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생활 속의 성경: 창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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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0-12-14 | 조회수6,885 | 추천수1 | |
[생활 속의 성경] 창문 (1)
다시 또 다른 일주일.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히 줄어들 법한 산적한 일들은 일 밀리미터도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일이라고 하니 생각나는 단어가 있다. 워라밸. 일과 삶의 밸런스를 맞춰야 한다는 신조어라 한다. 이 단어가 유행을 타고 너의 머릿속에도 나의 머릿속에도 들어가 있지만, 현실에서는 일하면서도 쉴 생각을 하고 쉬면서도 일할 생각을 한다. 양쪽이 서로 침범하고 있으니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과 삶의 밸런스를 맞추려면 그것 고유의 무게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과 삶을 분리하려 물리적으로 삶의 자리를 잠시 떠나는 선택을 하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환경이나 사람과의 만남, 캠핑 화로의 모닥불이나 소리 내어 흐르는 시냇물을 보며 멍 때리는 불멍이나 물멍으로 무겁게 처진 저울의 균형을 맞추려 힘쓴다. 그렇지만 떠나는 게 쉽지 않은 사람에게는 큰 맘에 큰 맘을 더해 먹어야 어쩌다 가능한 일이다.
불멍 물멍이 불가능하니 잠깐 짬을 내어 김이 나는 커피를 들고 창가에 기대어 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커피 모델이 되어 보기로 한다. 그나마 일하는 시간 중에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선택이다.
커피를 들고 창밖을 본다. 미세 먼지가 없다는 아침 일기예보의 말을 믿기로 하고 창문을 살짝 연다. 집 밖 새 공기가 창문 사이로 시원하게 들어온다. 탁했던 집 안 공기가 빠져나간다. 마음속 공기도 들어오고 나가 균형을 찾는다. 여섯 번째로 살펴볼 집 안의 장소, 창문이다.
창가는 특별하다. 창문이 제공하는 구체적인 시야와 틈새를 통해 의도하지 않았지만, 불쑥 스미듯 찾아오는 기억들을 이 창가에서 만난다. 사뭇 달라져 버린 지금의 창밖 풍경을 보며 지난 계절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지난 계절에 만났던 사람들, 그 사람들과 나눴던 대화, 기쁨, 실수… 시간이 지나 잊힐 줄 알았던 기억들이 자기 친구들을 데려와 ‘나 아직 살아 있다’며 자기 색을 입혀 흐릿하지만 어여쁜 그림을 그린다. 이 그림은 그 사람 안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에게 말해준다. 창가에 있는 그는 이 그림을 보며 피식 웃기도 눈이 흐려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이 그림이 가까운 미래에 다시 그려지길 희망한다. 세상에서 잠시 멀어진 시선이 삶과 감정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순간이다.
뒤돌아볼 틈 없이 시간에 쫓기며 숨 가쁘게 시간을 보내는 현대인의 삶은 오직 앞만 보며 성과를 내도록 몸과 정신을 강요한다. 감정을 드러내는 사치를 부리지 말고 무언가를 이룩하고 건설하고 실현하여 완벽한 사람이 기필코 되어야 한다고 우리를 재촉한다. 삶의 여정에서 매일 새롭게 계획하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고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긍정적이다. 그러나 자신이 계획한 일이 미래에 틀림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믿음 하나만 남은 채 나와 네가 맺어온 관계의 풍경이 그저 먼 과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일까?
사람은 우연의 존재다. 원인과 결과를 나 자신이 예측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삶의 교차로에서 발생하는 수없이 많은 사건과 이야기는 우연적이다. 우연하게 만들어진 사건과 이야기는 잠깐 있다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소멸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소멸한 듯 보였던 우연의 사건과 이야기가 창가에서 본디 모습을 드러낸다. 우연 속에 필연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연은 우연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을 숨겼다가 어쩌다 열린 창문 틈새로 하느님의 숨(창세 2,7 참조)이 들이치면 그제야 사랑이라는 제 모습을 빼꼼히 드러낸다. [2020년 12월 13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생활 속의 성경] 창문 (2)
현대인에게는 사각 격자 형태의 창문이 익숙하다. 이 격자에는 보통 안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고 또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리가 끼워져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런 형태의 창문이 성경 시대의 팔레스티나 지역의 그것과 동일하지 않더라도 밖과 안이 연결되고 또 바라보는 기능은 동일하다. 특별히 집 안의 창문을 이야기할 때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익숙한 체험을 바라보는 ‘눈’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새로운 공기를 느끼며 맞는 다른 세상이나 끝도 없이 펼쳐진 넓고 먼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그것이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홍수 이야기가 있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 “사람들의 악”으로 타락하고 “모든 살덩어리들의 폭력”으로 세상이 채워졌음에 마음 아파하셨다(창세 6,5-13 참조). 그래서 그들을 없애 버리시기 위해 세상을 물로 덮으셨다. 그것은 마치 창조 이전 세상이 꼴을 갖추지 못했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창세 1,2 참조).
노아 만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는 홍수가 있기 전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다. 홍수가 나고 물이 세상을 삼켰다. “사람들의 악”과 “모든 살덩어리들의 폭력”을 덮친 물 위로 노아의 방주가 떠올랐다. 이 방주 안에서 노아는 창문을 통해 까마귀와 비둘기를 날려 보낸다(창세 8,7-12 참조). 하느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세상에 자신의 발을 내딛기 희망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뜻 모를 고통, 잔인한 죽음, 세상 모든 형태의 폭력과 같은 ‘악’에 잠겨 있는 듯한 세상을 체험한다. 청량하고 맑은 공기를 원하지만 꺼칠하고 떨떠름한 공기로 숨을 쉬고, 늘 벚꽃 날리는 핑크빛 풍경이 계속해서 펼쳐지기를 원하지만 산성비 내리는 흐린 잿빛 풍경의 끝은 예보가 어렵다. 밖을 내다보는 창문을 닫고 싶은 충동이 일상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노아처럼 물로 구원받았다.
하느님께서 물로 세상을 징벌하시는 듯 묘사됐지만, 사실은 물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신 것이다. 물이 휩쓸어 간 것은 악이었고 그 가운데 생명은 남아있다. 노아처럼 우리의 방주에서 새롭게 창조된 땅을 밟기를 희망하며 열린 창문으로 비둘기를 날려 보낼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눈’은 계약의 징표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이 연결되어 있다는 징표인 무지개를(창세 9,16 참조).
아가서에 등장하는 ‘연인’의 창문은 사랑 가득한 공간이다(아가 2,8-14 참조). 창문 틈 사이로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이는 그녀가 자신과 가까이 있어 주기를 바란다. 이 사랑하는 마음이 그 자신을 더없이 행복하게 하고,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로 들어 높여주는 것을 느낀다. 동시에 그는 창가에서 자신의 연인과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그렇게 그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창조물들이 파괴되는 이유는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오염된 이유는 인간의 행태가 자연을 사랑으로 돌보기는커녕 오로지 착취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도구가 되는 이유는 사랑을 일치보다는 쾌락으로 정의 내리기 때문이다. 창틈으로 바라보는 연인의 눈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것을 안다면 굳이 점령군의 눈으로 주변을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
창가에 서서 커피잔 속 바닥이 드러날 때 즈음,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도 창가에 서서 멀리서 오는 아들을 바라봤을까를 생각했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버선발로 달려가 그를 안고 입 맞추었겠지. 그런데 그렇게 만나기까지 얼마나 창가에서 기다렸을까. 자, 이제 그만 창가에서 벗어날 시간이다. [2021년 2월 28일 사순 제2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노송동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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