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성경 인물 이야기: 아브라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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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0-05-31 | 조회수9,096 | 추천수0 | |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브라함 (1)
하느님의 벗이라고까지 불린(2역대 20,7)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오늘날 이라크 땅에 있던 고대 수메르 도시 우르에서 태어났습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이름 테라만을 밝히고 있습니다만, 외경 희년서는 어머니의 이름 에드나도 함께 기록하고 있으며,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하느님께서 이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십니다.
테라는 집안을 이끌고 우르를 떠나 오늘날 터키 땅에 있던 도시 하란으로 가는데(창세 11,31), 이 이동의 이유를 신앙 때문으로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테라는 히브리어로 ‘테라흐’라 하는데, 달을 뜻하는 ‘야레아흐’에서 파생되었다고 추정합니다. 이것은 테라가 ‘그를 비롯한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라는 여호 24,2의 말씀처럼 달의 신을 숭배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이름입니다. 달의 신은 테라가 살던 우르의 주신(主神)이었습니다. 우르에서 발견된 달의 신 난나에게 봉헌된 거대한 신전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농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달의 신을 주신으로 섬긴 이유는 우르가 농업을 기반으로 형성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3000년경의 ‘우르의 깃발’에는 소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르에서 기원전 8000년경 제작된 질그릇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곡물을 저장하는데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 전승도 테라가 우상을 숭배했다고 합니다. 한 전승에 따르면, 테라는 하느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조각해서 생계를 꾸렸습니다. 하느님을 믿던 아브라함은 반대했지만 테라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아브라함이 집에 혼자 있을 때 도끼로 우상 조각들을 모두 부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분노한 테라가 아브라함을 불 속에 집어넣었는데, 그가 불길 속에서도 무사한 것을 보고 회개하여 다시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전승은 성경이 밝히지 않는 테라가 우르를 떠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회개한 테라가 우상과 완전히 결별하기 위해 달의 신이 다스리는 도시 우르를 떠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하란에도 달의 신을 섬기는 거대한 신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르와 하란 사이에는 여러 도시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달의 신을 주신으로 섬기는 도시는 없었음이 수메르어로 기록된 점토판의 발굴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르를 떠난 테라는 하필이면 달의 신을 섬기는 하란으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테라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에 따라 가나안으로 떠날 때도 함께 가지 않고 하란에 남았습니다. [2020년 5월 31일 성령 강림 대축일(청소년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브라함 (2)
테라가 우르를 떠난 이유에 대한 다른 해석이 있는데, 기후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테라의 시대로 추정되는 우르 제3왕조 때 근 백 년에 걸친 대기근이 들어 많은 이들이 그곳을 떠나 우르 왕조가 붕괴할 정도였습니다. 이때 테라도 기근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하란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란은 중동지방의 곡창지대를 가리키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 안에 있어서 풍요를 누렸을 뿐 아니라, ‘길목’이라는 그 이름의 뜻처럼 동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서쪽의 이집트를 잇는 국제무역로 상에 있어서 고대 상업의 중심지로도 번성했습니다. 하란에서 발굴된 18,000평이 넘는 규모의 왕궁이 당시의 성세를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창세기 15,7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해 그를 우르에서 데려내 오셨다고 합니다. 테라가 가족을 데리고 원래 가려고 했던 곳도 하란이 아니라 가나안이었습니다. 즉, 테라가 기근 때문이든,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로 우르를 떠났든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일이라는 말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라고 하지만, 사실 가나안 땅은 대부분이 석회석 산지에 비도 많이 내리지 않는 곳입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비옥한 땅과 비교하면 척박하기만 한 땅입니다. 민수기 16,13은 가나안이 아니라 이집트를 가리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합니다. 물질적 차원에서는 나일강의 축복이 있는 이집트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은 어떻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수 있을까요? 시편 19,10과 119,103은 하느님의 말씀을 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66,11에는 젖이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상징으로, 요엘서 4,18에는 하느님 은총의 상징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볼 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은총을 받는 곳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체험할 가나안은 분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이다.
창세기 12장은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처음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7,2-4의 스테파노의 말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만난 곳은 우르입니다. 그리고 스테파노는 아브라함이 테라가 죽은 뒤 하란을 떠났다고 하지만, 창세기는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테라는 70세에 아브라함을 낳았고(창세 11,26),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났으니까(창세 12,4), 이때 테라는 145세였습니다. 테라는 205세에 죽었으니(창세 11,32), 그가 살아 있을 때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2,1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스테파노가 이 부분을 착각했거나, 테라가 145세에 죽었다고 기록한 사마리아인들의 오경을 읽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2020년 6월 7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브라함 (3)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란을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가야 할 곳은 가나안인데, 직선거리로도 약 700㎞나 떨어진 우르에서 살던 아브라함은 그곳을 알지 못합니다. 이 미지의 장소로 가기 위해 아브라함은 자기 땅, 친족,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합니다. 익숙한 곳, 안전한 곳, 생계가 보장된 곳, 친밀한 관계가 있는 곳, 자신의 뿌리를 떠나야 합니다. 이런 일은 보통 포로로 끌려가는 이들이 겪던 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에 한 마디 불평도 없이 하란을 떠납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받게 될 네 가지 은총을 약속하십니다.(창세 12,1-2) 땅, 후손, 축복, 명성입니다. 그렇지만 이 선물 보따리 때문에만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떠났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선물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하느님을 만난 때는 기원전 21세기로 추정하는데, 이때는 하란의 전성기였기에 아브라함도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지금 눈앞에 있는 풍요로움을 버리고 아직 실체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약속을 향해 떠난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직 완전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서 이끄신 가나안에서 보게 된 것은 온갖 곡식이 무르익고 과일이 풍성하게 열린 것이 아니라 기근이 들어 황폐해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갔을 때, 파라오가 사라를 탐내는 일이 벌어집니다. 고대 사회에서 부족장이 아름다운 여성을 여럿 거느리는 것은 권력의 상징이었고, 그를 위해 다른 부족의 여성을 약탈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유다 전승은 이집트 여인들의 까만 피부와 달리 흰 피부를 가진 사라는 매우 매력적이었다고 전합니다. 미드라시는 아브라함이 사라를 상자에 숨겨 이집트에 들어갔는데, 이집트인들이 상자를 열 것을 요구하여 뚜껑을 열자 사라에게서 비치는 광채가 온 이집트를 뒤덮었다고까지 합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사라를 차지하기 위해 파라오가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합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지켜주시리라고 굳게 믿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이집트에서 믿음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험의 목적은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성장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이집트에서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지 못했지만, 자신과 함께하시며 도우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앙의 성숙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이 그라르 임금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또다시 누이로 소개하는 것이 이를 보여줍니다. [2020년 6월 14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브라함 (4)
아브라함은 이집트를 떠나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때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결별하게 됩니다. 창세기 12,5(아브람은 아내 사라이와 조카 롯과, 자기가 모은 재물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과 창세기 13,1(아브람은 아내와 자기의 모든 소유를 거두어 롯과 함께 이집트를 떠나 네겝으로 올라갔다)의 단어 나열 순서를 비교하면 창세기 12,5에서는 롯이 재물 앞에 오는데, 창세기 13,1에서는 롯이 재물 뒤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재물이 아브라함과 롯 사이를 갈라놓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양과 소를 치는데 필요한 목초지와 우물이 부족해지자 아브라함은 롯을 분가시킵니다. 그런데 이 분가는 평화롭게만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창세기 13,8의 아브라함의 말은 롯에 대한 비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3,7은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히브리어로 ‘리브’)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브라함은 창세기 13,8에서 싸움(히브리어로 ‘므리바’)이라고 합니다. ‘므리바’는 주로 이스라엘 백성이 지도자나 하느님께 불평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사용된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이 없을 때 모세와 하느님께 ‘므리바’하였습니다(탈출 17,7). 그러니 아브라함은 롯의 배은망덕을 탓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롯을 떠나보내는 아브라함의 결정에는 이 같은 감정도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짐작해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함으로써 그가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의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셨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할 때만 복을 나눠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을 떠난 롯의 운명이 어찌 되겠습니까? 창세기 13,13은 롯이 선택한 땅이 악인들과 죄인들의 땅이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앞으로 롯에게 불행한 일이 생길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으로부터 자기 몫으로 받은 땅을 조카에게 나눠준 것도 아닙니다. 롯이 선택한 요르단의 들판(창세기 13,11)은 가나안 땅 밖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롯이 제 의지로 선택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브라함이 축복의 땅 밖으로 롯을 추방한 셈이 되었습니다.
롯이 떠난 뒤 뒤늦게 자기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일까요? 아브라함은 조카와 헤어지게 만든 땅을 떠나 헤브론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리고 조카에 대한 사랑과 가문의 수장으로서의 의무감 외에 후회와 미안함의 감정도 나중에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기 위해 소수의 병사를 이끌고 큰 군대에 맞서는 무모한 행동을 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지요. [2020년 6월 21일 연중 제12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브라함 (5)
아브라함 시대에 요르단 지역의 다섯 도시국가(소돔, 고모라, 아드마, 츠보임, 벨라 혹은 초아르)는 아시리아 지역의 네 도시국가(신아르, 엘라사르, 엘람, 고임)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가 아직 제국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흐르는 땅의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강한 국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요르단 지역의 국가들이 아시리아 지역의 국가들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키지만 패배합니다. 이 당시 이미 아시리아 지역에서는 고대에 오늘날의 탱크와 같은 위력을 자랑하던 말이 끄는 전차를 사용했을 정도로 전투력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의 패배로 소돔에 살던 롯도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기 위해 출전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318명의 병사로 다섯 도시국가의 연합군도 당하지 못한 당시 근동 지방 최강의 네 도시국가 군대를 상대로 승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적인 승리는 아브라함 스스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닙니다. 멜키체덱 임금은 아브라함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창세 14,20).
이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많은 자손과 가나안 땅에 관한 계약을 맺으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표징을 원합니다(창세 15,8). 금방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한 아브라함의 태도가 이상합니다. 하지만 표징을 요청하는 것은 불신앙의 증거가 아닙니다. 남 유다의 임금 아하즈는 오히려 하느님께 표징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해서 이사야 예언자에게 꾸지람을 들었습니다(이사 7,11-14). 이는 아하즈가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연합군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미 아시리아에 원군을 요청해 두었기 때문입니다(2열왕 16,7-8). 이 경우를 볼 때, 표징을 청하는 것은 자신이나 다른 무엇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을 신뢰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행위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표징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맺은 계약 자체입니다. 이 계약은 ‘피의 행진’이라 불린 고대 근동의 전형적인 계약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두 계약 당사자가 반으로 자른 제물 사이를 8자를 그리며 지나가서 서로의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 계약을 맺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속을 어기면 반으로 잘려 피를 쏟고 죽은 제물과 같은 운명이 되겠다는 맹세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계약을 맺는다는 히브리어 ‘카라트 버리트’에는 쪼갠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34,18에도 이런 형식의 계약이 나옵니다: “나는 내 계약을 어긴 사람들을, 곧 내 앞에서 송아지를 두 토막으로 가르고 그 사이로 지나가면서 맺은 계약의 규정들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그 송아지처럼 만들어 버리겠다.” [2020년 6월 28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브라함 (6)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실 때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갑니다(창세 15,17). 구약성경에서 불은 하느님의 상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느님만 제물 사이로 지나가시고 아브라함은 지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계약이 유지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달렸는데, 그분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이 계약은 깨어지지 않습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다시 계약을 맺으시는데, 그 계약의 표지로 할례를 명하십니다: “너희는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운 계약의 표징이다.”(창세 17,11) 그래서 오늘날도 유다인 사내아이는 태어난 지 8일째에 할례를 받으며, 자기 몸에 새겨진 이 표지를 볼 때마다 하느님과의 계약을 기억합니다. 교회도 1960년까지는 예수 탄생 8일째인 1월 1일에 주님의 할례 축일을 기념했습니다.
그런데 할례는 에돔, 암몬, 모압을 비롯한 대부분 셈족과 페니키아인들, 이집트인들도 행했습니다. 기원전 29세기의 시리아 전사 조각상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할례 증거이며, 기원전 24세기 이집트 벽화에도 할례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계약의 표지를 신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기는 풍습은 고대세계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악수도 계약의 두 당사자가 손바닥에 상처를 내고 피가 흐르는 상태에서 손을 맞잡던 풍습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를 하느님과의 계약의 표지로 여겼기에 그 중요성은 다른 민족들의 것과 비교할 바 아닙니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라이가 사라로 이름이 바뀝니다.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를 의미하는 아카드어 ‘아부-라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의 아버지’라는 뜻이니 많은 후손을 볼 이에게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여왕이라는 뜻의 사라도 제 땅을 가지고 나라를 세울 민족의 어머니에게 어울립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사라 이름에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의 이름에는 하느님의 이름 야훼의 철자 가운데 하나인 ‘헤’가 들어갑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계약을 맺을 때 계약 상대방의 이름을 자기 이름 가운데 끼워 넣어 자기가 누구와 계약을 맺었는지를 드러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이름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음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조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자신들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민족임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2020년 7월 5일 연중 제14주일(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브라함 (7)
창세기 18장에서 세 사람이 마므레에 있는 아브라함을 찾아옵니다.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는데, 러시아 수도자 안드레이 루블레프는 이콘에서 이들을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교 랍비들은 이들의 정체는 미카엘, 라파엘, 가브리엘 천사이며, 미카엘은 사라의 임신을 알리고 롯을 살리며, 라파엘은 할례의 고통을 겪는 아브라함을 치유하고, 가브리엘은 소돔과 고모라를 파괴하는 임무를 맡아 파견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대접하는데, 이 장면은 고대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손님 맞이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주인은 손님에게 먼저 물 한잔과 약간의 음식을 대접했는데, 아브라함은 많은 양의 고운 밀가루로 구운 빵과 좋은 송아지 한 마리의 고기를 대접합니다. 이것은 고대에 계약을 맺은 두 당사자가 계약 후에 함께 나누던 만찬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계약이 성사되었음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사람은 계약의 첫 번째 결과로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을 것을 알려주는데, 사라는 이 소식을 듣고 웃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이 웃는다는 뜻의 이사악이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노부부가 아이를 낳으리라는 말은 망측스러울 뿐이겠죠. 하지만 믿음이 있으면, 처녀가 아이를 낳으리라는 말에도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마므레에서 세 사람을 만난 뒤에 그와 하느님의 친밀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 조카 롯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 하시자, 그 도시들을 위해 중재 기도를 한 것입니다. 중재 기도는 일반적으로 세 번 반복하였는데, 아브라함은 세 번씩 두 번 반복하면서 더 절실하게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아브라함은 마치 의인의 값으로 소돔과 고모라를 사려고 거래하는 듯합니다. 아브라함은 더 낮은 가격에 구매하려고 50명의 의인에서 10명까지 여러 번 값을 깎는데, 하느님은 이 거래를 마지막까지 받아주십니다. ‘천원만’, ‘오백 원만’ 하면서 깎아달라고 떼를 쓰는 단골손님과 ‘그러면 밑지는데’ 하면서도 결국 깎아주고 마는 상인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보는 듯합니다. 그리고 의인 단 열 명이 소돔과 고모라 두 도시 전체와 거래된 사실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의인 한 명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도 알려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아브라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죄악으로 가득 찬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고 맙니다. [2020년 7월 12일 연중 제15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브라함 (8)
창세기 20장은 아브라함과 그라르 임금 아비멜렉 사이에 벌어진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앞에서 세상 구원의 중재자인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을 보여준 아브라함이 여기에서는 큰 실망을 안겨줍니다.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여 이집트에서 했던 잘못(아내인 사라를 누이로 속임)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직 더 성장해야 합니다.
믿음은 시험을 통해서 성장하는 법이지요. 아내를 두고 치러진 두 번의 시험에 실패한 아브라함은 자식들을 두고 두 번의 시험을 다시 받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이사악이 탄생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이미 사라의 여종인 하가르가 낳아준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있습니다. 각자 아들을 낳은 두 여인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커져, 결국 사라는 하가르와 이스마엘 모자를 내쫓게 됩니다.
창세기 21,10은 사라가 이스마엘을 내쫓으려는 이유를 아브라함의 유산을 나눠주지 않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 따르면, 비록 종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라 해도 아버지가 아들로 인정하면 유산을 요청할 정당한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1,11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아들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재물 때문에 조카 롯과 결별했는데, 사라도 재물 때문에 하가르 모자를 내쫓는 걸 보면 믿음의 조상들마저 홀릴 정도로 재물이 요물이긴 한 모양입니다.
하가르 모자를 내치라는 사라의 요구를 들은 아브라함은 마음이 아팠지만, 하느님께서 그 청을 들어주라고 하시자 그대로 따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빵과 물 한 가죽 부대만을 줘서 내보내는 건 너무한 처사로 보입니다(창세기 21,14). 여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예를 들어, 어떤 랍비는 아브라함이 사라의 분노가 가라앉으면 그들을 다시 데려오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적은 양식만을 준 것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랍비는 사라의 말을 다 들어주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유산으로 간주할만한 것을 줄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을 한 민족의 조상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그들 모자를 보살피시리라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2020년 7월 19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브라함 (9)
아브라함이 하느님께서 이스마엘을 두고 내리신 시험을 통과한 뒤에 이사악을 통한 시험이 이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창세 22,2).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따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진정 인신 공양을 원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반인륜적인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려고 한 것일까요?
고대 근동에서 인신 공양은 실제로 행해졌습니다. 고고학자들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풍년과 다산을 기원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신들에게 제물로 바친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성경 안에도 인신 공양의 흔적은 나타납니다. 레위기 18,21은 아이들을 가나안의 신 몰록에게 제물로 바쳐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신명기 12,31은 가나안 사람들이 자기 자식들을 불에 살라 신들에게 제물로 바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2열왕 3,27에서 이스라엘군에 패배하던 모압의 임금이 전세를 뒤집기 위해 왕세자를 번제물로 바쳐 그 효험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사건은 인신 공양이 고대에 가장 가치 있는 제사로 여겨졌음을 알려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인신 공양의 풍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판관기 11,31에서 입타는 인신 공양을 하느님께 약속합니다(딸을 실제로 제물로 바쳤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습니다). 2열왕 23,10은 요시아 임금이 어린아이들을 몰록에게 번제물로 바치는 것을 금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는 기원전 7세기 후반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천년도 더 지난 때까지 인신 공양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인신 공양을 받으실 리 없으신 분으로 믿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은 하인들에게 이사악과 함께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는 장면에서 드러납니다(창세 22,5). 그리고 창세기 22,8에서 제물이 어디 있냐고 묻는 이사악에게 하느님께서 손수 제물을 마련하실 것이라고 답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비록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정확히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반인륜적인 행위를 강요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그분의 명령에 일단 순종한 것입니다. [2020년 7월 26일 연중 제17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브라함 (10)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산으로 떠납니다. 모리야는 이곳 외에 2역대 3,1에만 나오는 지명인데, 그곳에는 ‘예루살렘 모리야 산’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 전통과 교부들에 따르면, 모리야 산은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시온 산이며, 그 산의 봉우리 가운데 하나가 골고타 언덕입니다.
모리야 산의 위치를 이렇게 본다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신 이유가 반인륜적인 인신 공양 제사를 세우시기 위함이 아니라면 훗날 그 산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주시기 위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아브라함이 외아들(창세기 22,2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마엘이 있음에도 이사악을 외아들로 부르십니다.)을 제물로 바치려던 모리야 산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실 것입니다. 이사악 대신 제물로 바쳐진 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알려줍니다. 이사악이 지고 모리야 산을 오른 장작에서도 예수께서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가신 십자가가 보입니다. 그리고 이사악이 번제 제단에 묶었다가 풀려난 것은 십자가가 끝이 아니라 예수께서 부활하실 것을 알려줍니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 22,4에 등장하는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표현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후 하느님께서는 더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뜻이겠지요.
아브라함은 175세에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칩니다. 창세기 25,8의 ‘한껏 살다가 숨을 거두었다’는 표현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수명이 길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이 행복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던 견디기 힘든 시련으로 점철된 삶이었지만, 하느님을 떠나지 않고 그분과 함께 걸어온 길이었기에,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의 벗이 되어주셨기에 참으로 복 받은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의 막펠라 동굴에 묻힙니다. 헤브론의 어원은 ‘친구’를 뜻하는 것으로 추정하며, 아랍어 지명은 ‘이브라힘 알 할릴’(자비로운 분의 친구 아브라함)입니다.
오늘도 헤브론은 찾아오는 순례객들에게 흙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을 하느님의 벗으로까지 만들어 주는 믿음의 놀라운 능력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2020년 8월 2일 연중 제18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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