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순 교수 특별기고] ''이재수의 亂''을 생각한다 - 신축교안(辛丑敎案)의 의의 (2)
敎案은 國 · 敎權 분화기의 정교분쟁, 종교박해 과도기인 韓末 20년간 자주 발생
지방관이 자의적으로 행정력을 행사하고 법을 문란케 운용하는 경우라도 성직자가 이에 행동으로 간섭함은 원칙을 벗어난 월권이며 과잉행동이었고, 국법질서를 손상하는 것이기에 문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직자들은 핍박받는 자기 교민 보호를 위해 나선 것이었으나, 치외법권적 존재인 외국인의 부당한 영향력 행사로 간주되어 결과적으로 민족적 감정을 자극하거나 관·민의 저항에 부딪치게 되어 뜻하지 않게 큰 분쟁으로 확대된 사례도 생겨났다.
한불조약이 체결되고 천주교 전교성직자와 개신교 선교사들이 국내 각지에서 전교활동에 나서게 된 후 이처럼 뜻하지 않게 교·민간의 다툼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그 다툼이 법적.외교적 문제가 되어, 교안(敎案)으로 간주된 일에는 교인과 민인의 다툼이나 자탁교인(藉托敎人 · 사이비 신자)들의 위계에 의해 벌어지게 된 교안, 지방관이나 동학 · 동심계 · 일진회 등 사회조직의 의도적 도발에 의한 교안, 일방적인 전교활동이나 행정적, 법적 질서에 대한 과도한 개입에서 야기된 교안, 그밖의 이유에서 생겨나는 교안 등 그 유형은 여러 가지였다. 개중에는 개인 간의 비교적 단순한 사안도 있었으나, 때로는 교인과 비교인이 작당하여 집단적으로 서로 폭행하는 사례도 있었고, 예외적이기는 하나 인명이 살상되는 사건도 있었다. 또한 국제문제로 비화된 예도 있다.
''교안''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국가 정책이 전면 박해에서 전면 개방으로 옮겨가는 과도 이행기에 생겨나는, 종교문제 또는 종교문제와 관련되어 벌어진 다툼이 정치적, 행정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사안을 표현하는 보편적 의미를 지닌 역사용어이며, 특정 종교의 의식을 담은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교안이며 최대로 인명의 희생을 초래한 참극이었던 1901년 제주도에서의 교민 소요 사안을 한낱 민군지도자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이재수의 난」(李在守의 亂)이나, 단순히 「제주민란」(濟州民亂)으로 명명하여 그 역사적 성격을 흐리기 보다는 「신축제주교안」(辛丑濟州敎案)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교안 발생의 배경
현재까지 조사되고 있는 한말의 대소 300여건의 교안 가운데 사안이 경미한 것은 대체로 지방 전교성직자와 지방관료의 협상으로 타결되었다. 그러나 때로는 지방 차원에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전교성직자 → 중앙의 주교관, 지방관료 → 내부(內部)로 각기 보고되어 교회 책임주교와 내무주관 행정당국과의 교섭으로 해결되었다. 특별한 경우에는 사안의 심각성에 비추어 프랑스공사관과 정부의 외부(外部)로 통고되어 프랑스와 우리나라 간의 외교적 절충으로 타결되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 대규모 교안의 발발로 위기에 직면한 프랑스성직자의 구원을 위해 프랑스 군함이 출동한 사례도 두 차례나 있었다.(1894년 동학란 때와 1901년의 제주신축교안 때) 「교안」사단의 발생은 그리스도교 박해정책기에서 현대적 신앙자유기로 넘어오는 과도이행기 20년 간에 자생된 분쟁으로, 국가나 교회 모두를 위해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교안은 국권(國權)과 교권(敎權)이 명백하게 분화되지 않은 시대적 상황에서 벌어지던 「정교분쟁」(政敎紛爭)이었다. 이런 분쟁은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세계사를 돌이켜보면 교권이 우월하던 시대에서 왕권이 강화되는 민족국가 발전기에 들어 교권과 왕권은 심한 알력과 분쟁을 겪었다. 그 혼란을 극복하려는 쌍방 간의 노력에 의해 로마교황청과 근대민족국가 간에 이른바 「콩코르다조약」(Concordat 政敎條約)이 체결되어 세속의 일은 국권이, 하느님의 일은 교권이 담당하는 원칙에 합의함으로써 국가와 교회의 관계가 원천적으로 정리되었던 것이다.(1515년 프랑스와 교황청 간에 정교조약이 맺어진 후, 20세기초까지 교황청과 유럽 각 국간에 콩코르다조약이 체결되어 정·교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원칙적이고 제도적인 외교장치가 마련되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책이 전면 박해에서 전면 자유로 넘어가는 과도이행기라 할 한말 20년 간에 걸쳐 자주 발생하였던 대소의 교안을 정교 간의 관계로 귀결지으려는 한국 교회와 우리정부의 노력에 의해 1899년 교민조약이 조선교구의 교구장인 뮈텔 주교(Mutel 閔德孝)와 한말정부의 내부 지방국장 정준시(鄭駿詩)간에 체결되었다.
이는 서양의 정교조약과는 달리, 조선왕국의 교회 책임자와 지방행정 책임자간의 약정서(約定書)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러나 정교분쟁으로서의 교안사단의 발생을 원칙적으로 정리하려는 것이어서 「콩코르다정신」에 상통하는 한국사적 약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전 9조로 된 교민조약의 약정 내용이 제대로 준수되었더라면 그 후에는 교안이 벌어지지 않았어야 한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계속 지방 각지서 교안 사단이 벌어졌다. 조약이나 약정도 중요한 것이나, 문제의 핵심은 당사자들의 준법정신과 더불어 정치질서의 확립이 바탕되어야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선교사의 전교자유와 더불어 신자들의 신교자유가 보장되는 종교자유정책이 구현된 개방사회로 발전될 때 비로소 교안의 발생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반도 최대 교안
한반도 각지서 벌어진 교안 가운데 최대의 규모였고, 최대의 참사를 낳은 것이 1901년에 벌어진 「신축제주교안」이었다. 신축제주교안은 제주도라는 특정한 지역의 주민들이 교(敎 성직자와 교인들) 민(民 교인을 제외한 도민) 두 패로 갈라져 서로 조직을 가다듬고, 나름대로 무장을 갖추고 각지서 충돌을 거듭하다가 1주간의 제주성 공방전을 벌였고, 제주성 함락을 전후하여 쌍방간에 수백명(대부분은 제주성 함락 후 학살된 교인들이었다)의 희생자를 낸 대규모의 교안 사안이다.
제주도에 천주교 신부가 부임하여 정식으로 전교활동을 펴게 된 것은 1899년 5월부터였다. 이들 성직자는 프랑스외방선교회 소속의 페네(Paynet) 신부와 조선교구 소속의 한국인 성직자 김원영(金元永) 신부였다. 다음 해 1900년 초에 페네 신부가 본토로 전출되고 그 대신 라크루(Lacrouts 한국 이름 具瑪瑟) 신부가 부임했으며 신축교안이 벌어지기 직전인 1901년 5월에 무세(Mousset 文濟萬) 신부가 증파되었다.
천주교의 제주 전교는 외국인 및 이문화에 대해 폐쇄적이던 도민의 습성과 뿌리깊은 전통적 민속신앙 등으로 말미암아 용이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부 서민층과 지방향리 그리고 제주에 유배된 지식인 등이 천주교를 영생구원의 종교인 동시에, 현실 위열(慰悅)의 사회복음으로 이해하고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면서 차차 제주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00년 9월 라크루 신부는 제주에, 김원영 신부는 정의군 한논(大沓)에 각각 근거를 마련하고 선교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점차 교인이 늘어나면서 천주교회는 제주도 내의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자라나게 되었다.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질문화 · 이질종교에 반발하는 지방민인과 전통적 토속신앙세력의 반발도 받게 되었다.
[이원순 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가톨릭신문, 1999년 8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