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상징어(象徵語)에 관하여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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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남충희 | 작성일2013-08-05 | 조회수470 | 추천수2 | 신고 |
(존대법 생략합니다.) 상징이라면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그와는 정반대로, 상징은 어떤 사태(事態)를 지시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다. 상징 자체에는 아무 의미가 없고 그 상징을 공감하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같은 까마귀라는 상징으로 권력에 아부하는 무리를 비난하기도 하고, 반포보은(反哺報恩)을 떠올리며 효성이 지극한 사람을 칭송하기도 한다. 상징은 특정의 '그' 사건을 목격하는 사람들끼리만 통용된다. 일반적으로 상징은 특정 집단의 감정을 자극하여 공감을 구하는 효과를 노린다. 그런데 영성적인 상징은 일반적인 상징과 큰 차이가 있다. 영성적 사건은 상징 또는 비유가 아니면 표현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 일반적인 사건은 경험과 이성으로 알고 설명할 수 있지만 영성적 사건은 경험과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그것을 정의(定義)하거나 개념적(槪念的)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예수 또한 비유를 사용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마태오 13:34) (여기에서 상징은 명사적 표현, 비유는 문장이나 이야기의 형식을 가리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이야기를 간단히 하기 위해 둘을 묶어서 상징이라는 단어로 통일하겠다.) '하느님'이란 단어는 '하늘'에서 온 것이다. 하필 다른 단어가 아닌 하늘을 사용한 것은 겸손과 온유의 멍에를 메고(마태오복음 11:29) 도달하는 '그' 맑고 고요한 마음을 하늘에 빗댄 것이다. 하늘은 '나'의 안에 존재하기도 하고 '내'가 하늘 안에 존재하기도 한다. 예수는 이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요한복음 14:11) 라고 표현하였다. 흔히 상호내주(相互內住)라고 하지만 이것을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시도하는 것 자체가 매우 해로운 행위이다. 하느님은 사유(思惟) 또는 관념(觀念)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전적인 투신(投身)과 일치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에 하늘은 구름 위의 어떤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란 단어는 하느님과의 일치사건을 상기시키는 상징어가 된다. 즉, '나' 또는 '우리'가 하늘에서 만나뵙는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라는 단어에서 온 것이고 개신교신자들은 '하나이신 분'이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하나'는 숫자의 개념이므로 그것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올바른 이름이 될 수 없다. 아무도 하느님에 '대하여' 알 수 없다.(요한복음 1:18) 하느님과의 일치 사건을 '하나'라는 상징어로 일컬을 수는 있지만 그 사건을 호칭으로 부를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틀리다. '사랑'이라는 단어도 물론 상징이다. 일반적인 사랑은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소유하려는 의지이다. 대체로 감성적 애착, 이해타산, 윤리적 가치의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각각 감성, 이성, 의지의 활동에 해당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대상에도 의지하지 않고 그 자체가 목적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감성, 이성, 의지를 초월하는 생명과 지혜와 자유로움을 준다.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조금도 알 수 없다.(요한복음 3:5)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 '사건'을 일으켜야만 한다. 그러면 왜 하필 '사랑'이란 단어를 쓰는가? 그것이 가장 적절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의 '사랑'과 '살이', 영어의 'love'와 'live'에서 보듯, 사랑은 생명을 누리고 생명을 주는 행위이다. 육신이 살기 위해서는 욕망을 채워야만 하고 남의 육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남의 욕망을 채워주어야 한다. 이처럼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남을 살리기 위해서는 남에게 성령을 부어주어야만 한다. '질투하시는 하느님'에서 '질투'도 상징어이다. 질투는 나에게 부족한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는 상대방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낳고 다스리시며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시므로 어떤 대상에게도 질투하실 이유가 조금도 없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외면하고 피조물을 아버지로 섬기고 있다. 우상이란 어리석은 사람들이 피조물에 하느님 또는 그와 비견되는 최고신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사람의 어리석음 때문에 사람이라는 애인을 사이에 두고 하느님과 우상이 서로 경쟁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질투'는 하느님께서 세상 만물 중에 오직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표현이다. 하느님의 질투를 아무리 연구해본들 그것을 알 수 없다. 하느님을 모르면서 어떻게 그분이 질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우상과 싸워 이기는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고 이때 에야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우상을 질투하시는구나!"하고 깨닫는 것이다. 예를 드는 것은 이 정도로 해두겠다. 성서는 상징에서 시작하여 상징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주님, 전능하신 분, 광야, 회개, 골방, 산, 물, 세례, 물고기, 그물, 배, 하늘, 땅.....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만일 이런 단어들을 사전적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또는 개념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성서는 별 재미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는 옛날 이야기로 전락하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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