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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성모님에 대하여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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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08 조회수581 추천수0 신고
무류성 ◆   
한자 無謬性
라틴어 infallibitas
출처 : [가톨릭대사전]

   무류성은 ‘무류지권’이라는 말로 잘못 사용되고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교회와 교도권의 무류성’이다. 또한 이 말은 성서의 무오성(無誤性)과도 전혀 다른 개념의 말이다.

   1. 전체교회의 무류성 : 교회 전체가 구원진리믿음에 있어서 그르칠 수 없다는 것은 성서에 의하여 명백하다. 주께서 세우실 교회를 지옥문이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하셨고(마태 16:18), 주께서 세상 끝날까지 교회와 함께 계시겠고(마태 28:20), 진리성령영원히 교회를 지도하시겠다(요한 14:16-17)는 약속은, 만일 진리의 전달자인 교회전체가 오류에 떨어질 수 있다면 무의미한 약속이다. “하느님의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이고 진리의 기둥이며 터전이라”(1디모 3:15)고 믿기 때문에 교회헌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령의 도유를 받는 신자들의 전체는 믿음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없으니 주교로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가 신앙도덕에 관하여 같은 견해를 표시할 때에 백성 전체의 초자연적 신앙감(信仰感)에서 이 특성이 드러난다”(교회헌장 12).

   2. 주교단 전체의 무류성 : 교회 전체의 무류성은 교회의 신앙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주교단 전체에도 나타난다. 주께서 사도들의 말을 듣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사람이라 하셨고(루가 10:16, 마태 10:40, 요한 13:20), 바울로는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이미 전한 기쁜 소식과는 다른 것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선언하였다. 아타나시오는 니체아 공의회를 통하여 선언된 주님의 말씀은 영구히 남으리라 하였고(Ep. ad Afros, RJ 792), 교회헌장은 “각 주교들이 무류의 특권을 누리는 것은 아니지만, 온 세계에 산재하면서 서로 일치하고 또 베드로의 후계자와 일치하여 신앙도덕에 관한 사정을 유권적으로 가르칠 때에 결정적인 한 가지 판단에 의견이 일치하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교리를 오류없이 가르치는 것이다”(교회헌장 25)하였다. 주교단의 장엄 교도권 행사인 세계 의 무류성은 명백하다. “주교들이 공의회에 모여서 세계 교회를 위하여 신앙도덕에 관하여 가르치고 판단할 때에 무류성은 더욱 명백한 것이니, 이 결정 사항은 신앙순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교회헌장 25).

   3. 교황의 특별 교도권의 무류성 교황주교단의 단장으로서 다른 주교들과 함께 장엄 교도권을 행사하지만(공의회의 경우 - 교회의 최고 목자의 자격으로 단독적으로 장엄 교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런 경우를 교좌선언(敎座宣言, ex cathedra)이라고 한다. 교황이 교좌에서 신앙도덕에 관한 문제에 최종 단안을 내릴 때에는 무류한 결정이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선언은 극히 희소한 일이지만 근세에 몇 번 있었다. 교황의 단독 선언이 무류하기 위하여 반드시 다음 조건들이 채워져야 한다. ① 전체 교회의 최고 목자로서 공식으로 선언한다. 따라서 교황도 개인 자격으로나 로마 교구의 교구장 자격으로 선언한 것은 무류하다고 보장할 수 없다. ② 어떤 진리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의사를 밝혀야 한다. 따라서 교황의 통상적인 설교, 지도, 권유, 해설, 반박, 경고 등이 다 무류하지는 않다. 신앙이나 도덕의 문제에 국한된다. 따라서 교황이 아무리 강력하게 주장할지라도 과학, 예술, 인문, 정치, 경제, 사회 등에 관한 주장이라면 무류할 수 없는 것이다.

   4. 무류성에 대한 태도 : 장엄 교도권정의한 것은 신자들의 동의여부와는 상관없이 결정 자체로서(ex sese) 무류한 것이지만, 교도권신자 전체의 신앙감과 유리되어 자의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교도권자들은 이런 중대한 결정에 앞서서 충실한 조사, 연구, 협의, 기도를 거칠 중대한 도덕적 의무를 지고 있다. 교도권신앙 진리의 최고 규범이 아니고 더 높은 규범인 성경성전의 규제를 받는 규범(norma normata)이다. 그러므로 장엄 교도권이 선언한 내용을 해석할 때에는 엄밀하게(stricte) 그리고 축소하여(restrictive) 해석하여야 한다. (鄭夏權)

   [참고문헌] B.D. Dupuy, L''infaillibilite de I''Eglise, in Catholicisme, t. 5, col. 1549-1572 / G. Dejaifve, Pape et eveque au 1er concile du Vatican, 1961; L''infaillibilite de I''Eglise, 1963 / 정하권, 교회론 II, 125-133(문헌목록 참조).

공의회


▶성인공경 ( 출처 : 가톨릭대사전)
한자 [聖人恭敬]    라틴어 [cultus Sanctorum]    영어 [veneration of Saints]   
 

 성인들에 대한 공경은 전승(傳承)을 통하여 이어져 온 교회 영성(靈性)의 한 요소이며 한때는 신자들의 전례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가톨릭 신심(信心)의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교회는 트렌트 공의회에서 성인공경에 관하여 종교개혁자들에게 설명하는 동시에 가톨릭 신자들에게 그 남용이나 지나침이 없도록 당부하였다(Denz. 984-988). 공의회는 성인의 전구(轉求)가 하느님의 말씀에 반대되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한 분의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1디모 2:5)의 영예를 해치는 것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배격하고, 우리의 주님, 홀로 우리의 구원자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성인들을 불러 도움을 구하는 것은 마땅하고 유익한 일이라 하였다(Denz. 984, 989).

   성서에는 성인공경에 대하여 명백히 말씀하신 것이 없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의 구원 성업(聖業) 내에서 발휘하는 중개자의 기능이 나타나 있는데 대사제, 천사들, 과거의 위대한 인물 등이 중개자에 속하였다. 마카베오 시대에 이르자 피로써 증언을 한 순교자들이 생존자를 위하여 전구한다고 이해하였다(2마카 15:12-16, 7:37). 신약성서에서 이 중개자의 기능은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었고 그의 십자가상 죽음과 종말에 있을 재림 때 전면에 나타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다른 모든 중개자들은 빛을 잃는다. 이밖에 성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느님의 백성과 이의 모든 구성원들은 성성(聖性)을 본질적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 백성의 구성원들은 성인(聖人)들이라 불린다(로마 1:7, 15:25, 1고린 1:2, 16:1). 성서는 또한 교회의 개개 구성원들이 구원에 있어서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구성원들은 전체의 선익을 위하여 성령의 다양한 선물을 받았고, 그 선물의 능력을 서로에게 이익되게 발휘함으로써 공동체가 건설된다는 의식을 가진 것이다(1고린 12 참조). 이 하느님의 백성은 구세사의 과정에서 '증인들의 구름'(히브 12:1)과 결합하나, 이 증인들의 구름은 하느님 백성의 마음속에 익명의 집합체로 남아 있지 않고 사도들과 순교자 개인별로 기억되었다. 이들을 존경하고 전구를 청한 사례가 문서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2세기 중엽이다(폴리카르포의 순교록 XVII, 3). 박해가 끝나자 이들 증인들의 구름은 증거자들로 인하여 더욱 많아졌다. 이들에 대한 존경의 성격이 교회 내에서 문제가 되자 제2차 니체아 공의회는 하느님에 대한 존경을 흠숭지례(欽崇之禮, adoratio)라 하고 성인들에 대한 존경을 공경지례(恭敬之禮, veneratio)라 하여 양자를 구별하였다. 이 구별은 중세기를 통하여 신학의 규범이 되었다.

   조직신학에서 성인공경 문제가 차지하는 위치는 교회론에 속한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주제를 교회헌장(제7장 지상 여정 교회의 종말적 성격과 천상 교회와의 일치)에서 다루고 있다. 성인공경이란 교회의 종말론적 차원에 대한 부단한 인식이다. "세상의 종말은 이미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며(1고린 10:11) 세상의 쇄신도 이미 결정적으로 현세에서 어느 정도 미리 실현되고 있는 것이니"(교회헌장 48) 참된 종말론적 성성이 이미 교회내에 존재하고 있다. 이 성성은 하느님을 직접 뵙고 있는 천상 교회의 신자들과 연옥에서 단련을 받고 있는 신자들과 지상 여정에 있는 신자들에게 모두 존재한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완성에로 초대하는 하나의 부르심에 바탕을 둔 교회의 단일성과 하나의 세례는 주님과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이를 포용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인들을 인정함은 곧 교회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며 지상에서 이룩한 하느님 은총의 승리를 찬양하는 셈이다. 이 인정과 찬양이 교회 내에서 이해되고 세상에 알려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익명의 집단으로만 언급될 수 없고 이들 증인들을 호칭하여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하면 성인공경은 절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신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지는 흠숭을 약화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더욱 완전케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안에 한 가정을 형성한 우리 모두가(히브 3:6) 서로 사랑하며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聖三)을 함께 찬미함으로써 서로 교류할 때에 교회의 깊은 내적 생명을 다하는 것이며 완성된 영광의 전례를 미리 맛보고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인공경은 우리의 행동적 사랑의 깊이에 있으며 이런 사랑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교회의 선익을 위하여 성인들의 생활에서 모범을 찾고 통공에서 일치를 찾으며 전구에서 도움을 찾는다(교회헌장 51).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하여 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흠숭하면서 성인들과 아울러 공경하는 이유는 이밖에도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라는 계시진리와, 현양받으신 주님의 인성(人性)이 구원에 있어서 발휘하는 영원한 기능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더욱 명확히 밝혀질 수 있다.

   [참고문헌] Ernst Niermann, Veneration of Saints, Sacramentum Mundi, Burns & Oates, 1970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문헌 중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 1969.




   ‘흠숭하다’라는 말은 ‘공경하다’와 같은 뜻이나, 오직 ‘흠숭’이라는 용어는 하느님한테만 쓰인다. 이리하여 ‘흠숭지례’라고 할 때는 ‘천주에게만 드리는 최고의 공경’을 지칭한다. 한국 가톨릭 초기시대부터 사용해 온 이 말을 좀 더 깊이 고찰하면, ‘공경하다’란 ≪한불자전≫에 따르면, ① 존경하다, 숭배하다, ② 예배하다, 경배(敬拜)하다, ③ 열렬히 사랑하다의 뜻이다. 경배 또는 예배는 영어의 ‘adoration’으로 이는 경신덕(敬神德)의 행위이며, 이 행위에 의해서 하느님만이 최고의 영예를 받기에 알맞은 것으로서 인정받는다. 경배는 지성(知性)과 의지(意志)가 동시에 행하는 행위인 것이며, 적절한 기도, 찬미의 자세, 숭경(崇敬)과 희생으로써 표현된다.

   그런데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흠숭지례’ 다음 가는 용어로 ‘상경지례’(上敬之禮), ‘공경지례’(恭敬之禮)라는 말을 가려서 쓰고 있다. 전자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공경’을 가리킬 때 사용하며, 후자는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을 지칭할 경우에 쓴다.

 





   하느님께만 배타적으로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예배행위. 하느님은 무한히 완전하시고 인간에 대하여 최고의 지배권을 가지며 인간존재는 오로지 창조주 하느님께 의존하고 있으므로 하느님 홀로 최고의 영예를 받아 마땅한 것이다. 흠숭은 기도와 찬미, 희생봉헌 등을 표현하는 몸과 마음의 전인적인 행위로 나타난다. 흠숭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성인전구(聖人轉求)의 효력을 선포한 제2차 니체아 공의회가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恭敬, veneratio)과 하느님그리스도께 드리는 흠숭(adoratio)을 구별하여 규정한 적이 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혈육을 취하신 말씀인 성자성부와 성신과 함께 받으시는” 예배를 흠숭이라 하였다(교회헌장 66). (⇒) 예배

바티칸 공의회




▶예배 ( 출처 : 가톨릭대사전)
한자 [禮拜]    라틴어 [adoratio]    영어 [worship]   
 

 앵글로색슨계 어족에서 ‘worship’은 ‘worth-ship’에서 유래한 말로 ‘worth’는 ‘가치’ 또는 ‘명예’를 뜻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원래 ‘가치있는 상태’를 의미한 말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로 예배는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신앙인의 제사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신을 향한 인간의 존경과 경의의 표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근본적으로 종교 그 자체이며 종교의 외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1. 예배의 대상 : 예배는 초월적 실재(Transcendent Reality)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인간이 궁극적으로 이 실재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전제 하에 행해지게 된다. 그러므로 초월적 실재가 예배의 유일한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신성(the Holy)은 강생(embodiment)를 통해서만 인간에의 접근이 가능한데 이는 우주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신성의 잠재적 표현이며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신비체로 될 수 있고 하나로 합쳐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예배의 행위와 태도 : 예배는 행위인 동시에 태도이며 외적인 것인 동시에 내적인 것이다. 태도로서의 예배는 신성의 존재가 인식되고 신성의 구현을 경험하는 의식상태이다. 행위로서의 예배는 신성과 만나고자 하는 시도이며 신성의 구현을 기념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태도와 행위는 상호관련을 맺고 있다. 예배에 임하는 태도는 행위를 고무하고 촉진시키는 한편 경건하고 헌신적인 행위는 예배에 적절한 태도를 낳게 한다. 이러한 행위들은 예배자의 의식 속에서 신성이 구현되도록 도와주며 이를 통해서 신자들의 상대적인 반응을 유도해 내게 된다.

   3. 예배의 형태 : 종교는 인간의 실존상황의 한 차원이기 때문에 예배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실존상황(existential situation)은 시대적 상항과 장소, 문화적 배경, 경제 형태, 가족과 친족간의 상호적 형태, 정치 조직 등 여러 요인에 따라 크게 변형되었다. 예를 들어 도시의 예배형태는 문명인의 예배형태와 다르며 모계사회의 예배형태는 부계사회의 예배형태와 다르다. 그밖에 연령, 성별, 사회적 지위 등에 따라 예배의 형태가 달라졌으며 출생, 결혼, 죽음 등 인간의 존재상황에 중요한 사건들에 따라 다른 예배형태가 나타난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쳐 예배 의식의 일정한 기본 구조가 형성되어 왔다.

   4. 예배의 시기와 장소 : 예배가 존재함은 예배의 장소와 시간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초월적 실재가 인간과 만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떤 특정한 장소의 신비한 성격을 의식하고 있는데, 그 곳에서 신성은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신자는 예배를 통해 신성과 만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그곳은 주변 지역과 뚜렷이 구별되며 그곳의 문지방을 넘어서면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숲이나 강, 산, 동굴, 샘 같은 특정한 예배의 장소가 존재해 왔으며 신의 현현(顯現)이나 계시에 의해 예배의 장소가 정해지는 수가 있고, 어떤 장소에 특이한 사건이 일어날 경우 그것이 하느님이 보낸 표시나 신성의 표시로 해석될 경우 그곳이 예배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예배가 행해지는 그 밖의 장소로는 인간이 임의로 만든 곳이 있는데, 성인들의 무덤이나 교회 등이 이에 해당된다. 예배 장소의 신비한 성격은 인간이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같은 의식을 되풀이함으로써 그 장소를 신성화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 신성한 장소는 신자에게 있어서 모태와 같은 것이며 세상의 만물이 기원하는 중심이 되는 곳이다. 이는 또한 혼돈(chaos)과 반대되는 의미에 있어서의 우주이다.

   5. 예배의 주관자 : 집단적인 예배를 드릴 경우 예배의 일반적이 형태는 예배드리는 집단 중의 한 사람 또는 소수가 그 의식을 주관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주관자들의 특권이 되고 있다. 이들의 직무는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위한 중재자로서 신성과 접촉(communicate)하는 것이며 신의 대리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들은 또한 모든 의식의 시효(prescription)의 올바른 이행과 전통적인 축일의 준수를 관장하기도 한다. 신성과 접촉하는 경우에 사제는 금기사항(taboo)을 철저히 지켜야 하며, 스스로를 깨끗이 해야 하는데 이에는 정결함과 동정 등 몸가짐에 있어서의 엄격함이 요구된다.

   [참고문헌] J.G. Frazer, The Worship of Nature, London 1926 / V.P. Gronbech, Essay on Ritual Drama, London 1931 / S.H. Hooke, Myth and Ritual, Oxford 1933 / K. Kerenyi, Vom Wesen des Festes, Paideuma 1938 / A. Bertholet, Der Sinn des Kultischen Opfers, AbhBerlAk, 1942 / S.O. Mowinckel, Religion und Kultus, Gottingen 1953 / A.S. Herbert, Worship in Ancient Israel, Richmond 1959 / A.E. Jensen, Myth and Cult among Primitive Peoples, Chicago 1963 / H. Hubert, Eng. Sacrifice; Its Nature and Function, Chicago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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