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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간의 창조(2, 4b-7)---손삼석 신부(부산 가톨릭 대학)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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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타한인성당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07 조회수539 추천수0

2) 인간창조(2, 4b-7)

 

야훼계 창조이야기는 첫머리에서부터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YHWH)라고 고백함으로써 그 특징을 잘 나타낸다.

창조 이야기의 배경은 땅이며 강조점은 땅에 두고 있다. 첫머리에 ‘야훼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라고 함으로써 땅을 하늘보다 앞세우고 있다(1, 1과 비교)1).

이미 황량한 땅의 모습을 기술하고 있다. 나무도 풀도 없었고, 비도 내리지 않았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다. 마침 땅에서 물이 솟아올라 온 땅을 적셨다. 이런 황무지에서 첫 창조물로 인간이 생겨난다.

 

1장의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인간창조사업의 절정이자 최종 피조물로 나타나지만 2장에서는 인간이 첫 생명체로서 창조사업의 중심이자 핵이 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두 기록 모두 인간과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전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사제계 기록에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라는 표현이 야훼계 기록인 이곳에서는 하느님 친히 손으로 진흙을 개어 사람의 외형을 만드시고 코에 당신의 입김을 불어넣으시며 살아 숨쉬도록 하셨다고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또한 이곳에서 인간은 창조주의 협력자와 동참자로 창조된다. 이 설화에서 하느님은 마치 옹기장이 같이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드신다. 아담의 형상을 만드신 것이다.

 

아담이란 히브리어로 ‘인간’(ādām)이라는 뜻인데 이렇게 인간은 덧없는 재료인 땅(ădāmāh)의 흙(먼지 āphār)으로 만들어졌음을 밝힌다. 최초의 인간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흙으로 만들어졌다(창세 3, 19; 욥기 30, 19; 시편 22, 15; 90, 3; 103, 14 참조). 하지만 야훼계 저자의 창조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창세기 기록 훨씬 이전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주변국가에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예를 들면 에집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아메노피스 3세의 아들을 묘사하는 창조자-신인 크눔의 부조(浮彫)에 이와 같은 사고가 잘 나타나 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이런 창조이야기가 옛 바빌로니아 문헌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 우룩을 다스린 위대한 왕 길가메시에 관한 이야기인데 엔키두 창조 이야기가 이렇게 적혀있다: “여신은 물 속에 손을 담가 진흙을 움켜내어 광야에 뿌리니 거기에서 위대한 엔키두(Enkidu)가 태어나게 되었다”(p.19). 그 이외에도 이 책에는 창세기에 연결되는 부분이 많은데 차차 보겠다. 

하지만 창세기에서는 땅의 흙 그 자체가 인간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창조하셨다. 재료는 덧없는 흙이지만 만드시는 것은 하느님이 하셨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생명의 숨’(입김)을 불어넣으심으로써 산 존재, 즉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살아있는 인격이 된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전존재로서 하느님께 창조되었고, 그 존재와 생명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달려있는 것이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이라는 표현 안에는 인간의 품위와 아울러 인생의 덧없음도 함축되어 있다.

 

3) 인간을 위한 생활 환경(2, 8-15)

 

하느님은 인간을 빚어 만드시고 그를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마련하셔서 살게 하신다(2, 8 참조). 인간의 고향은 땅이다. 인간은 땅에서 태어나 땅의 열매를 먹고(2, 16; 3, 17 참조), 땅을 가꾼다(2, 15; 3, 23 참조).

에덴동산은 인간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며, 인간이 풍요와 쾌락을 마냥 즐기는 곳이 아니라 동산을 가꾸고 돌보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하느님이 인간을 살게 하시려고 만드신 에덴동산에 대해서 어떤 고정관념 내지 선입관을 갖고 있다. 이곳을 흔히 ‘파라다이스’라고 부른다. ‘파라다이스’는 원래 페르시아 말로서 그리스어로는 파라레이소스이다.

 

본래 이 말의 뜻은 ‘담으로 둘러싸인 과수원’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서구에서 ‘파라다이스觀’을 만들었다. 즉 일체의 좋은 것들로 넘치는 풍요와 평화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축복받은 어떤 곳이라는 관념이 널리 유포되었다. 하지만 하느님 자신이 창조인간을 데려다 놓으신 ‘에덴(이 있는) 동산’은 이런 것들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이것은 지리적으로 어디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땅이다. 그곳은 ‘즐거움의 땅’(에덴)이요 하느님과 인간이 아직 갈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이다. 이 동산은 동화의 나라도, 유토피아도, ‘축복받은 열락(悅樂)을 누리는 파라다이스도 아니다. 그 보다는 오히려 경작하고 돌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그런 땅이다.

에덴을 낙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낙원은 인간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마냥 즐기는 그런 곳이 아니다. 에덴이 낙원인 점은 이곳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연의 위치를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기쁨을 항상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낙원은 잘 먹고 잘 쓰는 풍요의 상태라기 보다는 삶의 근원을 찾고 그 위에서 인간의 본연의 사명을 다하는 생명과 사랑의 상태인 것이다.


4) 여인의 창조(2, 18-25)

 

야훼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음을 아셨다.

‘혼자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사막에서 종족으로부터 홀로 떨어져 살게 될 때 유목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독감과 위험을 반영하는 듯하다. 동시에 인간은 홀로 설 수 없고(人) 반드시 공동체를 이룰 상대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전도 4, 9-12에도 이런 사상을 반향하는 말들이 있다

 

혼자보다 둘이 더 낫다.

그들의 수고가 좋은 보상을 받겠기 때문이다.

넘어지면 일으켜 줄 사람이 있어 좋다.

외토리는 넘어져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어 보기에도 딱하다.

그뿐이랴. 혼자서는 몸을 녹일 길이 없지만

둘이 같이자면 서로 몸을 녹일 수 있다

혼자서 막지 못할 원수도

둘이서는 막을 수 있다.

 

그래서 고독한 인간에게 기쁨과 즐거움(도움)을 주기 위해서 협조자2)를 주셨다. 흙으로 짐승들을 만들어 데려다 주셨지만 그들은 아담의 협조자가 되지 못했고, 기쁨과 즐거움이 되지 못했다. 차라리 아담은 그들의 지배자였다(이름을 붙여준다는 것은 그들의 지배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담과 동등한 협조자를 만드시는데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몸의 일부인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창조하셨다(2, 21): 아담의 생명의 일부를 취하여 또 하나의 생명을 탄생하게 한다. 그런데 남자의 갈비뼈에서 여자를 창조했다는 것은 흙으로 사람을 창조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자 그대로 이해될 수 없는 내용이다.

 

인간은 깊은 잠에 빠진다(수술하기 전의 마취가 아니다). 이는 하느님의 놀라운 창조인간에게는 결코 관찰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로 남아있음을 뜻한다(15, 12; 1사무 26, 12).

‘갈빗대’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왜 하필이면 갈빗대일까? 여기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몇 가지 예를 보자

--아랍인들에게 있어 갈빗대는 절친한 친구를 나타내는 말이다.

--수메르어로 갈빗대란 말은 동시에 생명이란 뜻을 지닌다

--갈빗대가 우리 몸에서 폐와 염통(심장)을 둘러싸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여자는 늘 남자 곁에서 그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인생의 반려자라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창조사건에서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여자를 만든 재료가 갈빗대가 아님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여자 역시 인간으로서 진흙으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반자라는 의미가 아닐까? 지배인도 피지배인도 아닌 여자; 교부(크리소스토모)들은 에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탄생한 것처럼 십자가에서 창에 찔려 피와 물을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요한 19, 34)교회의 탄생을 보았다)

갈빗대의 의미는 그 다음 구절에 나오는 아담의 환호성과 관련지워 볼 때 더 분명히 드러난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나는 말은 지극한 기쁨의 탄성이고 자기와 동등한 반려자임을 인식한 표현이다.

이제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구별되고, 여자와 남자는 돕는 이로서 서로 보충하여 온전한 인간상을 이루게 된다. 여자가 남자의 소유물로 취급받던 시대에 저자는 남녀평등이 창조질서 자체에 근거하고 있는데 죄악이 그 질서를 파괴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마침내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게 되었다’(2, 24). 여기서 가톨릭 결혼관을 이끌어낸다(마태 19, 4-6).

 

고대 이스라엘 관습이나 우리나라에서도 결혼을 해서 부모롤 떠나는 쪽은 여자 쪽인데 아마 모권중심 문화의 잔재인 것 같다. 그러나 그 보다는 남자와 여자는 왜 서로 한 몸이 되고자 하는가에 대한 원인 설명으로 보인다.

죽음보다도, 친부모의 결속력보다 더 강한 이 남녀의 사랑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남자와 여자는 본래 한 몸이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돕는 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서로 결합하고 싶은 충동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궁극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구원의 동반자로서 서로를 보완하고 성숙해가며 완성을 지향한다.

그들이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는 구절은 창조와 타락을 잇는 고리 역할을 한다. 부끄러움은 우리 삶의 뿌리가 나눠져 있는 것이고 이를 감추려는 것이다. 부끄러움이 없는 최초의 상태는 하느님과 타인에 대하여 전적으로 신뢰심에 찬 개방성과 순결함, 사랑의 일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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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마리아 오경, 시리아 사본에는 “하늘과 땅”으로 되어있다

2) 공동번역에는 “짝”, 새 번역에는 “협력자”로 되어 있다.

3) “알 몸”과 “부끄러워함”이라는 낱말은 성서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나약성, 무보호, 패배 등을 나타낸다(아모 2,16; 미가 1,8; 시편 6,11등). 남자와 여자는 상호간의 나약성을 악용하는 일없이 서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임승필 편역, 창세기,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1992, p.40, 주 32.

출처: 부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손삼석''신부님의 창세기 강의록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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