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뱀의 상징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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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남충희 | 작성일2013-08-01 | 조회수761 | 추천수1 | 신고 |
영성적 단어들에는 정의를 내릴 수 없습니다. 소순태님은 이것을 모르고, 나아가 모른다는 것을 모르시기 때문에 자꾸 같은 요구를 반복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의 성서구절을 보면 지혜와 어리석음, 善과 惡을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어리석습니다.(1 고린토 3:19)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이며 악을 행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뵙지 못한 사람입니다.(3요한 1:11) 뱀은 사탄입니다. "그는 늙은 뱀이며 악마이며 사탄인 그 용을 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하여..."(묵시 20:2) 세상의 지혜는 사탄, 곧 욕망이라는 허상에서 오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람의 욕망을 잘 살펴보면 감각적인 것( 美)과 정신적인 것(善)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善은 美를 근거로 성립하므로 세상의 지혜는 善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善에 반대되는 惡을 미워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말하는 善惡은 세상의 지혜가 가르치는 善惡과 전혀 다릅니다. 요한은 단순히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은 善하다고 합니다. 성령을 지닌 사람은 그 자체로 善하기 때문에 善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뵙지 못한 사람은 성령을 지니지 못하였으므로 惡한 행동을 합니다.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하느님에게서 나지 않은 사람은 요한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지혜가 가르치는 善惡의 기준과 요한이 제시하는 善惡의 기준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뵈었다'는 성령을 받아들이는 활동, '하느님에게서 났다'는 성령에 일치하는 생활을 나타냅니다. 각각 애덕과 신덕에 해당합니다.) 소순태님은 성서저자인 요한이 이원론적 주장을 한다고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요한과 똑같은 것을 말하는데 자꾸 저를 이원론자라고 하신다면 저는 너무나 억울합니다. ㅠㅠ 세상의 지혜는 美와 醜 善과 惡을 나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한편 성령의 지혜는 생명과 죽음, 참된 생명과 거짓 생명(위선, 복음을 빙자한 미신)을 명확하게 구별할 줄 압니다. '쌍날칼'(히브리 4:12)의 상징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두 가지의 구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사실 뱀처럼 슬기롭게 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후자의 구별을 더 염두에 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중에 세상의 지혜에 영합하여 복음을 변질시킬 위험성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복음을 빙자하여 돈,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일이 널리 유행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물론 참된 생명만이 善이며 진리입니다. 굳이 뱀이라는 상징을 사용한 것은 善과 惡은 결코 섞일 수 없이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세상의 지혜를 상징하였던 그 '뱀'으로 성령의 지혜를 상징하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두 뱀의 권능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모세의 뱀이 마술사들의 뱀을 냉큼 잡아먹지 않았습니까? 자, 이 정도로 소순태님의 마음이 풀리셨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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