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광야에서 메시아를 기다렸던 쿰란 공동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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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0-06-22 | 조회수8,592 | 추천수0 |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특집] 광야에서 메시아를 기다렸던 ‘쿰란 공동체’ 주님의 길 준비하기 위해 광야로 나선 사람들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광야에서 ‘말씀’이신 주님의 길을 외치는 소리가 되었던 성 요한 세례자. 그는 주님에 앞서 그분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이자 예언자였다. 요한 세례자가 살았던 비슷한 시대에 이스라엘 사해 인근 쿰란에는 광야에서 살았던 에세네파 공동체(이하 쿰란 공동체)가 있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경 사본으로 꼽히는 쿰란 문서를 남긴 공동체로 추정되는 이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종말론적 삶을 사는 등 요한 세례자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월 24일을 맞아 쿰란 공동체에 대해 살펴본다.
쿰란 공동체와 성경 사본
예리코 남쪽 10㎞, 사해 서북쪽 1㎞ 지점의 쿰란(Qumran) 지명은 ‘달 두 개’를 뜻하는 아랍어에서 나왔다. 달이 뜨면 사해에 비쳐 흡사 두 개처럼 보인다는 의미에서였다. 아랍인은 이곳을 키르베트 쿰란이라 부르는데, 이는 쿰란 유적지라는 뜻이다. 현재 이곳은 이스라엘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1948년 5월 이후 이스라엘 공화국과 요르단 왕국으로 분열된 팔레스타인의 요르단 왕국 쪽에 속하며, 사해의 북서쪽, 예루살렘의 동남쪽에 펼쳐지는 ‘유다의 황야’ 일부이다.
- 성경 사본이 발견된 쿰란의 동굴 입구.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1947년 이 지역 평원에서 베두인 목동 무하마드 아드-디브는 동굴 안에 돌멩이를 던진다. 잃어버린 염소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경 사본을 발견하는 실마리가 된다. 그 안에서 오래된 항아리와 두루마리가 발견됐는데, 이는 2000년 된 성경 사본으로 밝혀졌다.
이때부터 1956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예루살렘 성경 및 고고학 연구소와 요르단 문화재 관리국에 의해 키르베트 쿰란과 남쪽으로 3㎞ 떨어진 라스 페쉬카에 대한 발굴이 진행됐다. 기원전 8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됐고 모두 11개 동굴이 조사됐다. 그 안에서는 구약성경 두루마리들과 그 밖의 자료들 850여 건을 발견했다.
쿰란 문서는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쓰였고 대부분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록됐다. 소수 그리스어 문서도 있었다. 연대 측정 결과 대부분 쿰란 문서는 기원전 3세기 혹은 2세기 초에서 서기 1세기 초반 사이에 필사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때까지 알려진 구약성경 사본들 보다 수 백 년 또는 1000년 이상 오래된 것이었다. 이를 쿰란 문서라 부르는데, 사해 인근에서 발견된 모든 문서를 ‘사해 두루마리’로 칭한다.
- 쿰란 유적지 중 정결 예식용 저수장.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쿰란의 에세네파
전문가들은 이 두루마리를 남긴 공동체를 고대 에세네파로 본다. 최소한 에세네파의 한 그룹과 동일시하는 것이 현재 학계의 통념이다.
에세네파는 바리사이, 사두가이, 열혈 당원과 함께 유다교의 한 분파로 알려져 있다. 유대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당시 이들은 3000명이 넘었고 대부분 쿰란 공동체에 합류해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신약성경에는 에세네파가 직접 언급되지 않으나 바리사이나 사두가이보다 더 당시 정치와 사회를 멀리했다고 한다. 에세네는 시리아어 ‘에세노이’에서 나온 것인데 ‘거룩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들의 기원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기원전 2세기 초 하시딤 운동이다.
하시딤은 마카베오의 독립전쟁(기원전 166~160) 시기에 마다디아와 유다 마카베오의 지휘하에 모인 다양한 여러 그룹 중 하나다. 그들은 율법의 이름으로 헬레니즘과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기원전 175~164)에 반대했다.
결국 하시딤은 마카베오 가문의 저항은 지지했지만 그들의 정치 행태에는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하시딤 운동은 정치적인 이유로 요나단 마카베오(기원전 160~143) 통치시기에 바리사이파와 에세네파로 분열됐다.
- 쿰란 문서는 대부분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쓰였고 대부분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록됐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기원전 152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알렉산더 발라스가 요나단 마카베오를 예루살렘 성전 대사제로 임명했는데, 요나단은 정통 대사제 집안인 사독 집안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당시 정통 대사제를 쫓아내고 대사제직을 빼앗았다. 이때 쫓겨난 정통 대사제가 쿰란 공동체의 창시자인 정의의 스승이다. 그는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함께 유다 광야로 가서 공동체를 이뤘다. 에세네파 쿰란 공동체의 시작이었다.
이 공동체는 쿰란 문서에서 자신들을 ‘공동체’, ‘빛의 자녀들’, ‘경건한 사람들’, ‘의로운 사람들’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를 준비했던 쿰란 공동체
특히 공동체는 율법 연구를 통해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광야로 가서 생활했다. 탈출기 이후 광야에서 생활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모델로 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참된 이스라엘, 새로운 계약의 공동체, 마지막 시대에 하느님 선택을 받은 사람들로 이해했고 출발점은 모세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이었다.
정기적으로 정결례를 위한 침수 예식을 거행하며 자신의 정결과 거룩함을 유지하려 했고 자신들에게 하느님의 비밀이 특별히 계시되었다고 여기며 사제들의 성경 해석을 충실히 따랐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고 성전 제사도 거부했던 이들은 하루 두 번씩 정해진 시간에 공동 기도를 바쳤다. 또 자신들이 마지막 때를 살고 있다고 믿으며 하느님의 심판과 새로운 시대를 준비했다.
- 이스라엘 박물관 내 쿰란 문서가 전시된 원형전시관.
요한 세례자의 출현과 활동을 묘사하며 마태오 복음 3장 3절에 인용된, 이사야 40장 3절은 이들 공동체에도 중요한 모티브로 드러난다.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쿰란 공동체 창립 강령에 해당하는 문서에서 인용된 이 구약의 구절은 그들이 유다 광야에서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있어 신학적 근거로 작용한다.
송창현 신부(대구대교구 지곡본당 주임)는 「세례자 요한과 쿰란 공동체」 연구에서 “요한이 미래의 구원 시기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와 요르단강에서 준비시켰는데, 이 광야라는 신학적 모티프는 쿰란 공동체 안에서도 매우 중요했다”고 밝힌다. 송 신부는 “공동체는 자신의 조직과 생활을 위해 이집트 탈출 이후 광야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모델로 삼았고, 이처럼 요한 세례자와 쿰란 공동체는 광야라는 신학적 모티프를 함께 사용한다”고 했다.
요한의 세례와 쿰란의 침수 예식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 두 예식은 모두 회개를 전제하고 죄의 용서와 몸의 정화를 의미하면서 입문 예식 성격도 지녔다.
쿰란 문서 발견 이후 요한 세례자와 쿰란 공동체 사이 관계에 대한 논란이 활발한 상황. 그러나 송 신부는 이 연구에서 “요한이 쿰란의 에세네파였다는 그 어떤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선을 그으면서 “둘 사이의 유사점은 직접적인 관계에서 유래한다기보다는 이 둘이 공통으로 가지는 배경, 곧 구약성경과 제2 성전 유다이즘이라는 맥락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했다.
광야에서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던 쿰란 공동체는 서기 66년 1차 유다 반란 때 열혈당원들을 진압하던 로마군이 쿰란 지역에 진입하면서 사라진다. 열 한 동굴에 숨겼던 성경과 율법 두루마리 등은 당시 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되면서 20세기가 돼서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가톨릭신문, 2020년 6월 21일, 이주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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