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죽음과 부활인 세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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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0-06-16 | 조회수7,196 | 추천수0 |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죽음과 부활인 세례(Taufe als Tod und Auferstehung)
로마서 6장 3-14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핵심적인 사건인 세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은 세례성사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필요한 아주 중요한 신약성경 텍스트입니다. 처음 시작에서부터 바오로는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3-4)
이 텍스트는 곧바로 우리를 몇 가지 의문들에 부딪히게 합니다. 여기서 바오로는 왜 죽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게다가 왜 묻힌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그 모든 게 세례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세례를 받도록 아이를 데려온 부모가 그 순간에 죽음과 무덤을 떠올리고 싶기나 할까요? 어떻게 이러한 세례 신학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가장 오래된 세례 관습
일단 대답은 아주 간단해 보입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가능한 한 흐르는 강에서 세례를 거행했습니다. 세례를 주는 이와 세례를 받는 이가 강으로 내려간 다음, 세례를 받는 이는 물속에 온통 잠기는 침례를 받았습니다(사도 8,36-39 참조). 물론 이러한 예식의 본보기는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주었던 세례였습니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파라오의 압제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의 구원이 자리 잡고 있기도 했습니다. 이미 바오로는 코린토 1서 10장 1-4절에서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일과 관련짓습니다. 따라서 세례는 정말로 물속에 잠기는 일, 물속에 묻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것은 물속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일이었지요.
이 부분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초기 교회의 세례 관습이 물속에 잠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이미 오래전에 이마에 간단히 물을 붓는 의식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받는 이의 이마 위로 세례수가 몇 번 흐르는 것만으로는 물속에 잠기고 묻힌다는 상징성이 눈에 띄게 드러날 리 없습니다. 깨끗하게 되고 정화된다는 의미도 연상할 수 없습니다. 더불어 깊은 물속에서, 곧 혼돈과 죽음의 물속에서 죽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 위로 올라온다는 의미도 확연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바오로의 세례 신학에서 ‘죽음’과 ‘묻힘’이라는 주제에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오로의 생각에 온전히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서 6장 3-14절의 구조와 틀을 이루고 있는 본질적 맥락을 잘 알아야 합니다.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하나가 바로 그 맥락입니다.
초기 교회의 신앙 고백
바오로 사도는 이 신앙 고백을 코린토 1서 15장 3-5절에서 명확히 인용합니다. 이는 결정적인 고백으로서, 바오로는 이를 전승으로 전해 받았고 다시 전해 준다고 말합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
초기 교회의 이 신앙 고백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외에도 그분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세 가지 신비에 대해 말합니다. 곧 그분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 묻히셨다는 것 그리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세 가지 신비가 로마서 6장에서 바오로 사도의 세례 신학을 떠받치고 있기도 합니다. 곧 세례 받는 이들은 세례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합니다. 그리고 세례에서 그분과 함께 묻힙니다. 나아가 세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갑니다.
이로써 세례가 결국 죽고 묻히는 일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세례 받는 이는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일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성사 안에서 예수님의 운명 안으로 잠기게 됩니다. 그분의 삶 안으로, 무엇보다 그분 생애의 마지막 정점 안으로 잠깁니다. 곧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묻히고, 그분과 함께 새 삶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게 조금이라도 아니라면, 세례 받은 이는 그리스도와 실제적으로 하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실제적 구원
하지만 세례 받는 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말은 정확히 무슨 의미일까요? 그저 상징적인 차원에서 죽는다는 말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이는 제대로 된 이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히는 것이 삶의 현실에서도 실제로 구현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사는 그저 기묘한 행위에 그치고 맙니다. 그리고 그런 예는 고대 세계의 수많은 의식들에서도 발견됩니다. 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실제 역사, 곧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당연히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삶의 현실로 구체화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바오로는 로마서 6장 3-14절의 끝부분에 가서 제시합니다. 곧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로마 6,11)
우리는 세례를 통해 죄에서 죽습니다. 이는 바오로의 세례 신학에서 온전히 핵심적인 통찰입니다. 물론 여기서 바오로의 이 말은 단순히 개인이 짓는 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죄의 권세’를 가리키는데, 이러한 권세는 늘 거듭되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세상에 둥지를 틀고, 사회를 지배하고,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고, 인간의 생각을 흐리며, 그 행동을 왜곡합니다.
악의 이 강력한 권세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죽음으로 제압하셨습니다. 불행을 가져오는 세상의 권세들이 그분을 죽였지만, 하느님을 향한 그분의 헌신은 파괴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파견 사명에 대한 충실성과 죽기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분의 사랑은 파멸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죽음에서 이전에는 결코 없던 자유의 공간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로 열린 자유의 공간, 죄에서 벗어난 자유의 공간, 서로를 향한 사랑의 공간입니다.
바오로에게 그리고 신약성경 전체에서 교회가 바로 이 자유의 공간입니다. 세례를 청하는 이는 세례를 통해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펼쳐지는 영역, 새로운 자유 안으로, 비구원의 세상 권세들로부터 벗어나 구원받은 공간 안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바로 여기에서 유아세례의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곧 스스로 결정권이 없는 유아 역시 이미 이 구원과 자유의 공간 안으로 들어설 권리를 가집니다.
물론 교회 안에도 악이 침범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불순종과 죄와 불행이 교회 안으로도 틈입합니다. 하지만 자유의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죄는 그 무시무시한 힘을 잃었습니다.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내 소외시키고 모든 것을 지배하는 힘을 상실했습니다.
새 사회
초기 교회 신자들은 정말로 세례를 엄중한 전환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신앙과 세례의 선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이 새 창조의 세계, 새 모습의 사회로 들어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통치권의 교체로, 이방 사회의 신들과 악령들에게서 돌아서 새 사회 안으로 진입하는 것으로 체험했습니다. 초대 교회가 아가페agape라고 불렀던 것, 곧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과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방 세계의 존재 방식과 비교해 철저한 삶의 전환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세례를 죽음에서 진정한 생명으로 넘어가는 일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스스로 결정권이 없는 유아 역시 구원과 자유의 공간 안으로 들어설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 유아세례의 깊은 의미이다. 로마서 6장을 이해한 사람은 교회의 쇄신에 대해 더 이상 함부로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쇄신은 이렇듯 초기 교회의 근본적 체험이 우리 각자의 공동체에서 저마다 다시 생생하게 될 때 가능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새롭게 선물로 주어진 생명을 깊이 체험하고 각자의 삶을 새 삶의 형태로 전환할 때만 가능합니다. 이 시대의 우상들이 아니라 홀로 참되신 하느님께서 지배하시도록 통치권의 교체가 이루어지게 할 때만 가능합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신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 Gemeinde에 머물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외 다수가 있다. 로핑크 신부님은 책 집필 외에 유일하게 『생활성서』 독자들에게 매월 글을 보내며 한국 신자들과의 소통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월간 생활성서, 2020년 6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저, 김혁태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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