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교회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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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0-05-12 | 조회수7,757 | 추천수1 |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교회는 어떻게 성장하는가(Wie die Kirche wächst)
사도행전은 6장에서 새로운 부분이 시작됩니다. 사도들의 행적을 전하는 이야기에서 이 6장이 말하자면 새로운 시기를 여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루카가 전한 내용은 갓 출범한 공동체의 깊은 일치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6장에서 갑자기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나타납니다.
그리스인들의 불평
루카는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사도 6,1)고 말합니다. 루카가 여기서 ‘불평’이란 말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루카는 이 말을 통해, 예루살렘의 제자 공동체에도 바로 구약성경이 전하는 불평의 역사가 출현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광야 길을 가면서 대들고 거역하고 반항했습니다.
어쩌면 ‘불평’이란 말은 그런 상황을 나타내기에는 너무 완곡한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불평’이라고 옮기는 히브리어는 개들이 공격에 앞서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행동연구가인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는 개가 공격 직전의 순간에 보이는 행동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코는 주름이 생기면서 혐오스럽고 난폭한 소리와 함께 뒤로 젖혀지기 시작한다. 입술은 씰룩거리고, 그리하여 어금니가 드러난다. 앞발을 매섭게 긁어대기 시작하고, 배에서는 깊은 으르렁거림을 뱉어낸다.” 어쩌면 히브리인들은 ‘불평’이란 말을 그런 행동과 연관시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적지 않은 주석가들이, 루카가 예루살렘 원시공동체를 낭만적으로 바라보며 황금빛 후광을 둘러 미화시켰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도행전을 정확히 읽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사도행전 6장의 시작 부분은 결코 아름다운 낭만소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갓 출범한 예루살렘 공동체에서도 이스라엘의 죄가 거듭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이 보였던 불평과 불신, 의심과 반항이 반복됩니다.
공동체를 덮친 이 불행의 구체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루카는 그리스계 유다인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 홀대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다인들로서 디아스포라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온 이들이었습니다. 거룩한 약속의 땅에 살기 위해, 그곳에서 죽기 위해 온 것이지요. 그런데 디아스포라에서 온 이 그리스계 유다인들 가운데 일부가 예루살렘 제자 공동체에 합류했던 것 같습니다.
공동체 내에서 그들과 그리고 아람어를 쓰는 이들, 곧 루카가 ‘히브리계 유다인들’이라고 부르는 이들 사이에 과부들을 돌보는 일을 두고 갈등이 발생합니다. 뻔하지요. 우리가 알기로도, 재정적인 문제는 어느 공동체에서든 아주 쉽게 약점이 될 수 있고, 그 때문에 반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 소아시아 등지의 디아스포라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온 유다인들에게는 친척이나 회당 공동체로부터의 버팀목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계속 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이들에 비하면 사회적으로 훨씬 더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었지요. 때문에 그들에게는 다른 이들보다 더 급박하게 공동체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그들 가운데 누가 과부가 되었다면, 공동체 내 히브리계 사람들의 도움이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그럴진대, 불신이 생기고, 자신들이 홀대와 무시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가 얼마나 쉬웠겠습니까?
나아가 공동체 내에는 긴장을 일으키는 또 다른 요인들이 있었습니다. 루카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그가 전하는 이야기에서 쉽사리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곧 예루살렘 원시공동체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아람어와 그리스어지요. 언어는 겉에 걸치는 외투에 불과한 게 아닙니다. 각각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다른 느낌, 다른 생각, 다른 문화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다른 생각과 다른 이해는 신학에까지도 깊숙이 영향을 미칩니다.
최고 의회를 상대로 한 스테파노의 설교(사도 7,1-53 참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 ‘그리스인들’은 성전과 토라에 대해 ‘히브리인들’보다 더욱더 비판적으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스테파노가 순교하고 나서 예루살렘 공동체에 박해가 닥쳤을 때, 아마도 히브리인들은 제외하고 그리스계 유다인들만이 박해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사도 8,1.4-5 참조). 이는 사도행전 6장 1절에서 말하는 긴장이 사회적 갈등에 그치는 게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신학적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곧 갓 출범한 이 신생 공동체가 이제 대중에게 얼마만큼 강하게 말하고 얼마만큼 강력하게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신학이 나았는지, 아니면 히브리계 유다인들의 신학이 나았는지, 어느 편이 더 적절했는지 결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리스계 신자들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선교를 펼치기 시작했고, 이로써 교회는 범세계적인 하느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시작된 새것을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구현시켜 나갔습니다.
하지만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의 연결성이 늘 위태로워진 것은 그들에게서 비롯된 일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히브리계 신자들은 좀 더 보수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고수했고, 토라 전체를 지켰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이스라엘이 교회다”라는 사실을 고수했습니다. 물론 이는 후에 순전히 이방계 신자들로 이루어진 교회에서 부분적으로 잊히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리스계 신자들과 히브리계 신자들 사이의 충돌은 미래의 진로를 결정하는 문제였고,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사안이었습니다.
열두 사도의 주도적 해결
이처럼 공동체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분열의 위험이 닥친 것입니다. 아니, 냉정히 말해, 이미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갓 출범한 교회는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 나갈까요? 바로 여기에 루카의 본래 관심이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텍스트를 아주 정확하게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열두 사도가 주도권을 갖고 나섭니다. 그들이 나서는 것은, 그들이 공동체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핵심 임무는, 공동체의 일치를 가시적으로 이루고, 이를 늘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그들은 온 공동체를 소집합니다. 텍스트의 말대로 하면, 열두 사도가 공동체를 불러 모읍니다(사도 6,2 참조). 다시 말해, 그것은 일반적인 어떤 만남이 아니라, 불러 모은 공동체, 곧 교회(에클레시아ecclesia)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의 얼굴 앞에 함께 모여 온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함께 모인 이 공동체 앞에 열두 사도는 분열을 제거하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의 제안을 내놓습니다. 이 제안을 함께 모인 공동체 전체가 받아들이고 실행하기로 합니다. 여기 이 제안에는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한 세 가지 매우 흥미로운 점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이 제안으로 공동체는 새로운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바로 새로운 임무가 생기고, 그리하여 새로운 공동체의 구조가 이루어집니다. 이 임무를 위해 일곱 남자가 뽑히고 그들에게 직무가 부여됩니다. 그런데 이 일곱은 모두 특별히 그리스계 신자들입니다. 그 이름들을 보면 금세 알 수 있는데,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사도 6,5)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 일곱은 온 공동체에 의해 뽑히고, 이제 사도들이 기도와 안수를 통해 그들에게 직무를 맡깁니다.
진지하게 보면, 우리 안에는 형식과 구조와 제도 등을 미심쩍어하는 태도가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커다란 신념과 아주 좋은 뜻을 가지고 자유롭게 처리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일정한 형식들 없이는 신앙이나 삶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곧잘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따르면, 공동체를 위기에서 구한 것은 열두 사도와 그들이 불러 모은 공동체, 곧 성장하는 신생 교회가 새로운 구조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새로운 구조는, 배척이나 긴장 없이, ‘과부들을 홀대하는 일’ 없이 공동의 식탁이 이루어지는 데에 기여해야 합니다. 이를 오늘날 우리 상황에서는 이렇게 옮겨도 좋을 것입니다. 곧 “식탁 봉사”(사도 6,2)는 공동체 내에서 늘 ‘함께 나누어 먹는 일’ ‘함께하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데에 기여해야 합니다. 이 일에 속하는 모든 것과 더불어 경제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깊은 연대를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셋째, 하지만 새롭게 가능해진 이 연대의 목적은, 공동체가 자신의 선교 사명에 합당하게 되도록 하는 데에 있습니다. 루카는 이를 가리켜 “말씀 봉사”(사도 6,4)라고 합니다. 이 때,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이루어질 수 없음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모두가 함께 협력함으로써 공동체로부터 파견이 가능하게 될 때만, 선교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 1-7절의 끝맺음은, 루카가 공동체의 갈등 상황을 전하면서도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인데, 바로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사도 6,7)
위기는 교회를 성장하게 한다
이로써 루카의 의도는, 신생 공동체에 닥친 커다란 위기와 이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공동체를 성장하게 했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계 신자들과 히브리계 신자들 사이의 충돌은, 서로 달래고 충고하고 감정적인 위로를 나눔으로써 해결된 게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가 함께 새 발걸음을 감행함으로써 극복되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깊은 위기에 놓였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위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늘 슬픈 일이고, 종종 끔찍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위기들은 교회에 새로운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러한 위기가 교회에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에 귀를 기울이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답을 찾으려 할 때뿐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찾으려 할 때뿐입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신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 Gemeinde에 머물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외 다수가 있다. 로핑크 신부님은 책 집필 외에 유일하게 『생활성서』 독자들에게 매월 글을 보내며 한국 신자들과의 소통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월간 생활성서, 2020년 5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저, 김혁태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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