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성경 해설묵상] 사도행전 7장---송영진 모세 신부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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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타한인성당 | 작성일2013-10-21 | 조회수2,290 | 추천수1 | |
<사도행전 7장>
7장
<1절-53절 : 스테파노가 최고 의회에서 설교하다>
1절..<대사제가 "그게 사실이오?" 하고 묻자>--스테파노는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죄로 고발당했습니다. 대사제는 재판을 하기 위해 우선 피고를 심문합니다. 스테파노의 답변은 2절에서 53절까지 상당히 긴 내용의 설교로 되어 있는데 일부 학자들 은 이것을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피고의 답변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아마도 다른 기회에 스테파노가 설교한 것을 루카가 이 자리에 삽입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 러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루카는 스테파노가 최고의회에서 마치 설교하 는 것처럼 답변한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2절..<스테파노가 말하였다. "부형 여러분, 들어 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자 리를 잡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느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스테파노의 설교를 보면 내용의 대부분이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한 것인데, 이것은 이스라 엘의 역사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을 배반하고 예언자를 박해한 역사를 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설교의 결론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언자를 박해하고 죽인 것처럼 구세주이신 예수님도 죽였다는 것입니다. 스테파노는 최고의회 의원들을 '부형 여러분'이라고 부르면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이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형제들과 아버지들인 남자들이여'입니다. 유대인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자기들은 모두 형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스테파노가 청중들을 '형제' 라고 부르 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유대교와 같은 하느님을 믿고 같은 조상의 후손들이라는 것 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을 '우리 조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아버지' 라는 존칭을 사용한 것은 최고의회의 공적인 권위를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스테파노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처음 받았을 때의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창 세기 12장을 보면,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신 곳이 메소포타미아 가 아니라 '하란'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또 창세기 15장 7절을 보면 하느 님께서 아브라함을 칼데아 우르에서 이끌어 냈다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신 곳이 하란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 다. 어떻든 여기서 스테파노는 아브라함이 '하란에 자리를 잡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 나타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테파노의 설교를 보면 구약성경과 좀 다른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스테파노가 구약 성경을 원문의 구절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뜻으로 인용했기 때문이고, 또 스테파노 가 히브리어 성경이 아니라 그리스어 성경을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 던 구약성경에는 히브리어로 된 것도 있었고, 기원전 3세기경에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성경이 세부적인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구약성경은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 성경의 내용과 스테파노가 설교에서 인용한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영광의 하느님'이라는 존칭은 하느님의 전지전능, 거룩함, 완전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 등을 모두 포함하는 존칭인데,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인도하신 하느님 께 드리는 특별한 존칭이었습니다.
3절..<'네 고향과 친족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하고 이르셨습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12장 1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메소포타미아가 아니라 하란 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계획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 에 순종하고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갔습니다.
4절..<그리하여 그는 칼데아인들의 땅을 떠나 하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 지가 죽은 뒤, 하느님께서는 그를 하란에서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땅으로 옮겨 오 게 하셨습니다.>--이 내용은 창세기 11장 31절부터 12장 9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 니다.
5절..<그때에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곳에서는 한 치의 땅도 상속 재산으로 주지 않 으셨습니다. 다만 그가 아직 자식이 없는데도, 그와 그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이 땅을 소 유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23장 16절-20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막펠라 밭과 그 안에 있는 동굴을 은 사백 세켈을 주고 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스테 파노가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한 치의 땅도 상속 재산으로 주지 않으셨다.' 라고 하 는 것은 정식 영토로서의 땅이 없었다는 뜻으로 한 말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창세기 17장 8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6절-7절..(6)<하느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후손은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 살이하며 사백 년 동안 종살이를 하고 학대를 받을 것이다.> (7)<그러나 그의 후손들이 종이 되어 섬길 민족을 나는 심판하겠다.' 하느님께서 또 이르셨습니다. '그 뒤에 그들은 빠져나와 이곳에서 나를 섬길 것이다.'>--이집트 종살이에 관한 말씀과 이집트 민족을 심 판하겠다는 말씀은 창세기 15장 13절-1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나를 섬길 것이 라는 말씀은 탈출기 3장 1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이집트에서의 종살이 기간 이 사백 년으로 되어 있는데, 탈출기 12장 40절에는 사백 삼십 년으로 되어 있습니다.
8절..<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할례의 계약을 맺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여드레째 되는 날에 할례를 베풀었으며, 이사악은 야곱에게, 또 야곱은 열 두 선조에게 할례를 베풀었습니다.>--할례의 계약과 할례에 관한 규정은 창세기 17장 9절-14절에 있습니다. 이 규정대로 모든 남자 아이는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 야 했습니다. 또 아브라함이 이사악에게 할례를 베푼 이야기는 창세기 21장 4절에 있습 니다. 할례는 아버지의 권리이고 의무이기 때문에 이사악은 야곱에게, 또 야곱은 열두 아 들에게 당연히 할례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9절-15절..(9)<그런데 이 선조들은 요셉을 시기한 나머지 이집트에 팔아넘겨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면서,> (10)<모든 재난에서 그를 구하시고 이집트 임 금 파라오 앞에서 그에게 은총과 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하여 파라오는 그에게 이집트 와 자기의 온 집안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11)<그때에 온 이집트와 가나안에 기근이 닥쳐 재난이 극심하였는데, 우리 조상들도 양식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12)<야곱은 이집 트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우리 조상들을 처음으로 그리 보냈습니다.> (13)<그리고 두 번째로 보냈을 때에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기가 누구인지 밝혔습니다. 그리하여 파라오 도 요셉의 가족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14)<요셉은 사람을 보내어 아버지 야곱과 일흔다 섯 명이나 되는 자기 친족을 모두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15)<그래서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야곱도 죽고 우리 조상들도 죽었습니다.>--9절-15절은 창세기 37장부터 49장까지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여기서 스테파노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아넘겼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면서 모든 재난에서 그를 구하셨다는 것'과 또 형제들의 박해를 받았던 요셉이 가족과 민족의 구원자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 니다. 이것은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 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박해하고 죽였지만, 예수님은 민족과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을 두 번째로 만났을 때에야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 밝혔다는 것을 스테파 노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가 되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게 된다는 것 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집트로 내려간 친족이 모두 일흔다섯 명으로 되어 있는데, 창세기 46장 27절 에는 일흔 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16절..<그들의 유해는 스켐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스켐에 있는 하모르의 아들들에게 은전 을 주고 사 둔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이 구절은 구약 성경의 내용과 많이 다릅니다. 아브라함이 은전을 주고 산 땅은 헤브론 맞은쪽 막펠라 밭과 그 안에 있는 동굴(창세 23,17-20)입니다. 스켐에 있는 하모르의 아들들에게 땅을 산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야곱(창세 33,18-20)입니다. 야곱이 그 땅을 산 것은 묘지로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단 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야곱은 막펠라 밭에 있는 동굴에 묻혔습니다(창세 50,13). 요 셉은 스켐에 있는 땅에 묻혔지만(여호 24,32), 요셉의 형제들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런 차이에 대해서 어떤 학자는 스테파노가 아브라함이 한 일과 야곱이 한 일을 혼동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다른 학자들은 구약성경과는 다른 전승을 인용한 것이라고 생 각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2장 7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위해 스켐에 제단을 쌓았다는 말이 나오는데, 남의 땅에다가 제단을 쌓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아 브라함이 그 땅을 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테파노의 말이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고, 다른 전승을 인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러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17절-22절..(17)<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짐하신 약속이 실현될 때가 다가오자, 우리 백 성은 이집트에서 늘어나고 불어났습니다.> (18)<그러다가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임금 이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19)<그자는 우리 겨레에게 간계를 부리고 우리 조상 들을 학대하여, 갓난아기들을 버리게 하고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20)<그 때에 모세가 태어났는데, 그는 하느님 보시기에 귀여운 아기였습니다. 그는 석 달 동안 아버지 집에서 자라다가> (21)<버려졌는데, 파라오의 딸이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키웠습 니다.> (22)<그리하여 모세는 이집트인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힘이 있었습니 다.>--17절-22절은 탈출기 1장 1절부터 2장 10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스테 파노는 사람들이 모세를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즉 모세는 예수 님을 예시하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17절의 '약속이 실현될 때가 다가오자' 라는 말은 마르코복음 1장 15절의 '때가 차서 하 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해방되는 모습은 예수님의 인류 구원을 미리 상징하고 예 시한다는 것입니다. 탈출기에서 갓난아기를 죽이거나 버리는 장면들은 아기 예수님이 헤로데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을 가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22절의 '모세는...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힘이 있었다.' 라는 말은 탈출기에는 없 고 스테파노 자신의 말인데, 이 말은 루카복음 24장 19절에서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라고 예수님에 관해 표현한 말과 거의 같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모세는 예수님을 예시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23절-29절..(23)<마흔 살이 다 되었을 때, 그의 마음에 자기 동족 이스라엘 자손들을 찾아 볼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24)<어느 날 그는 자기 동족 가운데 한 사람이 부당한 일을 겪는 것을 보고 이집트 사람을 쳐 죽여, 학대 받은 그 사람을 도와주고 그를 위하여 앙갚 음을 해 주었습니다.> (25)<그는 하느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동족들에게 구원을 베푸신 다는 것을 동족들이 깨달을 줄로 생각하였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26)<이튿 날 모세는 서로 싸우고 있는 동족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평화롭게 화해시키려고, '여보시 오, 당신들은 한 형제라오. 그런데 왜 서로들 해를 끼치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27)<그러자 동료에게 해를 입히던 자가 모세를 떼밀며 대꾸하였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 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28)<어제 이집트인을 죽였듯이 나도 죽일 작정이오?'> (29)<이 말에 모세는 달아나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살이하며 아들 둘을 낳았 습니다.>--23절-29절은 탈출기 2장 11절부터 2장 22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여기서 스테파노가 강조하고 있는 말은 25절인데, 동족들이 모세를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라는 말은 탈출기 2장 1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모세의 두 아들은 게르솜과 엘리에제르입니다(탈출 18,3).
30절-34절..(30)<사십 년이 다 찼을 때, 시나이 산 광야에서 천사가 떨기나무 불길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31)<그것을 본 모세는 그 광경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자세 히 보려고 가까이 가는데 주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32)<'나는 네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다.' 모세는 몸이 떨려 자세히 볼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33)<그때에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습니다.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 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34)<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그들의 신음 소리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구해 내려고 내려왔다. 이제 가 거라. 내가 너를 이집트로 보낸다.'>--30절-34절은 탈출기 3장 1절-10절을 요약한 것입 니다. 스테파노는 앞의 23절에서는 모세가 40세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뜻을 세웠다 고 말하고 있고, 30절에서는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40년을 산 뒤에 시나이 산에서 하느 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또 뒤의 36절에서는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백성 들을 인도했다고 말합니다. 신명기 34장 7절을 보면 모세는 120세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전승에서 온 것인데, 모세의 생애를 40년씩 끊어서 세 개의 기간으로 나눈 것은 모세의 온 생애는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한 것이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35절-38절..(35)<이 모세를, '누가 당신을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하며 사람 들이 배척한 이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떨기나무에 나타난 그 천사를 시켜 지도자와 해방 자로 보내셨습니다.> (36)<이 사람이 이집트 땅과 홍해에서, 또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키며 그들을 이끌어 냈습니다.> (37)<'하느님께서는 너희 동족 가운 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 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한 이가 바로 이 모세입니다.> (38)<이 사람은 광야의 집회 때, 시나이 산에서 자기에게 말하는 천사와 우리 조상들 사이에 중개자가 되어,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 니다.>--35절-38절은 모세를 칭송하는 찬가입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배척했지만 모세는 하느님이 보내신 지도자요 해방자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사람이 고,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스테파노는 이처 럼 모세를 칭송하면서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는 자기의 죄목을 강력하게 반박하고 있습 니다. '해방자' 라는 말은 노예의 몸값을 대신 지불하고 노예를 해방시켜 주는 은인을 뜻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스테파노는 모세에 관한 말을 하면서 사실은 예수님에 관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적과 표징들'이라는 말도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생각하게 합니다. 36절에는 '홍해'로 되어 있는데, 탈출기에는 '갈대 바다'로 되어 있습니다(탈출 15,4.22). 갈대 바다는 홍해의 한 부분으로 홍해 위쪽에 있는 '바알 츠폰' 앞바다(수에즈 운하와 연 결된 바다)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37절의 '하느님께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 라는 예언은 신명기 18장 15절을 인용한 것인데, 이 예언은 이미 베드로가 앞의 3장 22절에서도 인용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예언자는 예수님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스테파노는 모세가 예수님 에 대해 예언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스테파노는 모세가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중개자였다고 강조하는데, 이것은 모세 덕분 에 백성들이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천사와 우리 조상들 사이에' 라는 말은 사실상 '하느님과 우리 조상들 사이에' 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직접 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천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과 사람 사 이의 중개자(중재자) 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살아 있는 말씀'은 율법을 뜻합니다. 그런데 앞의 5장 20절에서 천사가 사도들을 감옥에서 데리고 나올 때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라고 명령한 일이 있습니다. 5장 20절에서 말한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의 복음을 뜻했습니다. 따라서 지금 38절에서 스테파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모세는 예수님을 예시하는 인물, 또 는 예수님은 백성을 구원하는 새로운 모세라는 것입니다.
39절-41절..(39)<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그에게 순종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를 제쳐 놓고 마음은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40)<그러면서 아론에게 말하였 습니다. '앞장서서 우리를 이끄실 신들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저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41)<그때에 그들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작품들을 놓고 즐거워하였습니 다.>--여기서부터 스테파노의 답변이 공격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스테파노는 39절에서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해방자인 모세에게 순종하지 않았고, 이집트의 노예 생활로 되돌아 가려고 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0절에서는 유대인들의 우상 숭배를 말하고 있습니다. 40절은 탈출기 32장 1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41절은 탈출기 32장 4절-6절을 요약한 것입니다. 스테파노는 지금 '너희는 율법을 모독했다는 죄로 나를 재판하고 있지만, 율법을 모독한 것은 바로 너희들이다.' 라는 뜻으로 탈출기의 우상 숭배 장면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42절-43절..(42)<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시고, 그들이 하늘의 군대를 섬기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는 예언자들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 가 광야에서 지낸 사십 년 동안 나에게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친 적이 있느냐?> (43)<너희는 오히려 몰록의 천막과 너희 래판 신의 별을, 곧 너희가 경배하려고 스스로 만들어 낸 상들을 떠메고 다녔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바빌론 너머로 유배를 보내리 라.'>--이스라엘 백성들은 탈출기에 나오는 송아지 숭배 외에도 온갖 우상 숭배에 빠졌 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셨습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습 니다. 여기서 '하늘의 군대'란 '하늘의 별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늘의 군대를 섬긴다는 말은 하늘의 별들을 섬기는 우상 숭배에 빠졌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인용된 구절은 아모스서 5장 25절-27절입니다. 42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낸 사십 년 동안 하느님께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 친 적이 없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사실은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금송아지 같은 우상에게도 제물을 바침으로써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을 모독했습니다. 이 것은 진정한 제물을 바친 적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43절의 '몰록'은 가나안과 페니키아 지방에서 섬기던 태양신이고, '래판 신'은 별신입니다. 43절에서 '몰록의 천막과 래판 신의 별, 곧 스스로 만들어 낸 상들'을 떠메고 다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줄곧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음을 비판하는 말입니다. 실제로는 '증언의 천막'과 '계약의 궤'를 떠메고 다녔는데,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겉으로만 하느 님을 섬기는 것은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해도 그곳에서 우상을 섬기면 그 성전은 우상의 신전으로 전락하 게 되는 것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우상 숭배를 계속한다면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백성들은 귀양살이를 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런데 아모스서 원문에는 '다마스쿠스 너머로 유배를 보내리 라.' 라고 되어 있는데, 스테파노는 '바빌론 너머로 유배를 보내리라.' 라고 하고 있습니 다. 이것은 구약성경을 문자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뜻으로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즉 스테 파노는 도시의 이름보다는 '유배' 라는 말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가 멸망했을 때, 백성들은 다마스쿠스 너머로도, 바빌론 너머로도 끌려갔고 긴 세월 동안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44절-50절..(44)<우리 조상들은 광야에 있을 때에 증언의 천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 에게 말씀하신 분께서 지시하신 대로, 자기가 본 모형에 따라 모세가 만든 것입니다.> (45)<이 천막을 물려받은 우리 조상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들 앞에서 쫓아내신 다른 민족 들의 땅을 차지할 때, 여호수아와 함께 그것을 가지고 들어와 다윗 시대까지 이르렀습니 다.> (46)<다윗은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사람으로서, 야곱 집안을 위하여 하느님의 거처 를 마련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지만,> (47)<하느님을 위하여 집을 지은 사람은 솔로몬이 었습니다.> (48)<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는 살지 않으십 니다. 이는 예언자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49)<'하늘이 나의 어좌요 땅이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 주겠다는 것이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또 나의 안식 처가 어디 있느냐?> (50)<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지 않았느냐?>--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떠난 뒤에 광야에서 지낼 때 '성막'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 성막은 이동식 성 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막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었기 때문에 '만남의 천막'이라고 도 불렀고(탈출 40장), '증언판을 모신 천막'이라고도 불렀습니다(민수 1장). 44절의 '증언 의 천막'이라는 말은 '증언판을 모신 천막'이라는 뜻입니다. '증언판'이란 십계명을 기록한 돌판입니다(탈출 31,18). 하느님은 모세에게 성막의 모형을 보여주셨고 모세는 그 모형대 로 성막을 만들었습니다(탈출 26장). 45절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까지 그 성막이 계속 성전 역할을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어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2사무 7장). 49절과 50절은 이사야서 66장 1절-2절을 인용한 것인데, 원래 이 말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뒤에 하느님께 바친 기도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1열왕 8,27). 48절은 스테파 노가 49절과 50절을 부연 설명한 말입니다. 스테파노가 성막과 성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성전이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 아 니라 상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전은 거룩한 곳입니 다. 그러나 하느님을 올바르게 섬기지 않으면서 성전만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미신 일 뿐입니다. 성전이 없어도 하느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솔로몬 이전에는 성전 대신에 성막만 있었을 뿐이고, 모세 이전에는 성막조차 없었습니다. 따라서 성전은 그렇게 절대 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 스테파노의 설교입니다.
51절..<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 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습니다.>--지금까지 구약 성경을 인 용하면서 간접적으로 공격했던 스테파노는 여기에서는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유대인들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말은 공동번역 성서가 번역 한 대로 '고집이 세고, 이교도의 마음과 귀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서 4장 4절에 '마음의 할례' 라는 표현이 나오고 , 예레미야서 6장 10절에 '귀의 할례'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른 예언자들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 했다는 말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교도의 마음이라는 뜻이고, 귀의 할례를 받지 못했다 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교도들과 같다는 뜻입니다. 목이 뻣뻣하다는 것은 고집이 세다는 뜻인데, 자기 잘못을 고치려고 하지 않고 계속 죄를 짓고 있다는 뜻입니다.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 라는 말은 '줄곧 하느님을 거역하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비슷한 표현이 이사야서 63장 10절에 나옵니다. 여기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살아 계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뜻합니다. 스테파노는 앞에서는 계속 '우리 조상들'이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서는 '여러분의 조상들'이 라고 표현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너희' 를 분리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스테파노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다.' 라고 비난하고 있는데, 하느님을 거역 하고, 예언자를 박해하고 죽인 점에서 똑같다는 것입니다.
52절..<예언자들 가운데 여러분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그 의로우 신 분을 배신하고 죽였습니다.>--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이 아벨에서부터 즈카르야까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음을 비판하신 일이 있습니다(루카 11,47-51). 스테파노는 유대 인들의 조상들은 구세주를 예언한 예언자들을 죽였고, 지금 유대인들은 예언자들이 예언 했던 구세주를 죽였으니 조상들과 후손들이 똑같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유대인들이 조상들보다 더한 살인자라는 비판입니다. 여기서 '의로우신 분'이란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인데, 하느님의 의로움, 즉 구 원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53절..<여러분은 천사들의 지시에 따라 율법을 받고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스테 파노는 율법을 모독했다는 죄로 고발당했는데, 지금 그는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예언자들의 예언을 비롯 해서 구약의 모든 계시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은 율 법을 지키지 않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에게서 율법을 받았다는 말은 사실상 하느님에게서 받았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께서 천사를 시켜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스테파노가 '여러분 은 천사들의 지시에 따라 율법을 받았다.' 라고 표현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입니다.
<54절-60절 : 스테파노가 순교하다>
54절..<그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화가 치밀어 스테파노에게 이를 갈았다.>--살기 위해 변론을 해야 할 피고인 스테파노가 오히려 검사처럼 재판관들의 죄를 고발하고 비판하고 있으니 최고의회 의원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앞의 51절에서 스테파 노가 말한 대로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스테파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더 화를 내고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55절..<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 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스테파노는 성령을 충만히 받고 하느 님의 영광과 예수님을 봅니다. 이 구절은 앞의 6장 15절의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라는 구절과 연결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 그 빛을 받아서 그의 얼굴이 천 사의 얼굴처럼 빛났던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보면 이처럼 순교 전에 하느님의 영광과 예수님을 보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순교자들의 죽음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고, 그들의 죽음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응답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성령이 충만하였다는 말은 성령이 스테파노에게 가득 내려서 하늘을 잘 볼 수 있도록 인 도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직접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스테파노가 본 것은 하느 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은 승천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최고의회에서 재판 을 받을 때에 '사람의 아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을 것이다.' 라고 예고하신 적이 있습니다(루카 22,69). 스테파노는 예수님의 예고가 실현되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 데 여기서는 예수님의 예고와는 달리 예수님이 앉아 계시지 않고 서 계십니다. 이것은 예 수님이 스테파노의 변호인, 또는 증인으로 그의 순교에 참여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 로 해석됩니다.
56절..<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스테파노는 자기가 본 것을 그대로 '증언'합니다. 이것 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증언이 결정적으 로 그의 죽음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즉 지금까지 길게 설교한 것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언한 마지막 말 한마디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어에서 '증언'과 '순교'는 같은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순교자는 자기 목숨을 바쳐서 예수님을 증언한 사람입니다. '하늘이 열려 있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스테파노를 받아들이기 위해 하늘의 문을 열어 주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원래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가리켜서 사용하던 호칭인데,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서 사용한 예는 지금 이곳의 스 테파노가 유일합니다. 스테파노가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스테파노를 구원하셨다는 뜻의 고백입니다. 즉 스테파노의 말은 '나는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구원을 받았다.' 라는 뜻의 선언입니다.
57절..<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사 람들이 큰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그들이 대단히 분노했음을 나타냅니다. 귀를 막았다는 것은 스테파노가 하늘과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스테 파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자기들까지 신성모독죄를 짓지 않 기 위해서, 즉 스테파노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귀를 막은 것입니다. 일제히 스테파노 에게 달려들었다는 것은 이제 법적인 절차 따위는 모두 무시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절차 같은 것은 생략하고 스테파노를 죽이려고 합니다.
58절..<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 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레위기 24장 14절에 하느님을 모독한 자를 처벌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저주한 그자를 진영 밖으로 끌고 가서, 그가 저주하는 것을 들은 이들 이 모두 그의 머리에 손을 얹게 한 다음, 온 공동체가 그에게 돌을 던지게 하여라." 여기 서 '저주' 라는 말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뜻합니다. 지금 최고의회와 유대인들은 스 테파노가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레위기 율법대로 스테파노를 처형합니다. 우선 그를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고 갔고, 증인들부터 그에게 돌을 던집니다. 원래 사형수는 로마 총독에게 넘겨서 로마 총독의 재판을 받아야 했고, 사형 집행도 로마 총독이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절차대로 사형 당했습니다. 그러나 지 금 스테파노의 경우에는 그런 절차가 완전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이 직접 나서서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졌다고 볼 수는 없고, 분노한 군중에게 스테파노를 넘겼을 것입니다. 최고의회 의원들 중에는 가말리엘 같은 온건파도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도 몇 명 있었지만 거의 폭동과 같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전혀 손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인을 처형하기 위해 돌을 던질 때에는 증인이 먼저 돌을 던지게 되어 있었습니다(신명 17,7). 따라서 스테파노를 고발한 사람과 거짓 증언을 한 사람들이 먼저 돌을 던졌을 것 입니다. 그들은 돌을 던질 때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놓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사울, 즉 바오로가 등장합니다. 사울은 아마도 스테파노를 처 형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앞의 6장 9절에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인 사람 들 중에는 킬리키아 출신 사람들도 있었는데 사울은 킬리키아 출신이었습니다. 또 거짓 증인들이 겉옷을 사울의 '발 앞에' 놓았다는 것도 사울의 권위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됩 니다. 앞의 4장 35절에서 신자들이 재산을 바칠 때 사도들의 '발 앞에' 돈을 놓았다는 것 과 같은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또 뒤의 8장 3절을 보면 사울이 주동자가 되어서 교회를 박해하고 있고, 9장 2절을 보면 대사제에게서 신자들을 체포할 수 있는 영장을 받아서 다 마스쿠스로 갑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 아마도 스테파노를 고발하고 처형하는 일을 사울이 지휘했거나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59절..<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 도하였다.>--스테파노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과 거의 같은 말로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저녁 기도 때에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라고 기도했습니 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아버지 하느님께 이 기도를 바쳤고(루카 23,46),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께 이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자신 을 맡긴 것처럼 스테파노도 예수님께 자신을 모두 맡긴 것입니다.
60절..<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 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라고 기도하 시면서 용서와 원수 사랑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스테파노도 예수님을 본받아서 박해자 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바친 후에 숨을 거둡니다. 스테파노가 '무릎을 꿇고... 잠들었다.' 라는 표현은 기도를 하던 자세 그대로 숨을 거두었 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모습 자체가 우리에게는 좋은 묵상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라는 기도는 예수님의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와 같은 뜻의 기도입니다. 스테파노는 이처럼 예수님을 본받아서 용서와 원수 사랑을 실천하면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
<묵상> "마지막, 그리고 시작"
스테파노의 마지막 모습과 마지막 기도는 그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아무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모습과 마지막 말은 자기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어떻게 사느냐? 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살던 모습 그대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느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심판 받는 죄인의 모습으로 설 것인지, 환영 받는 의인의 모습으로 설 것인지... 오늘의 삶이 결정할 것입니다.
또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지옥에만 보내지 말아달라고 애원할 것인지, 하느님을 뵙고 싶어서 이 날만 기다렸다고 할 것인지, 스테파노처럼 박해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할 것인지...
2010. 2. 26. 송영진 모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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