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신약 성경 다시 읽기: 지금, 그리고 여기 - 2테살로니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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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0-07-14 | 조회수7,329 | 추천수0 | |
[신약 성경 다시 읽기] 지금, 그리고 여기 - 2테살로니카
지금까지 바오로가 직접 썼다고 여겨지는 편지들을 읽었습니다. 이제 바오로의 친서인지 아닌지 논란이 되는 여섯 개의 편지를 읽어나갈 참입니다.(2테살, 콜로새서, 에페소서, 1.2티모테오서, 티토서) 여섯 개의 편지는 바오로의 문체나 신학적 사상, 그리고 시대적 배경과 결을 달리하는 요소들을 보여주고 있어 바오로가 직접 썼다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것들입니다. 아마도 바오로가 순교한 후, 그 빈자리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혹은 그 아쉬움 속에 발생하는 교회 공동체의 여러 문제들을 바오로의 권위를 통해 조절하고 고쳐나가기 위해 쓰여진 편지가 아닌가 추정됩니다.
대개 ‘위경’이라고 하지요. 유명인의 이름을 빌려, 그의 사상과 가르침을 제 삶의 자리에서 다시 사유하여 글로 남긴 작품을 ‘위경’이라 합니다. 1세기 당시 사회에서 ‘위경’의 기록은 흔한 것이었고, 사도 바오로의 교회 내 권위도 상당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사도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싶어 했고, 그 결과로 여섯 개의 편지가 나타난 것입니다. 여섯 개의 편지가 위경으로 남지 않고 신앙 공동체의 정경 안으로 들어온 것은 사도 바오로가 직접 썼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참된 신앙의 가르침에 합당한가, 아닌가의 문제를 더 중요하게 여긴 교회의 신앙감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여섯 개의 편지는 대략 70년에서 100년경 사이에 쓰여졌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보다 보편화되고 조직화되어 가는 시절이었지요. 특정 공동체나 구체적 사안에 대한 구체적 가르침보다는 많은 공동체가 함께 읽고 고민해볼 수 있는 주제나 가르침으로 여섯 편지는 채워져 있습니다. 지역 교회보다 보편적 교회에 통용되는, 누구나 함께 사유해야 할 참된 가르침이 사도 바오로의 이름을 빌려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먼저 테살로니카 2서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9세기부터 테살로니카 2서의 참된 저자가 누구인지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 논란을 통해 테살로니카 2서를 공부한다는 것은 1서와 어떤 점에서 유사하고 또 어떤 면에서 다른지 묻고 답하는 지난한 작업이 되었습니다. 물론 19세기 이전까지 테살로니카 1서와 2서는 사도 바오로의 작품으로 여겼지요. 테살로니카 2서의 인사말에 바오로와 실바누스, 그리고 티모테오가 등장하는데, 바오로의 친서인 테살로니카 1서에도 똑같이 나타나고, 무엇보다 2테살 3,17에 바오로가 직접 이 편지를 쓴다고까지 적혀있으니 테살로니카 2서를 바오로의 친서인지 의심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신학적 주제와 관련해서 테살로니카 2서의 친저성은 더욱 문제가 됩니다. 특별히 테살로니카 2서에 나타난 종말에 대한 인식은 1서의 것과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1테살 4,13-18과 2테살 2,1-12을 비교해 보세요.) 테살로니카 1서에서 발견되지 않는 단어들이 테살로니카 2서에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배교(아포스타시아)’, ‘무법자(호 안트로포스 테스 아노미아스)’, 그리고 ‘반대자(우리말 번역은 ‘맞서는 이’로 되어 있습니다.) 등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단어들은 묵시문학적 표현들로, 1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더 잦게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60년 중반에 순교했으니, 묵시문학적 표현들과는 시간적 간극이 있는 것이지요. 더불어 테살로니카 1서에서는 주님의 재림이 곧 일어날 사건처럼 묘사되지만, 테살로니카 2서에서는 그 재림이 이미 왔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을 드러내기도 하니(2테살 2,2), 주님의 재림에 대한 테살로니카 1서와 2서의 온도차를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가 살아 있을 때는 긴박한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던 교회가 바오로 사후 주님의 재림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그래서 재림에 대한 믿음이 옅어져가는 시대적 분위기가 테살로니카 2서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아마 테살로니카 1서에서 언급된 주님의 재림에 대해 잘못 이해한 설교가들이 묵시주의적인 사상과 뒤섞어 그리스도교의 참된 가르침을 왜곡한 듯 합니다. 주님이 여기에 이미 오셨다, 이미 우리는 구원받았다, 이 기쁨을 마음껏 드러내자 등등의 묵시주의적 ‘열광’에 빠져 신앙인들을 선동하려든 것이지요.
문제는 신앙인들의 삶이 주님의 재림이나 구원에 맞갖느냐에 있습니다. 감나무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감을 기다리듯 주님의 재림을 이해하는 것을 테살로니카 2서는 강하게 질타합니다. 이른바 구원에 대한 과도한 낙관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 신앙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구체적 삶을 살아내는 것이지 저 세상에 대한 환상이나 지금 삶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로 형성되는 자아도취적 망상이 아닌 것이지요. 무릇 신앙은 배고프고 부족하고 겸허한 이들의 특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잘났다 싶은 것이 있는 이에게서 교만과 아집의 어두움이 느껴지곤 합니다. 이쯤이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성공주의적 신앙관 역시 죄인임을 고백하며 제 삶을 되돌아 보고 주님을 만나는데 행여 부족함이 없는지 살피는 신앙인에겐 어울리지 않는 불편함이겠지요. 신앙은 적극적으로 제 삶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실천하는 자아실현의 여정인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내일만 쳐다보는 묵시주의적 열풍에 갇힌 이들을 향해, 또한 이미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섣불리 믿으며 신앙적 삶을 게을리하는 이들을 향해 테살로니카 2서는 자기 일에 전념하고 제 일을 스스로 열심히 하라고 다그칩니다.(2테살 3,6-15) 심지어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고까지 모질게 이야기합니다.
사실 테살로니카 교회는 박해와 환난 속을 살아갔습니다.(2테살 1,4.6) 주님은 더디 오시고 삶은 팍팍하니 신앙을 지키는 데 얼마간의 회의와 갈등이 테살로니카 교회에 상존한 것이지요. 힘들면 삶의 시간이 급해집니다.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가길, 고통과 슬픔의 시간이 얼른 끝나길 바라니까요. 그러나 테살로니카 2서는 박해에 대한 이해를 다르게 제시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2테살 1,5) 박해의 시간은 신앙인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할 수 있는 이로 거듭나는 데 필요한 시간입니다. ‘합당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카탁시오오’는 ‘가치 있는 존재’를 언급하는데 사용됩니다. 가치 있는 신앙인은 지금의 박해를 기꺼이 짊어지는 이들이지, 박해를 두려워해서 내일의 가치 없는 희망과 모호한 긍정만을 갈구하지는 않습니다.
아직까지 주님께선 우리의 눈앞에 선명히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해 급한 마음으로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하는 시간을 우리는 버티며 살고 있습니다.(2테살 2,2-3 참조) 주님의 재림은 도둑처럼 온다고 하지요. 도둑을 지켜내는 마음은 언제, 어느 때라는 결정적 시간에 얽매인 게 아니라 지속적이고 지난한, 그래서 긴장을 늦추지 않는 삶의 일상과 맞닿아 있어야 합니다. 끝의 시간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끝의 시간을 지금 이 자리에서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끝을 위해 지금을 버리고 포기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일과 제 삶을 끝 시간으로 알고 믿으며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으로부터 세상 종말에 심판하러 나타나실 예수님까지 그 긴 시간 속에서 신앙인이 살아내는 매 순간의 노력과 희생은 세상 처음과 끝을 이어주는 그야말로 오작교, 그 자체입니다.
[월간빛, 2020년 7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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