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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의 예정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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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1-03 조회수1,142 추천수1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경의 예정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여러 곳에서 예정론적인 말씀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이러한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어느날 한 말씀을 만났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냐?
하느님의 어떤 사랑과 자비 또는 그동안 내가 이해하고 알고 있는 하느님의 어떤 모습과

상충되는 말씀으로 그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절대로 되실 수 없는 말씀이기에 그랬다. 한 말씀을 이해하려고 무척 애를 많이 썼다.

정말로 이해가 어려운 말씀은 이것이었다.

 

"그래서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이 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졌고 그들이 귀로는 둔하게 들었으며 그 눈은 감았도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지 못하게 하며,

내가 그들을 고쳐주지 않으려 함이로다."(마태 13,14-15)

 

마태오 복음 13장에 나오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은 본디 이사6,9-10의 말씀이다.

어디에 나오는 말씀이든 이 말씀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만드셨고 더군다나 우리는 당신의 자녀라고 하시는 분께서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까? 도저히 이해불가였다. 참으로 오랜 시간 가슴 앓이를 했다.

 

그런데 어느날 200주년 기념 성서 주해서를 공부하면서 깨닫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1) 이스라엘 백성 절대다수는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신 예수를 배척했다.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이는 인간의 논리만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 불신 현상을 하느님의 예정설로 풀이하게 되었고

이때 성서적 근거로 곧잘 이사 6,9-10을 인용하곤 했다(마르 4,12= 마태 13,14-15;

사도 28,26-28; 요한 12,39-40).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도록 부정적으로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공관복음 전승의 경우, 이미 마르코 이전에 부정적 예정설이

있었는데(마르 4,11-12 단절어) 공관복음 작가들은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 이

부정적 예정설을 수용했다.

 

2) 마태오의 관점: 하느님께서 제자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들을 알게 해주셨지만

이스라엘에게는 그렇게 예정해 주시지 않았다(마태 13,11). 그러니 제자들은 점점

더 알아듣게 되고 이스라엘은 점점 못 알아듣게 된다(마태 13,12). 이미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부정적 예정으로 말미암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처사를 본받아 예수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비유들로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마태 13,13). 하느님의 부정적 예정의 성서적 근거로 칠십인역 이사

(LLX) 6,9-10을 인용한다(마태 13,14-15).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특히 비유들을 이해하니 복되다(마태 13,16-17).

 

이 말씀을 토대로 성경의 예정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 성경을 집필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시고 계신지를 먼저 이해해야 했다.

 

여기서부터는 그동안 제가 공부하며 이해한 내용입니다.

 

성경은 일어났던 어떤 역사적 사실(사건), 상황을 신앙의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역사적 사실(사건), 상황 등을 신문 기사처럼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공동체에 맞는 어떤 신앙의 관점으로 해석해 주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니

그토록 이해가 힘들던 말씀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또한 어떤 말씀 한 구절이 이해가 안 되면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이해하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속성 안에서 함께 이해할 때 바른 이해가 됨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에게 하느님께서 왜 그러한 말씀을 주시고 계신가?
가장 관심있게 보아야 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이 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졌고 그들이 귀로는 둔하게 들었으며 그 눈은 감았도다.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아무리 구원해 주시려

해도 방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

사랑인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을 볼 때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보았고 함께 살았는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깨닫지

못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하느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정해 놓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 하느님께서 정해 놓은 것처럼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상황이 그만큼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제 유다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유다의 멸망도 위의 어떤 맥락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멸망하도록 정해진 사람은 없습니다. 부족하고 한계를 지닌 인간도 자기 자식이

귀하거늘,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그 중에 한 명을 뽑아 악인을 만들지 않거늘 어찌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 그런 일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겠는지요? 

복음서을 통해 볼 수 있는 예수님과 유다의 어떤 모습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다가 회개할 시간을 얼마나 주셨고 애타게 기다리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따로 혼자 있을 때 유다가 배반할 것을 말씀하시지 않고 제자 공동체가 함께 있을 때

유다의 배반 예고를 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으셨을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유다의 배반은 유다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공동책임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 예수님은 공동체로 교회를 세우

셨기 때문입니다. 공동체가 함께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12제자가 함께 있을 때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공동체는 그 말씀에 어떤 반응을 했는가요? 그가 누구인지 찾아 그렇게 하지 않도록

했어야 하지 않는지요? 그러나 복음서 어디에도 제자단이 그러한 애쓴 구석이 없습니다.

나만 아니면 되는 것이지요. 실지로 제자들은 서로 "저는 아니지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태 26장 참조).

 

그리고 어느 부분에서는 예수님과 유다가 직접 대면하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아시고 계시다고 유다가 알아 듣도록 말씀을 하시나 유다는 어떤 반응을

하고 있는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 26,25 참조)

 

유다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너를 다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만 속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속인 사람입니다. 이것이 유다가

멸망의 길로 간 이유지 하느님께서 누군가 멸망하도록 정해졌기에 그렇게 된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 자신이 계획한 모든 것이 드러나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상책인데 유다는 예수님만 속인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도 속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은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라고 했던가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예정론에 대한 이해는 앞으로 벌어질 어떤 사건에 대한

예정론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있었던 사건을 신앙적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예정론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는 제 생각입니다.

 

이상은 그동안 공부하며 이해한 내용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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