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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에녹과 라멕에 관한 추가 자료 공개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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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28 조회수1,574 추천수0 신고

저는 작년 2012년 1월부터 9월까지 장장 120여회에 걸쳐 이곳 ‘우리들의 묵상’방에 창세기 1장에서 11장, 정확하게는 12장 5절까지, 천지창조에서 아브람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께서 이르신 곳을 향해 출발하는 여정까지를 묵상했다. 8부작으로 기술했다. 카인의 자손과 아담의 자손에 관한 것은 ‘아담의 자손’편에 나름으로 묵상 내용을 담았다.

제가 이 창세기를 묵상한 것은 ‘성경’의 핵심은 '모세 오경’이며, 그 중에서도 ‘창세기’가 엑기스라고 여겼기에 시도했다. 창세기 그기에 하느님의 인간 구원의 역사와 하느님의 약속이 담겨 있기에. 그리고 인간의 죄와 벌, 하느님의 이스라엘 민족의 선정과 메시아의 도래를 약속한 게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지나고 보면 천지 창조와 인간의 탄생은 하느님의 손수 제작하신 걸작이고, 이 창조와 탄생의 리얼한 소개는 ‘성경’이외의 그 어디에도 이렇게 상세하게 나타내는 게 거의 없다고 저는 확신한다. 인간 탄생에 관해서는 간혹 진화론을 이야기하지만 진화 이전의 최초의 탄생은 어디에도 이렇게 구체화 된 게 없다.

그리고 인간이 어디로 진화해 간다는 확신도 없다. 우리는 어디로 진화해 간단 말인가! 그래서 성경의 인간 탄생 말고는 그 어느 대안도 없다. 6일간의 천지 창조 내용 말고 이렇게 리얼하게 세상 창조를 그린 드라마가 있는가?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벌로 창세기는 나아간다. 카인의 자손 에녹도 라멕도 나오고, 셋의 자손 하늘에 올라가신 에녹, 노아의 아버지 라멕도 나왔다. 지금 동명이인이냐 동일인이냐의 나름대로의 정리는 거듭 이야기하거니와 이곳 이용자 각자의 몫이다. 이 양 자손의 계보를 통해 하느님은 인간 구원의 원대한 꿈을 가지고 계셨다.

사람의 딸들로 대변되는 카인의 후손과 하느님의 아들들로 대변되면서 메시아의 탄생에 이르기까지의 인간 역사는 창세기를 통해 이어만 갔다. 그러면서 양 계보의 결합으로 인류의 죄는 커지기만 하였고 하느님의 노여움도 또한 가지게 했다.

드디어 아담의 9대손 라멕의 아들 흠 없는 노아[아담의 10대손]를 통해 하느님은 타락한 인류를 하늘위의 물과 바다의 물, 땅 속의 물로 벌하기로 작정하셨다.

 

사실 성경에는 한번뿐인 ‘노아의 홍수’라지만 제가 보기로는 수없는 홍수로 하느님은 인류를 벌하셨을 것이다. 아니 홍수뿐만 아니라 불로도, 벼락으로도. 그만큼 인류는 타락되어 있었기에. 그렇지만 성경은 그 모든 벌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남기지 않아도 많은 벌이 있었다는 걸 우리는 누가 뭐래도 알 수 있기에.

‘안 봐서 모른다.’라고 하는 노아 시대 이전의 그런 타락된 인간을 그 자존심 강한 우리 하느님은 수도 없이 벌했으리라. 그렇지만 저는 단언한다. 노아의 홍수이후 그 어떤 노아 시대에 버금가는 그 홍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그건 하느님이 이젠 그런 대 홍수는 결코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을 해 주셨기에.

그러나 국지성인 물, 불, 벼락 등을 사용한 벌은 그 이후에도 부지기수였을 것이고 지금도 이어지는 게 아닐까?

 

암튼 그 오랜 기간 망망대해를 헤맨 노아 가족도 다시 죄로 물들었고 그 세 아들 중 둘째 아들 셈의 계보에서 아브라함으로 이어져 창세기이야기는 계속 전개되고 첫째와 막내 함과 야펫은 뿔뿔이 흩어지는 자손이 된다. 성경은 이렇게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으로 일관되게 이어지는 것일 게다.

 

이렇게 성경은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벌로 이어지고 결국은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가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메시지를 가진다고 알려 준다.

금번 논쟁의 포인트는 창세기 4,5장의 두 에녹과 라멕에 관한 이야기이다. 노아 이전의 내용이라 해서 간과해서 될 터인가? 죄는 계속 이어져오고 커져만 가는데. 하느님의 개입으로 끝없이 벌하면서 정화시켜도 인간은 결국은 죄의 노예가 되는데. 이러 할진데 노아 홍수 전후가 그리 문제가 되는가?

성경은 성령의 개입으로 작성된 것일 게다. 바벨탑을 무너뜨리기도 했지만 막무가내 아닌가! 핵폭탄이 양산되고, 잘 흐르는 강을 막아 죽음의 녹조를 만들고.

 

문제는 두 에녹과 라멕이 동일인이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좀 공신력 있는 답변을 찾아야 한다. 막무가내로 이야기를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저는 이복선님이 게시해 준 신은근 신부님의 글[#2042]에서 나름으로 동명이인임을 거듭 확신했다.

그렇지만 더 확신할 수 있는 이곳 ‘성경 자료실’에 ‘신앙의 해’에 연재되는 김영선 루치아 수녀님의 창세기 11장까지의 최근 내용[성경 자료실 2013년 5월 4일 #2215]을 차제에 소개코자 한다. 수녀님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회복의 역사를 설명하시면서 카인의 후손 ‘라멕의 죄’와 셋의 후손 라멕의 아들 노아와의 동명이인 관계를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참조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다른 좋은 자료가 게시되길 기대해 본다.

 

끝으로 저는 성경의 한 점 한 획도 지어낸 게 아니란 걸 확신한다. 그러려니 하면 다 맞는 것 같다. 의심을 가질 만도 하지만 그리해봐야 돌아서서는 그게 그거다 하니 맞게 여겨지더라.

그런 관점에서 성경은 두 라멕과 에녹을 아주 소상히 소개하면서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소개해 주고 있어 동명이인임을 저 나름으로 믿고 있음을 다시 더 밝히는 바이다.

 

좀 길지만 허튼소리라 생각하고 해 보고나니 그래도 속이 좀 후련하다.

긴 글 읽어 주신 것에 고마움을 전하면서 이에 관련 새로운 내용 소개를 기다립니다. 김영선 루치아 수녀님의 창세기 11장까지의 최근 내용으로 이곳 자료실에  #2215로 게시된 내용을 아래에 소개코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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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해 - 구약성경의 맥]제4주제 : 시원 역사(창세 1-11장)

구약성경 해석의 틀/성경 자료실 2013년 5월 4일 #2215

 

김영선

구약성경을 읽는 방법은 다양해서 어떤 방법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부터 제가 소개해 드리는 방법은 현재 구약성경의 형태와 배열 순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면서 구약성경의 첫 부분이 구약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구약성경의 첫 부분인 창세 1-11장은 마치 어떤 책의 머리말이 그 책 안에 담긴 내용을 집약적으로 알려주는 것처럼 그 뒤에 이어질 내용들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종의 해석학적 틀을 제공합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과 악화된 관계

구약성경 46권 가운데 맨 먼저 나오는 책을 ‘창세기’라고 부르고, 영어로는 Genesis, 히브리어로는 브레쉬트(‘한처음에’라는 뜻)라고 합니다. 모두 ‘시작’이나 ‘기원’을 의미합니다. 제목에 걸맞게 창세기는 시작, 기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크게 창세 1-11장과 12-50장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 부분, 창세 1-11장은 세상과 인간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고, 뒷부분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어떻게 서로 연결이 되고, 서로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요?

먼저 창세 1-11장의 내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창세 1-11장을 읽는 데, 지금 현재 우리가 가진 구약성경 본문에 집중하여 이 본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파악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창세 1-3장은 하느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세상과 그 세상에 살아가는 피조물들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첫 번째 창조이야기(1,1-2,4ㄱ)는 그 특유의 화법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얼마나 질서정연하고 조화로운지를 강조하며 하느님께서 지으신 세상이 좋고 아름다운 곳이었음을 일곱 번이나 말합니다.

일곱이라는 수가 구약성경에서 완전을 뜻함을 감안할 때, 일곱 번 되풀이되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세상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창조이야기의 첫 부분 (2,4ㄴ-25)에 따르면 태초의 인간들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에 살면서 영생을 누렸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은 다 초식을 하면서 서로 적대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루신 세상의 질서와 조화를 즐기면서 하느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 수 있는, 곧 하느님과 어떤 거리감도 없는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에 대한 인간의 불순종으로 이 조화와 질서는 곧 깨어지고, 그 결과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나무 주변에는 불칼이 돌고 케루빔들이 그것을 지키게 됩니다.

이 말은 이제 인간은 영생을 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이제 이마에 땀을 흘려야 소출을 얻게 됩니다(3,19 참조). 곧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땅의 관계 역시 그 조화는 깨어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후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땅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들어서게 됩니다. 먼저, 이 관계는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의 범죄로 더욱 악화됩니다. 하느님은 카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4,12).

 

인간관계의 악화와 폭력, 그리고 노아를 통한 회복

카인으로 악화된 인간관계는 그의 후손, 라멕(아담의 7대손)에 이르러 더욱 악화됩니다. 라멕은 자기 아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다야, 칠라야, 내 소리를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나는 내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내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다.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4,23-24). [라멕의 말을 완전히 역전시키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마태 18,22에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관계의 악화와 폭력은 창세 6,5-6에 이르면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6,7)

이 말씀은 인간의 죄악이 인간에게만 해악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 전체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결국에는 그들까지 멸망에 이를 운명에 놓인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과 땅의 관계는 이제 단절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온 땅에서 떨어져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단 한 사람 노아를 찾아내셨습니다. 온 세상을 샅샅이 찾아보시며, 한 의인을 찾아내신 것입니다.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6,8).

이 노아를 통하여 인간과 땅의 조화는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노아의 아버지는 노아의 이름을 지은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이가 주님께서 저주하신 땅 때문에 수고하고 고생하는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이다”(5,29).

결국 홍수가 내려 땅에서 온갖 생물들이 쓸려 내려갔지만 노아를 통하여 회복된 세상을 향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8,21). 그리고 농부인 노아는 포도밭을 가꾸는 첫 사람이 되었습니다(9,20).

이로써 단절되었던 인간과 땅의 관계는 노아를 통하여 회복됩니다. 그런데 이미 하느님께서 선언하신 것처럼 노아를 통하여 새롭게 시작된 세상 역시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면제된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들 함은 아버지인 노아의 벗은 몸을 모욕하였고, 사람들은 탑을 세워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고자 하였습니다. 태초의 조화와 질서는 점점 잊혀가고 인간의 불행은 땅에서 증가되고 있었습니다.

 

관계 맺음을 통한 질서 회복

하느님은 다른 대안을 생각하셨습니다. 바깥에서 주어지는 처벌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관계 맺음을 통하여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 대안이 이스라엘 민족이며 한민족과 관계를 맺으심으로써 그 관계를 통하여 본래의 인간됨의 회복과 태초의 질서와 조화를 다시 이루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을 부르시어,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당신이 보여주실 땅으로 가라는 초대로 시작됩니다(12,1 참조).

이어지는 구약성경 전체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과 그들에게 땅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고, 그들은 또 어떻게 그 땅을 잃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태초의 인간들을 당신이 만드신 에덴동산에 살게 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부르시어 당신이 주시는 땅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 살았던 태초의 인류가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어김으로써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동시에 그들과 땅의 관계 역시 악화일로에 들어섰다면,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으면 그 땅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고, 그들은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계명을 성실히 지키지 않았던 결과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유일한 의로운 이였던 노아를 통하여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던 것처럼, 당신의 계명을 어기고 약속의 땅을 잃었던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알려주셨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가슴에 당신의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주셔서 그들과 새 계약을 맺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예레 31,33 참조).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셔서 그들이 하느님의 법을 지킬 수 있게 해주실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에제 36,26-27 참조).

시원 역사와 이어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드러내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과거의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지금도 당신의 법을 마음으로 알아듣고 따를 이들을 당신께로 부르심으로써 그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태초의 질서와 조화를 회복시키시려는 하느님의 원의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 가운데 드러나고 있습니다. 선들바람이 부는 해 질 녘 에덴동산에서 온 인류가 하느님과 함께 저녁 산책을 나서는 그날이 올 때까지 말입니다.

 

김영선 루치아 - 마리아의전교자프란치스코회 수녀. 가톨릭대학교에서 석박사 통합과정 2년을 마치고 미국 보스톤대학(예수회)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서강대학교에서 구약성서 입문을 강의하고,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구약성경과 피정 지도’라는 제목으로 구약성경 세미나를 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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