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그때 그들과 오늘 우리: 우리 안의 마르타와 마리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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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0-06-25 | 조회수7,509 | 추천수0 | |
[그때 그들과 오늘 우리] 우리 안의 마르타와 마리아
여자 치유 활동가
성경에는 아픈 사람을 치유한 여자의 이야기가 없다. 구악에서 생명을 살리는 인물은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예언자들이고(1열왕 17,8-24; 2열왕 4,8-37 참조), 신약에서는 당연히 예수님이시며, 사도들이 그 뒤를 따른다.
그렇다면 그 시대 여자들은 치유가로서 전혀 활동하지 않은 것일까? 설사 활동했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보존하여 전할 만큼 성경의 품이 넉넉하지 않았으리라.
또한, 성경에서 스스로 자신의 질병을 고쳐 달라고 나선 여자도 찾아보기 어렵다. 치유를 청하고 치유받은 이들은 거의 남자들이다. 가끔 병을 고치거나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에 여자가 나오는 경우는 자신이 아니라 병에 걸려 위험한 상태에 놓인 아들이나 딸을 위해 치유 능력을 지닌 분을 찾아간 때이다.
이쯤에서 여자들이 자신의 질병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치유를 청하기 쉽지 않았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질병은 흔히 죄와 연결되었다. 죄로 말미암아 장애나 질병을 얻는다고 여겼으며, 아울러 여자의 생명은 남자의 생명보다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었다.
치유를 위한 용기와 접촉
그런데도 자신을 괴롭히는 질병을 고치려고 용기를 낸 여자가 있다. 12년 동안 하혈하면 여자다(마르 5,25-34 참조). 유다교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부정한 상태를 뜻하였고(레위15,19.25 참조), 요세푸스는 월경하는 여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전한다(「유다 고대사」, 5.227 참조).
갖은 고생을 하며 여러 의사를 숱하게 찾아다녀도 아무 효험을 보지 못한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분을 뵈러 간다. 그리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댄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5,28).
‘접촉’에 따른 질병의 치유라는 믿음은 그리스 세계에서 낯설지 않았다. 치유가를 특별한 힘을 지닌 인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접촉에 마른 치유는 앞에서 언급한 구약의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의 치유 활동에서도 볼 수 있다.
예수님과 접촉하는 일은 정결법을 위반하는 것인데도 이를 무릅쓸 만큼 여자의 상태는 심각하였고 그의 행동은 필사적이었다. 마침내 그의 믿음과 용기가 예수님의 사랑과 만나 12년 동안의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질병에서 벗어나 해방된다.
이 이야기는 여자의 믿음과 예수님의 초월적 치유 능력을 강조하지만(“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34절]), 많은 사람 앞에서 예수님께 떳떳이 간청하지 못하고 뒤에서 슬그머니 옷자락을 만질 수밖에 없었던 그의 처지와 당시의 문화도 엿볼 수 있다.
마르타와 마리아
마르타와 마리아는 자매이며 라자로의 누이들이다. 성경에서 마르타와 마리아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묘사된다. 특히 루카 복음서에서 마르타는 칭찬받는 여동생 마리아와 대비되게 그려진다. 아람어로 마르타는 ‘주인’의 여성형으로 ‘여주인, 부인’을 뜻하므로 그는 마리아의 언니였을 것이다. 마르타가 앞장서서 손님 시중을 들고 ‘그 집의 여주인’답게 행세하며 본문에서 그 집이 마르타의 집이라고 서술하는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38-42).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마르타는 영성적인 일에 관심을 기울인 동생 마리아와 달리, 인간의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필요한 일들을 염려했다는 이유로 그의 가치가 평가절하된 편이다. 이처럼 기존의 시각은 마리아에게서 구현된 관상 생활을 칭송하고 마르타에게서 표현된 실천 생활보다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현대에는 마르타의 모습을 새롭게 조명한다. 인간 삶에서 노동은 그 자체로 중요하고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렇다면 마르타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실천에 대한 폄하가 아니라 노동이라는 삶의 현장에 몰두하여 더 중요한 것을 잊어버릴 위험성, 곧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예수님의 삶 또한 마르타의 그것처럼 실천 생활이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과 당신만의 시간인 기도를 통해 힘을 얻고, 당신을 기다리는 세상으로 다시 나가신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이었다.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당신께 힘을 얻고 고침을 받아 새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내어 주신 삶이다.
우리 안의 마르타와 마리아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위험에 놓인 생명을 살리려고 전쟁터 최전선에서 헌신하는 간호사들에게서 마르타를 본다. 의사들이 환자의 상태를 진단하고 그에 맞는 처방을 내린다면, 그다음 환자들 옆에 있는 이들은 간호사들이다. 손님을 맞이하고 최선을 다해 시중을 드느라 동분서주하는 마르타를, 코로나 전쟁터에서 고군분투하는 간호사들에 비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들도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 격리된 채 홀로 질병과 싸우는 이들의 손발이 되어 그들을 보살피는 간호사들. 그들이 가족의 위로와 격려라는 치유의 힘을 얻도록 전화로 서로를 연결해주는 중개자이자 비록 방호복 속에서지만 그들과 직접 접촉하며 치유의 힘을 불어넣어 주는 치유가이다. 열두 해 동안 피 흘리던 여자가 필사적으로 만진 예수님의 옷자락이 바로 그들이다.
누군가를 살리려고 최선을 다하는 간호사, 곧 마르타가 있다면, 예수님 발치에서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의 역할을 맡은 이들도 있다. 최전선에서 바이러스와 싸우지는 않으나, 오늘 우리가 마주한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이들이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반성하며 숙고하는 마리아다.
마르타의 수고에 감사하며 예수님께 지혜를 구하고 우리가 해야 할 바를 찾는다. 서로를 보호하고 지키고자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 있지만, 육체의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마음으로 만나 저마다 이어진다. 전방에서 질병과 싸우는 이들과 함께하며 예수님의 치유를 직접 실천하는 마르타와 방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마리아가 바로 우리이다.
마르타와 마리아 모두를 사랑하셨던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굽어보시고 치유의 옷자락을 내어 주시며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시기를 두 손 모아 청한다.
* 강선남 헬레나 -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석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신약학 전공)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교황 프란치스코: 새 시대의 응답자」, 「성경의 인물들」, 「교부들의 성경 주해, 탈출기-신명기」 등의 역서를 냈다.
[경향잡지, 2020년 5월호, 강선남 헬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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