강하게 해 주시는 일, 곧 살리시는 일이심을 선포하시면서 당신이 바로 그 일을 하시고 계심을 선포하시는 장면이라고 묵상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함에 있어서 율법 조항이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도 다시 한 번 묵상할 필요가 있음을 배우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랑하고 살라고 주신 계명에 왜 유다인들은 걸려 넘어져 사랑하지 못하고 살게 되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이끌었을까?... 이것을 깊이 묵상해 보지 않고서 어찌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랑과 자비말고 다른 것으로 인간이 완전하게 될 수 있을까... 십계명을 온전히 지키기만 하는 것으로... 613개의 율법 조항들을 다 외우고... 성경의 말씀들을 다 외우고... 이것만으로 완전한 사람에 이를 수 있을까?... 참으로 많은 묵상을 할 수 있는 시간으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날 되소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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