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룩한 전통이라는 뜻에서 ''성전'' 혹은 일반적으로 ''전통''이라고 표현되는 현상의 교회적 의미는 여러 가지다. 교리(敎理), 신앙생활상의 관행, 행동규범, 경신(敬神) 의식. 종교적 체험 등 그리스도교 전체를, 그것이 초창기부터 전해 내려온다는 관점에서 고찰할 때, 우리는 이를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성체성사나 고백성사 전통, 마리아공경 전통 등 교회생활에 있어서 어떤 특정한 분야의 관행이나 교리 등을 따로 놓고. 그 역사적 맥락을 고찰할 때에도 우리는 전통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 말의 가장 일반적이고 널리 알려진 용례는, 기록된 성서의 말씀과 형식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서. 기록되지 않은 형태로 교회의 초창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가르침과 실천적 관행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우선 말할 수 있다.
원래 이 전통이라는 현상은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소위 자연종교까지 포함하는 모든 종교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기능을 한다. 인간의 사회생활을 구성하는 한 현상으로서의 종교가 역사 속에서 계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의식 · 신화 · 종지(宗旨) 등 여러 구체적인 형태들을 통해서 그것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한 순간에 특정한 기억에서 탄생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의 삶 · 죽음 · 부활을 통해서 한번이자 결정적으로 체험된 하느님의 계시(啓示) 위에 서 있는 계시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이 전통이 절대적인 중요성을 띠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가 접하게 된 이 계시를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모든 세대, 모든 지역의 인간들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역할을 바로 이 전통이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전통이라는 것이 교회 내에 존재하느냐의 여부를 따지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이 그리스도교신앙의 다른 요인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주로 전통의 내용이 되는 계시란 무엇이며, 그것을 중심으로 성서와 성전은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질문의 형식으로 제기되었다. 특히 16세기의 교회개혁가들이, 당시 교회생활 안에서 그들의 눈에 인간적일 뿐인 것으로 비쳐진 전통들을 거부하고, 성서만이 소위 계시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사건에서부터 발단이 되어.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열띤 논쟁거리로 등장하였다.
2. 성서 유일주의 내지 충분성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개신교 측의 주장에 대해서 가톨릭의 공식적인 입장을 천명한 것이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였다. 이에 관한 그 공의회 결정문 초안에서는 계시진리가 "일부는 기록된 책들에, 일부는 기록되지 않은 성전들 안에" 들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런 표현들에 반대한 사람들의 의견을 참작하여 공의회가 최종적으로 채택한 결정문은 이렇다. "(공의회는) 이 진리와 가르침이 기록된 책들과 기록되지 않은 성전들 안에 들어 있음을 안다"(Denz. 1501). 소위 계시의 두 가지 원천설을 주장하는 표현임이 분명한 초안을 폐기하고, "기록된 책들과 기록되지 않은 성전들 안에"라는 표현을 채택하기는 했으나,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신학자들은 오랫동안 일반적으로 이 결정문을, 계시의 두 가지 원천설을 옹호하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이 문제는 결국 그리스도교신앙의 규준(規準)으로서 개신교 측의 ''성서만''을 인정하는 입장과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가톨릭신학자들이 주장하던 ''성서와 함께 성전도'' 인정해야 한다는 형태로 제기되어 이 두 가지 입장이 사실상 맞서 왔다. 그래서 양측은 서로 상대방의 주장이 내포하는 문제성을 지적하였다,
먼저 개신교의 성서 유일주의에 대한 가톨릭의 반론은 다음과 같은 점들에 근거해 있었다. 우선, 성서 자체가 모든 계시를 다 간직하고 있다거나 신앙의 유일한 규준이라고 스스로 주장한 사실을 성서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또 성서 양식사(樣式史) 비판 분야에 있어서의 현대적 연구가 밝혀낸 것처럼, 성서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그 전통의 진행 과정에서 산출해낸 산물이다. 히브리와 사도들의 전통이 낳은 문학적 산물이 바로 성서이기 때문에, 그러한 전통이 없었더라면 성서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와 같이 공동체의 전통이 성서를 형성시켰다면, 이런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성서를 올바로 해석하고 여러 가지 구체적인 상황에 적응해서 현실화시키는 단계에 있어서도 그 공동체의 전통이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성전이라는 본래의 배경에서 분리하여 독립시켜 버리면, 실제에 있어서는 성서가 갖는 본래의 가치와 생명력을 탈취하는 결과가 된다. 또 오늘의 성서 각 권들을 같은 시대에 유사한 성격을 띠고 나타난 여러 기록물들로부터 분리하여, 참으로 성령(聖靈)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으로 인정하는 성서 정전(正典) 범위의 확정 작업도, 사도시대 이후의 성전이 해낸 일이었다. 물론 이에 대해서 칼 라너(Karl Rahner)가 지적한대로 정전 범위의 확인을 성서와 성전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한 일반적인 예로 사용할 수는 없는 특수한 경우임을 인정해야겠다. 또 절대다수의 종교개혁가들은 자신들의 믿음과 실천을 위해 성서에만 의존하지는 않고 유아세례 등 성서에서 직접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관행도 받아들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톨릭의 비평가들은 성서를 성전의 배경에서 해석하지 않을 때, 역사적으로 그것이 일치만을 가져오지 않고 수많은 이설(異說)과 상반되는 해석의 대상이 되었음을 상기시키고, 특히 급변하는 사회가 새롭게 제기하는 문제에 성서가 일일이 보편적으로 설득력 있는 답변을 주기를 기대다는 것은 무리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문을 두고 해석해온 가톨릭신학자들의 일반적인 주장에도 문제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트리엔트 공의회는 구원에 관한 모든 진리와 실천규범이 성서와 성전안에 ''들어 있다''고 선언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신학이 계시를 일련의 객관적 진리들의 전달인 것으로 이해할 동안에는 이런 식의 ''들어있다''는 표현이 별로 큰 문제가 없이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이런 사고방식 안에서는 계시진리들이 들어 있는 소위 ''원천''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제기되었고, 성서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입장을 주장하고자 할 때에는 거기에 성전을 첨부하여 이 둘을 물량적(物量的)으로 병치(竝置)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성전의 의미가 대폭 축소되고 말았다. 그래서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신학은 그 공의회의 결정문을 성서와 성전이 질료적(質料的)인 면에서는 각기 다르고 비중에 있어서는 대등한 계시의 두 원천들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가이젤만(J.H. Geiselmann)은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여 비판한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가톨릭신학자들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문을 계시의 두 가지 원천설 주장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고 본다. 성서와 성전을 계시의 두 원천이라는 식으로 물량적인 이해를 하게 된 것은, 계시를 일련의 명제적 진리들로 환원될 수 있는 것처럼 보았던 데에서 비롯되었었다. 오늘날 계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이런 식의 명제적 계시관을 지양하고, 인격체간의 대화 내지 만남에서 그 이해 모형을 찾고 있는 사조 속에서는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갈라진다. 이 새로운 이해지평 안에서, 계시는 우선적으로 지금 당장 신앙으로써 성삼이신 하느님의 삶 안으로 들어오라고 불러주시는 은총에 찬 초대로 이해된다. 이런 구원적 계시는. 인간이 설교를 듣거나 성서를 읽고 성사를 배령하며, 일상생활에서 겪는 잡다한 종류의 어려움에 대응해 나가는 가운데, 하느님으로부터 초대의 소리를 들을 때, 현실적으로 그 앞에 다가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 인간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으로서의 계시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그때그때에 ''발생''하는 것이며 이런 뜻에서는 그것이 책(성서)이나 성전 속에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3. 이런 맥락 안에서 우리는 성서를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리스도교 전통은 풍부한 객관적 자료들을 함유하고 있어서 역사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전통을 다를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교 전통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현실화 혹은 그분 성령의 ''살아 있는 전통''이라는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실상 이 전통이 역사를 통하여 여러 가지 문헌이나 자료들을 산출해 냈던 것도, 바로 이런 측면으로 파악된 전통의 활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료들을 비판적으로 취사선택하여 자기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은 취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버리는 작업을 해낸 것도 그 전통 자체였다. 그렇게 해서 전통은 스스로를 결정화(結晶化) 하기도 했는데,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신구약 성서로서 그것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기본 형태이다. 신약성서의 경우, 첫 증인들이 차츰 사라져감에 따라 그들의 증언을 문서화할 필요를 느낀 결과 이를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복음사가들이 이를 위해 자료를 수집, 정리, 편집한 방식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과거의 한 사건에 대한 흔적을 단순히 객관적으로 수집해 둔다기보다, 살아 있는 전통 속에서 그 사건에 그들이 직접 참여하고 있다는 자각을 가지고, 그들 나름대로 이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교 전통이 단순히 이 기록(성서)만을 전해준다거나, 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순수 복음에 대한 유일하고 정확한 표현으로 여겨 기계적으로 반복하기에만 급급한다면, 이는 그 전통이 스스로에 대해서 모순 관계에 빠지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기록된 책으로서의 성서가 질료적인 면에서 충분성을 지니고, 그런 만큼 어떤 진리를 두고 계시진리로서의 그 정통성을 판가름하기 위한 규준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지만, 성서는 무엇보다 스스로가 증언하고 있는 하느님의 현존(現存)을 전제로 해서만 올바로 이해된다. 즉 성령 안에 항상 살아있는 전통 속에서만 성서는 하느님 말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교회와 교도직의 역할이 필요하게 된다.
4.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이루는 교회 안에 전통은 살아 있는데,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로부터 교도직무를 위임받은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주교들은 사도단의 단장인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교황과 일치하여, 계시진리를 오류로부터 보호하고 관리하며 그릇됨이 없이 가르칠 책임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 제1차 바티칸공의회(1869-1870년)는 이렇게 선언한다. "교도직(敎導職)의 임무는 계시된 바의 내용을 충실히 보관하고, 유권적으로 판단하며, 그르침이 없이 선언하는 데에 있다"(D. 3020, 3069, 계시헌장 10항 참조).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교도권(敎導權)은 물론 사도전래의 신앙규준 위에서 군림하거나 그것에서 독립하여 기능을 발휘할 수는 없고, 그 밑에서 그것에 봉사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된 바의 전달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오류로부터 신앙인들을 보호하는 데에 그 본래의 기능이 있다.
5. 이제 우리는 결론적으로 현대,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가톨릭과 개신교 측의 입장들을 종합하여 상호 접근하는 점들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개신교 측의 입장을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주로 1963년 몬트리올에서 열린 세계 교회회의신학문제 전담기구인 ''신앙과 질서'' 위원회 제4차 회의 보고서를 참고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전통에 관한 개신교 측의 가장 폭넓은 이해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① 계시에 대한 새로운 이해 : 성전문제의 권위자인 이브 콩가르(Yves Congar)와 몬트리올 보고서, 그리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계시헌장은. 모두 계시를 성삼이신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에로의 부르심으로 파악한다. 이로써 계시진리가 성서나 성전에 ''들어 있다''는 표현을 지양하게 되었다. 그래서 계시헌장도 제1장에서 하느님의 자기계시로서의 계시관을 피력하고 난 후에야 제2장에서 이 계시의 전달, 즉 성전문제를 다루고 있다.
② 그리스도교 전체로 이해된 전통관념 : 계시헌장과 몬트리올 보고서는, 모두 성서와 전통을 병립시킬 수 있는 두 가지 실체로서가 아니고, 전체로서의 전통 안에 신앙생활상의 관행 및 실천뿐 아니라 성서 자체까지 포함한 그리스도교 유산이 다 내포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계시헌장(8항)은 이렇게 말한다.
"사도들로부터 전해진 바는 하느님 백성의 생활을 거룩히 인도하고 믿음을 북돋아 주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교회는 교리와 생활과 전례에 있어서 ''교회 자신의 모든 것''과 또한 ''교회가 믿는 모든 것''을 영구히 보존하며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전한다. 몬트리올 보고서도 전통을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하여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복음 그 자체"라고 말한다.
③ 그런데 교회의 현실 전체로서의 전통은 항상 구체적인 전통들로서만 표현되고, 그 자체로서 순수하게 나타날 수는 없기 때문에, 이 많은 전통들 속에서 어떤 것이 순수한 전통에 속하는 지를 판별하기 위한 규준의 문제가 제기된다. 계시헌장(4항)은 성서가 신학의 영혼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문제에 있어서 성서가 차지하는 탁월한 역할을 재확인하였다.
④ 그러나 다른 한편, 같은 계시헌장은 성서만이 모든 경우에 다양한 전통들 속에서 순수 전통을 구별해내는 유일한 규준이 될 수는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교회는 모든 계시진리에 대한 확실성을 성서에서만 취하는 것은 아니다"(계시헌장 9항).
⑤ 성령의 역할 : 전통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행된다. 이브 콩가르가 강조한 대로 전통의 순수성을 유지하며,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자기통고에 대한 본래의 체험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종적으로 보장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계시헌장은 이 점을 잘 표현한다. "복음의 생생한 음성이 성령에 의해서 교회에, 교회를 통해서 세계에 울려 퍼지고, 성령은 믿는 이들을 완전한 진리에로 인도하시며 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온전히 머무르도록 인도하신다"(계시 헌장 8항).
⑥ 결국, 우리는 제 2차 바티칸공의회와 함께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다. "성전과 성경과 교회의 교도권은 하느님의 가장 현명하신 계획에 의하여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이 성립될 수 없고, 이 세 가지가 동시에 또한 각각 고유한 방법으로 한 성령의 작용 아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기여하도록 상호간에 연관되어 있고 결합되어 있음은 명백한 일이다"(계시헌장 10항). (李炳浩)
[참고문헌] O. Cullmann, La tradition, Neuchatel, Delachaux-Niestle 1953 / G. Ebeling, Wort Gottes und Tradition, Studien zu einer Hermeneutik der Konfessionen, Giittingen 1964 / Y. Congar, La Tradition et les traditions, Paris. Fayard 1960 et 1964 / J.R. Geiselmann, Die heilige Schrift und die Tradition, Fribourgen-Brisgau, Herder 1962, Coll. "Quaestiones disputatae", 18 / G. Tavard, Ecriture ou Eglise?, La crise de la Reforme au XVI siecle, Paris, Le Cerf 1963 / K. Rahner, J. Ratzinger, Revelation et Tradition. Paris, Desclee de Brouwer 1967X / P. Lengsfeld, Tradition el Ecriture, Leur rapport, dans "Mysterium salutis", t.2, Paris 1969 / K.H. Weger, Tradition in "Sacramentum mundi", Herder 1970 / K. Rahner, Scripture and Tredition in "Sacramentum mundi", Herder 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