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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사도행전 이야기67-71: 에필로그 - 사도행전에 비춰본 바오로의 생애와 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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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6-08 조회수8,582 추천수0

[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67) 에필로그 <2> 사도행전에 비춰본 바오로의 생애와 서간 ①


박해자 사울, 회심 후 이방인의 사도로 거듭나다

 

 

- 바오로 사도의 생애는 다마스쿠스 근처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그 전과 후가 완전히 달라진다. 사진은 예루살렘 옛 도시 북쪽의 다마스쿠스 문. 이 문을 통해 다마스쿠스로 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CNS 자료 사진]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바오로 사도의 생애와 활동을 정리하면서 그가 쓴 서간들을 살펴보는 것이 이 에필로그의 목적입니다. 하지만 그 서간들 자체의 내용을 깊이 들여다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바오로 사도가 언제 어떤 상태에서 서간들을 썼는지 그의 활동과 서간들과의 관계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교회 박해에 나서던 유다인 사울

 

사도행전에 바오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스테파노의 순교 때였습니다. 최고 의회에서 스테파노의 설교를 들으면서 화가 치밀어오른 사람들은 그를 성 밖으로 몰아냅니다. 그러고는 그에게 돌을 던지면서 겉옷을 벗어 한 젊은이의 발에 두었는데 그가 바로 바오로였습니다. 그때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지요.(7,58)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먼저 이름에 대해 살펴보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오로의 첫 번째 선교 여행 때인 13장 4절까지는 그의 이름이 ‘사울’로 나옵니다. 그렇지만 그다음 13장 9절에는 “그때에 바오로라고도 하는 사울이…”라고 ‘바오로’라는 이름이 처음 언급되고, 그 이후에는 계속 ‘바오로’로 나옵니다.

 

왜 이름이 바뀌었을까요? 이름이 사울에서 바오로로 바뀐 것은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한 후 그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과는 다릅니다. 단지 ‘사울’은 히브리어-아람어 표기이고 바오로는 그리스식 표기일 따름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합니다. 그러면 왜 13장에 오면 이름이 바뀌게 될까요?

 

바오로가 바르나바와 함께 1차 선교 여행을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이 지중해의 키프로스 섬이었는데, 그 섬의 총독 이름이 세르기우스 바오로였습니다.(13,7) 키프로스는 히브리어-아람어를 사용하는 팔레스티나와 달리 그리스-로마 문화권이었고 그래서 이때부터 사도행전 저자는 사울이라는 이름 대신에 바오로라는 그리스식 표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사울 또는 바오로라는 이 젊은이는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박해에 앞장섰습니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8,3) 그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을까요?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오로는 로마 제국 속주의 하나로 오늘날 터키 남부 지방인 킬리키아의 수도 타르수스 출신의 유다인입니다(21,39). 혈육은 유다인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었습니다.(22.28) 이 말은 바오로 집안은 부모 또는 그 이전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오로는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당시 예루살렘의 뛰어난 랍비로 “온 백성에게 존경받는”(5,34)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22,3) 바오로가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따르면 그는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바리사이였습니다.(필리 3,5) 요컨대 그는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는, 종교적으로 충실한 골수 바리사이 유다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해서는 부정적이었음이 분명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주장, 더욱이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주장이 바오로에게는 얼토당토않게 들렸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 역시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지만, 그들에게 부활은 종말에 가서야 있을 먼 미래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역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살아났다면서 예루살렘 최고 의회에서 회개를 촉구하는 스테파노의 말은 바오로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젊음의 혈기가 왕성했던 그는 스테파노의 죽음을 당연하다고 여겼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교회 박해에 나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바오로의 나이는 어느 정도나 됐을까요? 「주석 성경」에 실린 ‘성경 연대표’에 따르면 스테파노가 순교하고 교회 박해가 시작된 해는 기원후 36년 겨울에서 37년(?) 사이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바오로는 기원후 5~10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지난 2008년에 바오로 사도 탄생 2000주년을 기념하는 바오로 희년을 지냈었지요. 이를 고려한다면, 바오로가 교회 박해에 나섰을 때는 그의 나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쯤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마스쿠스에서 겪은 회심 사건

 

사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신자들을 잡아들이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았는지 대사제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서 모조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올 작정이었습니다.(9,1-2) 오늘날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는 당시에도 그리스-로마 문화가 융성한 대도시였습니다. 유다인들도 많이 살고 있었고, 당연히 회당도 여러 개가 있었겠지요. 그래서 바오로는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을 색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아직 거의 전부가 유다인이었기에 회당을 통하면 ‘새로운 길’을 따르는 유다인들을 쉽사리 찾으리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마스쿠스 근처에 이르렀을 때 바오로는 놀라운 일을 경험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고 바오로는 땅에 엎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고 하면서 바오로가 할 일을 일러줍니다. 바오로는 땅에서 일어났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서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다마스쿠스로 들어갑니다.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한 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지내다가 하나니아스를 만나 눈을 뜨게 되고 세례를 받은 후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립니다. 바오로의 이 회심 사건을 사도행전은 세 번에 걸쳐 소개합니다.(9,1-19; 22,4-21; 26,9-19)

 

바오로는 다마스쿠스에 있는 신자들과 며칠을 함께 지내다가 곧바로 다마스쿠스의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며 활동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이름을 받드는 이들을 박해하고 그들을 잡아가려고 다마스쿠스까지 왔다고 알려진 사람이 이제는 반대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증언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당혹스럽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9,20-22)

 

그렇게 “꽤 긴 기간이 지나자” 유다인들은 바오로를 없애려고 공모했고 바오로는 제자들의 도움으로 다마스쿠스를 탈출해 예루살렘에 갔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합니다.(9,23-26) 사도행전의 이 설명대로라면 바오로는 계속 다마스쿠스에서 지내다가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심해지면서 탈출해서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바오로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는 이와 다른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갈라 1,16-17). 이 서간에 따르면 바오로가 예루살렘에 간 것은 “삼 년 뒤”(갈라 1,18)였습니다. 바오로는 왜 아라비아로 갔을까요? 그곳에서는 무엇을 하며 얼마나 지냈을까요? “삼 년 뒤”란 구체적으로 언제부터를 가리킬까요? 다음 호에 계속 살펴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6월 7일, 이창훈(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68) 에필로그 <3> 사도행전에 비춰본 바오로의 생애와 서간 ②


박해의 시련에도 이어나간 믿음의 여정

 

 

바오로 사도의 1차 선교 여행 때 거쳐 간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유적. 이 도시는 로마 속주 갈라티아의 남쪽에 있는 주요 도시다.

 

 

다마스쿠스 사건, 곧 회심 이후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다마스쿠스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탈출해 예루살렘에 갔다고 전하지만(9,20-26), 갈라티아서에서는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돌아갔고 3년 후에 예루살렘에 갔다고 전합니다.(갈라 1,16-18) 지난 호 끝 부분에서 제기한 몇 가지 물음에 대해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아라비아에서 삶을 숙고하다

 

바오로는 왜 아라비아로 갔을까요? 이방인의 사도로서 선교 활동을 하러 갔다는 설명과 자신의 회심 사건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리하기 위해서 갔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설명에 더 끌립니다.

 

바오로가 말하는 아라비아는 나바테아 왕국을 가리킨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당시 나바테아 왕국은 요르단 강 동쪽과 남쪽으로는 시나이 반도까지 차지하고 있었고, 수도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잘 알려진 페트라였습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유다인들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그의 1~3차 선교 여행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때도 일차적으로는 유다인 회당을 찾았습니다. 따라서 회심 이후에 선교하러 나바테아 왕국에 갔다는 것은 설득력이 좀 약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것처럼 회심 사건 후 바오로는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선포 활동을 시작했고, 사람들은 바오로를 이상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특히 유다인들은 바오로의 선포 활동에 당혹함을 금치 못했을 것이고 시비를 걸고 박해를 가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오로는 위험도 피하고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 위해 아라비아로 건너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요.

 

바오로가 아라비아의 어디에서,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라비아 생활을 마친 그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밝혔듯이 다마스쿠스로 돌아와 선교 활동을 하다가 박해를 피해 다마스쿠스를 탈출해서 예루살렘에 갑니다.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 가다

 

바오로가 회심 이후 예루살렘에 처음 올라간 것은 언제였을까요? 그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그러고 나서 삼 년 후”(갈라 1,18)에 예루살렘에 갔다고 전합니다. 이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아라비아에서 다마스쿠스로 돌아간 지 3년 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라는 표현을 ‘회심하고 나서’라고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 설명을 따르면 바오로는 회심하고 3년 후 처음 예루살렘에 갔다고 하겠습니다.

 

바오로는 갈라티아서에서 “그러고 나서 십사 년 뒤에 나는 바르나바와 함께 티토도 데리고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갔습니다”라고 씁니다.(갈라 2,1) 그리고 이 예루살렘 방문 때 예루살렘 사도 회의가 열렸다는 데에 성경학자들은 의견이 일치합니다. 그런데 “십사 년 뒤”라는 표현을 두고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첫 번째로 예루살렘에 간 지 14년 뒤일 수도 있고, 첫 예루살렘 방문에 이어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을 거쳐 간 후(갈라 1,21) 14년 뒤일 수도 있습니다. 또 회심 사건 14년 뒤일 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연대를 정확히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일차적 목적도 아닙니다만, 여기서는 ‘회심 후 3년’, ‘회심 후 14년’의 가설을 받아들여 회심 이후 바오로의 행적 또는 활동을 간단히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바오로는 ‘3년’ ‘14년’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기간 역시 정확히 만 14년이라기보다는 대략적인 햇수를 가리킨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마스쿠스 사건 후 바오로는 다마스쿠스에서 한동안 지내다가 아라비아 곧 나바테아 왕국으로 건너갑니다. 그곳에서 삶의 방향을 정리하고 다마스쿠스로 돌아와 선교 활동을 하다가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계속되자 탈출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를 만나고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죽이려고 하자, 바오로는 형제들의 도움으로 카이사리아를 거쳐 고향 타르수스로 갑니다.

 

그런데 갈라티아서에 따르면, 바오로는 카이사리아에서 바로 타르수스로 간 것이 아니라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갑니다.(갈라 1.21) 시리아는 다마스쿠스와 안티오키아 같은 큰 도시들이 있는 지방입니다. 그리고 시리아 북쪽과 일부를 경계하고 있는 지방이 바로 오늘날 터키의 남부 지방인 킬리키아입니다. 타르수스는 이 킬리키아 지방의 수도였지요. 바오로는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을 거치면서 선교 활동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안티오키아에서 복음을 전하다

 

그러는 사이에 안티오키아에 복음이 전해지고 안티오키아의 신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안티오키아 교회에 관한 소문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에 내려보내고, 안티오키아에 내려온 바르나바는 바오로가 필요하다고 보고 타르수스로 가서 바오로를 데려옵니다. 그리고 바오로는 만 1년 동안 안티오키아 교회 신자들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합니다.(사도 11,19-26)

 

그즈음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다 지방에 큰 기근이 들고 안티오키아 교회는 구호 헌금을 모아 바르나바와 바오로 편에 예루살렘 원로들에게 보냅니다.(사도 11,27-30) 바오로에게는 이 방문이 회심 후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이 두 번째 방문에서 바오로가 첫 번째 방문과 달리 베드로나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다는 언급은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이 전하는 것처럼 야고보가 헤로데 임금(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에 의해 순교하고 베드로도 감옥에 갇혔다가 빠져나와 어디론가 피신한 후여서 만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를 죽인 헤로데 아그리파스가 44년 9월에 죽었다는 기록을 감안한다면, 바오로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대략 44년을 전후한 시기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차 선교 여행을 마치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예루살렘 방문을 마치고 요한 마르코를 데리고 안티오키아로 내려갔다가 얼마 후 함께 첫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이 1차 선교 여행은 키프로스 섬의 살라미스와 파포스를 거쳐 소아시아(오늘날의 터키) 남부인 팜필리아의 페르게-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이코니온-리스트라-데르베까지 갔다가 되돌아서 안티오키아로 돌아오는 여정이었습니다.(사도 13,3─14,27) 「주석 성경」의 ‘연대표’에 따르면 바오로의 1차 선교 여행은 45~49년 사이에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1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오래 머물렀다고 하는데(사도 14,28),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에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새로운 문제가 불거져 나옵니다. 유다인이 아닌 다른 민족 출신들, 곧 그리스계의 신자들이 할례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해 유다에서 내려온 신자들이 문제로 삼은 것입니다.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티오키아 교회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비롯한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파견합니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에서는 사도 회의가 소집되고 사도 회의는 다른 민족 출신들에게는 율법 준수에 대한 과도한 부담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합니다.(사도 15,1-35) 「주석 성경」 ‘연대표’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가 48~49년에 열렸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결정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복음 선포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바오로는 더욱 담대하게 다른 민족들 곧 이방인들에게 복음 선포하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바오로는 모세의 전통에 충실한 열성적인 유다인들에게 더욱 심한 미움과 박해의 대상이 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6월 14일, 이창훈(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69) 에필로그 <4> 사도행전에 비춰본 바오로의 생애와 서간 ③


교회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 제시한 ‘바오로의 편지’

 

 

바오로의 2차 선교 여행 경로. 출처=「성경 역사 지도」(분도출판사)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결정을 가지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와 지내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나기로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첫 번째 선교 여행 때와 달리 서로 갈라져서 여행을 떠납니다. 바오로가 신약성경 바오로 서간으로 전해지는 편지들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두 번째 선교 여행 때부터입니다.

 

 

바오로의 2차 선교 여행

 

「주석 성경」 ‘연대표’에 따르면, 바오로의 2차 선교 여행은 50~52년까지 약 3년 동안에 이뤄집니다. 바르나바가 마르코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떠나자 바오로는 실라스를 데리고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두루 다니며 그곳 교회들을 굳건하게” 만듭니다.(15,40-41) 이 지역들은 바오로가 회심 후 처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유다인들의 박해를 피해 고향 타르수스로 돌아갈 때 거쳐 가면서 선교 활동을 했던 지역이기도 합니다.(갈라 1,21 참조)

 

이렇게 내륙을 거쳐 올라간 바오로는 데르베를 거쳐 리스트라에 당도합니다. 이 고을들은 바오로가 1차 선교 여행 때에 선교한 곳들이었습니다. 리스트라에서 티모테오를 제자로 삼은 바오로는 계속해서 1차 선교 여행 때 방문했던 도시들인 이코니온과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를 거쳐 서쪽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서쪽으로 계속 간다면 에페소가 주도(州都)인 아시아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아 바오로 일행은 북쪽으로 올라가 갈라티아 북부 지방(오늘날 터키 수도 앙카라 부근)까지 갔다가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프리기아를 관통해 계속 나아갑니다. 아시아 속주의 북쪽에 있는 미시아 지방에 이르러서는 북쪽 비티니아로 가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아 미시아를 가로질러 에게 해 연안 도시인 트로아스로 내려옵니다.(16,1-8)

 

트로아스에서 지내던 어느 날 밤 바오로는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달라는 환시를 보고는 트로아스를 떠나 사모트라케 섬을 거쳐 유럽 본토인 마케도니아의 네아폴리스에 도착해 그곳에서 10여㎞ 떨어진 필리피로 갑니다. 바오로는 이곳에서 티아티라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인 리디아에게 세례를 주는 등 선교 활동을 펼치다가 감옥살이를 하고 감옥을 지키던 간수와 그 가족을 개종시킨 후 필리피 행정관들의 요청으로 필리피를 떠납니다.(16,11-40) 필리피는 바오로가 유럽 대륙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세운 곳입니다. 또 필리피 교회는 이후 바오로의 선교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후원합니다.

 

필리피를 떠난 바오로는 암피폴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마케도니아 최대의 항구도시이며 마케도니아 주도(州都)인 테살로니카에 머무르면서 선교 활동을 계속합니다. 하지만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에게 거센 반발을 사고 위험에 처하자 그곳을 떠나 베로이아로 갑니다.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이 베로이아까지 쫓아와 군중을 선동해 자극하는 바람에 바오로는 그동안 함께했던 실라스와 티모테오를 남겨 두고 먼저 아테네로 옵니다.(17,1-15)

 

아테네에서 실라스와 티모테오를 기다리면서 바오로는 유다인 회당에서, 또 광장에서 토론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나중에는 아레오파고스에서 아테네 시민들을 대상을 열띤 선교를 합니다. 하지만 바오로는 아테네에서 선교 활동의 별다른 결실을 보지 못합니다. 실라스와 티모테오와 내려온 후 바오로는 티모테오를 테살로니카 교회로 보내고(1테살 3,1-5 참조) 자신은 실라스와 코린토로 건너갑니다.

 

 

테살로니카 교회에 보낸 애정과 권고

 

코린토에서 바오로는 폰투스 출신으로 천막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하는 유다계 그리스도 신자들인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를 만납니다. 생업이 같아서 바오로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안식일이면 회당에서 토론하며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던 차에 마케도니아에 갔던 티모테오가 코린토로 내려와 바오로에게 테살로니카 교회에 관한 소식을 전합니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바오로를 그리워하며 바오로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는데 이 편지가 바로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입니다. 신약성경 27권 가운데서 바오로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서간 가운데 바오로의 친서가 몇 권이 되는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립니다만, 적어도 7권은 바오로가 직접 쓴 편지라는 데는 견해가 일치합니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은 그 가운데서 첫 번째 편지로 50~51년쯤에 쓴 것으로 추정합니다. 서간에는 자신이 직접 세웠지만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박해를 피해 떠나야 했던 테살로니카 교회 신자들에 대한 바오로의 염려와 애정, 신자로서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한 권고와 당부 등이 생생히 담겨 있습니다.

 

티모테오가 마케도니아에서 코린토로 내려온 이후 바오로는 더욱 복음 선포 활동에 매진합니다. 바오로는 1년 6개월 동안 코린토에서 지내면서 교회를 세운 후에 코린토를 떠나 아시아의 주도(州都) 에페소로 갑니다. 그러나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코린토를 함께 떠난 프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를 에페소에 남겨 둔 채 바오로는 카이사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곳 교회에 인사한 후 안티오키아로 내려옵니다.(18,5-22) 이로써 바오로는 2차 선교 여행을 마칩니다.

 

 

분열하는 코린토 교회에 당부

 

안티오키아에서 얼마를 지낸 바오로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세 차례의 선교 여행 중 가장 긴 3차 선교 여행을 시작한 것입니다. 바오로의 3차 선교 여행은 53~58년 사이에 이루어집니다. 바오로는 내륙을 거쳐 북쪽으로 올라가 소아시아의 갈라티아와 프리기아를 차례로 거쳐 가면서 자신이 앞선 두 차례의 선교 여행 때에 세운 교회들을 찾아 신자들을 격려하고는 소아시아의 서쪽 끝에 있는 에페소에 도착해 그곳에서 27개월을 지내며 선교 활동을 펼칩니다.

 

바오로가 에페소에 있을 때 바다 건너 코린토에서 걱정스러운 소문이 들려옵니다. 코린토 교회 신자들이 ‘바오로 편’이니 ‘아폴로 편’이니 ‘케파 편’이니 심지어 ‘그리스도 편’이니 하면서 분열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불륜, 근친상간, 신자들 간의 법정 고발, 성찬례 모임에서의 불미스러운 일,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그릇된 이해 등 신자 생활과 교리에 관한 좋지 못한 이야기들도 함께 전해 듣습니다.

 

자신이 18개월이라는 꽤 오랜 기간을 보내며 힘들여 세운 코린토 교회의 이런 사정을 접한 바오로는 자신의 동료이자 협력자인 티모테오를 코린토로 파견하면서 그편에 코린토 상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신자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냅니다. 이것이 바오로 서간 중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입니다. 이 편지는 54년 봄쯤에 쓴 것으로 추정합니다. 바오로는 이 서간에 앞서 편지 한 통을 코린토 교회에 써 보냈는데, 안타깝게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코린토 교회의 사정이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장사하는”(2코린 2,17) 가짜 선교사들이 코린토에 와서 바오로의 사도직을 부정하며 신자들을 부추기고 있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바오로는 직접 코린토로 건너갑니다. 그의 두 번째 코린토 방문이었습니다.(2코린 13,2 참조) 하지만 바오로는 오히려 모욕만 당하고 에페소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는 “괴롭고 답답한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며”(2코린 2,4) 코린토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이 편지가 ‘코린토 교회에 보낸 세 번째 편지’입니다. ‘눈물 편지’라고도 하는 이 세 번째 편지는 바오로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10-13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6월 21일, 이창훈(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70) 에필로그 <5> 사도행전에 비춰본 바오로의 생애와 서간 ④


복음 선포의 열정으로 마침내 로마에 도착하다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과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쓰고, 마케도니아에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을 쓴다. 그리고 코린토에 와서 3개월 지내는 동안 자신의 신학적 사상을 정리해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쓴다. 사진은 바오로의 제자 에파프라스가 복음을 전한 콜로새 인근 라오디케이아의 유적.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27개월 동안 지내면서 선교 활동에 큰 성공을 거둡니다. 복음은 에페소 인근 도시들까지 전파됩니다. 사도행전에는 나오지 않지만, 바오로의 제자 에파프라스의 활동으로 에페소 동쪽 200㎞쯤 떨어진 도시 콜로새를 비롯해 그 근처에 있는 히에라폴리스와 라오디케이아 같은 고을들에도 공동체가 세워집니다.(콜로 1,7; 2,1; 4,12-13 참조) 하지만 눈부신 선교 활동에도 불구하고 바오로의 에페소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에페소 감옥에 갇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겪은 시련으로 아르테미스 신당 모형을 만드는 은장이 데메트리우스의 사주로 인한 소동을 전합니다만(19,23-40),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내가 에페소에서 이를테면 맹수와 싸웠다고 한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1코린 15,32)라며 에페소에서 모진 시련을 겪었음을 언급합니다. 또 둘째 서간에서는 아시아 곧 에페소에서 겪은 환난과 관련해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라고 표현합니다.(2코린 1,8-10) 이 말은 곧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다고 전합니다.(필리 1,13)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감옥에 갇힌 것이 데메트리우스로 인한 소동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바오로의 친서 가운데 하나인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바로 이 에페소 감옥에서 썼다는 데에 많은 학자가 의견을 같이합니다. 일각에서는 에페소 감옥이 아니라 나중에 로마에서 죽기 직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필리피 서간을 썼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필리피 서간을 썼다면 그 시기는 에페소에 머무른 초기가 아니라 적어도 중기 이후일 것입니다. 그래서 55년을 전후한 시기에 바오로가 에페소 감옥에서 썼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

 

바오로는 에페소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또 한 통의 편지를 씁니다.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서간의 수신인 필레몬이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필레몬서의 내용 등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그는 콜로새 교회의 주요 인사로, 바오로의 영향으로 복음을 받아들였고 자기 집에서 신자들의 모임을 열 정도로 신심과 재력과 사회적 영향력도 있었을 것입니다. 서간은 한때 필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스를 잘 거두어달라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바오로가 직접 필레몬서를 썼다는 데는 학자들 사이에 큰 이견이 없습니다만, 편지를 쓴 곳이 에페소 감옥이 아니라 바오로의 말년, 그러니까 순교하기 전에 로마 감옥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바오로가 필레몬서를 에페소에서 썼다면 그 시기는 필리피서를 쓴 시기와 비슷하게 55년 전후가 될 것입니다. 만일 로마의 감옥에서 썼다면 바오로의 순교 얼마 전인 60년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복음 실천 권고

 

한편 바오로가 아직 에페소에 머물고 있을 때 갈라티아 교회로부터도 심상찮은 소식이 들렸습니다. 갈라티아는 남쪽으로는 바오로가 1차 선교 여행 때에 복음을 전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이코니온, 리스트라, 데르베 등지를, 북쪽으로는 2차 선교 여행과 3차 선교 여행 때에 들린 북부 지방의 안키라(오늘날 터키 수도 앙카라) 부근까지 포함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교회 신자들이 바오로가 전한 복음을 저버리고 예전 생활로 돌아간 것이었습니다. 한편에서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이들을 따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의 인도가 아닌 육의 행실에 따라 불륜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분쟁과 시기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 자신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면서 율법이 아니라 은총에 따라, 육의 행실이 아닌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도록 권고합니다. 이것이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학자들 사이에는 서간의 수신인인 갈라티아 신자들이 남부 지방 신자들인지 북부 지방 신자들인지를 놓고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만, 바오로가 2차와 3차 선교 여행 때에 거친 북부 지방 신자들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코린토 교회의 회개를 전해 듣다

 

바오로는 갈라티아서를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페소를 떠나 트로아스를 거쳐 마케도니아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에페소에 있을 때 코린토에 보낸 티토를 만납니다. 바오로는 에페소에 있을 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등을 위해 코린토를 방문했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요. 에페소로 돌아온 그는 괴롭고 답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쓴 이른바 ‘눈물 편지’를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코린토 신자들과 화해하기 위해 자신의 제자이자 협력자를 코린토 교회에 파견했는데, 그 사람이 티토였습니다.

 

마케도니아에서 티토를 만나 코린토 교회의 좋은 소식을 전해 들은 바오로는 이제 가볍고 편안한 마음으로 코린토 신자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는데 이것이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입니다. 이 둘째 서간의 10장에서 13장까지는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쓴 이른바 ‘눈물 편지’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마케도니아에서 코린토2서를 쓰고 난 바오로는 56년(또는 57년) 말쯤에 코린토에 도착합니다. 그의 세 번째 코린토 방문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3개월가량 머물면서 자신이 이미 에페소에서부터 가고 싶어 했던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데 이것이 바로 바오로의 신학적 사상을 집대성한 내용을 담은 편지로 평가받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사실 바오로가 세 번째 선교 여행 때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곧 코린토를 둘러보고자 한 것은 두 번째 선교 여행 때 복음을 전한 이 지역의 교회들을 찾아 신자들을 격려하는 한편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목적도 있었습니다. 한때 코린토 신자들과의 불화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바오로는 에페소를 떠나 마케도니아와 코린토까지 내려오면서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로마 신자들에게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배를 타고 시리아로 바로 건너가고자 했지만 유다인들이 자신을 살해하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것을 알고는 마케도니아를 통해 돌아가기로 합니다. 그래서 필리피와 트로아스를 거쳐 밀레토스로 내려옵니다. 그곳에서 에페소 교회 원로들을 불러 작별 인사를 한 후 바오로는 마침내 시리아 땅 티로에 도착하고 프톨레마이스와 카이사리아를 통해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사도 20,3─21,16)

 

그러나 바오로는 예루살렘에서 얼마 있지 않아 아시아에서 온 유다인들의 선동으로 성전에서 체포되고 카이사리아로 호송된 후 그곳에서 2년을 지내다가 황제에게 상소한 후 마침내 수인의 신분으로 61년에 로마에 도착합니다. 바오로는 수인이었지만 셋집을 얻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쳤다”(사도 28,32)고 사도행전은 바오로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6월 28일, 이창훈(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71·끝) 에필로그 <6> 사도행전에 비춰본 바오로의 생애와 서간 ⑤


열정적으로 복음 전한 ‘이방인의 사도’, 로마에서 순교하다

 

 

- 바오로 사도의 참수터에 세워진 로마 성문 밖 세 분수 성당의 전경.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로마에서 2년 동안 셋집을 얻어 지내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 이후 바오로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또 바오로가 썼다는 나머지 서간들은 언제 쓴 것일까요? 이 부분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 사도행전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사도행전뿐 아니라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바오로의 이후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1세기 말부터 전해오는 전승에 따르면 바오로는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가 언제 순교했는지에 대해서도 가설이 엇갈립니다. 2년의 가택 연금 기간(사도 28,30 참조)이 끝난 후 순교했다는 설이 있고, 2년 후 풀려났다가 멀리 스페인까지 선교하고 나서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쓴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로마에 들렀다가 스페인에 가겠다고 두 번이나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로마 15,24.28), 스페인 여행 주장을 무조건 배격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제4대 교황으로 초세기 교부인 로마의 클레멘스 성인이 코린토 신자들에게 쓴 편지에는 바오로가 로마 제국의 서쪽인 스페인에 가서 선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전승을 토대로 스페인 동북부 항구도시인 타라고나에는 1963년 바오로 사도의 스페인 선교 1900주년을 기념하는 바오로 상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만일 바오로 사도가 스페인에서 돌아와 로마에서 순교했다면 그 시기는 언제이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대해서도 확실한 답은 없습니다. 네로 황제가 64년에 로마에 불을 지른 후 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씌워 4년 동안 모진 박해를 자행했는데 그 박해 시기에 순교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가설을 종합하면 바오로 사도는 60년대에 곧 63~67년 사이에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 베드로 대성전이 들어서 있는 바티칸 언덕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베드로와 달리, 바오로는 로마 성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바오로가 순교할 때 목이 떨어지면서 세 번 튀었는데 그 자리에 샘이 솟아났다고 합니다. 그곳에 바오로 사도의 순교를 기념하는 성당이 세워졌는데 로마 성 밖 ‘트레 폰타네’(세 분수) 성당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유해는 로마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 중앙 제대 아래에 모셔져 있습니다.

 

한편 바오로는 로마에서 2년 동안 가택 연금 상태에서 지낼 때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과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집필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두 서간이 바오로가 직접 쓴 친서라면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두 서간 모두 바오로의 친서가 아니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쓴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을 두고서도 에페소가 아니라 로마에서 수감 생활을 할 때 쓴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필레몬 서간의 집필 연대는 61~63년 또는 바오로의 순교 직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연재를 마치며

 

2019년 1월 초에 연재를 시작한 ‘사도행전 이야기’는 이번 71회로 마칩니다. 1년 6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사도행전 이야기’를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독자 여러분께 드린 말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맡긴 복음 선포 사명을 사도들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태도로 선포했으며, 그렇게 해서 형성된 교회의 삶이 어떠했는지, 또 그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연재를 계속하면서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 같아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도중에 ‘정년퇴직’이라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 이끌어 주신 덕분으로, 연재를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의 삶 전체가, 특히 가톨릭평화신문 기자로서 지낸 30년 삶이 성령께서 이끌어 주신 덕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0여 년 전, 제 앞날에 ‘기자’라는 단어는 존재조차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가톨릭 언론 매체의 기자가 되고 난 후 차츰차츰 기자의 길이 성령께서 이끌어 주신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기자 생활의 마지막을 ‘성령의 역사하심’을 전하는 사도행전 이야기로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은총입니다.

 

‘사도행전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 그 이전 2017년 2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91회에 걸쳐 연재한 ‘예수님 이야기’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은 누구이시고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했고, ‘사도행전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제자들이 어떻게 땅끝까지 전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취지가 독자 여러분에게 전달됐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입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이야기(예수님 이야기)와 선포된 복음이 전해지는 이야기(사도행전 이야기)에 이어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 교리들이 형성되는 이야기(교리 이야기)까지 살펴보자는 것이 연재 과정에서 구상한 전체적인 기획입니다만, 이 마지막 이야기는 여러 사정상 다른 기회로 미룹니다. 연재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들이나 부족한 점들은 어떤 식으로든 바로잡고 보완해서 참고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자료

 

· 「주석 성경」,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신약성서 사도행전」, 분도출판사

· 조셉 퀼징거 저, 박영훈 역, 「신약성서 영적 독서를 위한 사도행전」, 성요셉출판사

· 정양모 지음, 「사도행전 이야기」, 성서와 함께

· 정양모 지음, 「바울로 친서 이야기」, 성서와 함께

·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VII 사도행전」, 분도출판사

· 이보 스토르니올로 지음, 김수복 옮김, 「사도행전 읽기」, 성바오로

· 「신약성경 주해집 5 사도행전」, 도서출판 크리스찬

· 엔리코 갈비아티·필리포 세라피니 지음, 이성근 옮김 「성경 역사 지도」, 분도출판사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7월 5일, 이창훈(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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