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가르침의 준비
145. 설교의 준비는 오랜 시간의 연구, 기도, 성찰, 그리고 사목의 창의성을 쏟아야만 하는 중요한 과업입니다. 저는 잠시 멈춰서 강론을 준비하는 한 방법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제안이 당연하겠지만, 저는 이 귀중한 일에 양질의 시간을 바쳐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임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떤 사목자는 수행해야 할 과제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 같은 준비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감히 매주 이 과제를 위해 개인시간과 공동시간 가운데 충분한 시간을 바쳐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중요한 활동에 시간을 덜 할애해서라도 말입니다.
강론 중에 활동하시는 성령께 대한 신뢰는 단순히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며 창의적인 것입니다. 성령께 대한 신뢰는 우리 자신과 모든 능력을 하느님께서 이용하실 수 있는 도구로 바칠 것을 요구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설교가는 “영성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은사에 대해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사람입니다.
진리에 존경심을 가집시다
146. 성령을 기도 속에서 부른 다음, 첫걸음은 성경 본문에 우리의 모든 주의를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 본문이 우리의 강론의 기반이 되어야합니다. 어떤 특정 본문이 갖는 메시지에 머물러 그것을 이해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존경심”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이 우리보다 항상 탁월하다는 것과 “우리는 말씀의 주인도 소유자도 아니며, 그 파수꾼, 전달자, 종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의 겸손입니다. 말씀에 대한 이런 겸손한 태도와 경외하는 존경심은 그 말씀을 왜곡하지 않기 위해 거룩한 두려움과 많은 주의를 기울여 말씀을 연구하는데 시간을 할애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다른 모든 관심거리들을 제쳐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 본문에 시간과 관심과 집중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다른 모든 관심사를 놔두고 차분하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빠르고, 쉽고, 즉각적인 결과를 바라면서 성경의 본문을 읽으려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강론에 대한 준비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물에 한참의 고요한 시간을 바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하느님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을 말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필요한 시간만큼 충분히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든 참된 제자들이 “말씀하십시오. 주님, 당신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2사무엘 3:9)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147. 무엇보다 우리가 읽은 말씀의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분명해 보이지만 항상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것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즉, 우리가 연구하는 성경의 텍스트는 2-3천년이나 된 것이며, 그 언어는 오늘날 언어와 매우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번역된 말씀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거룩한 저자가 말하고 싶어한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문헌 분석이 제공하는 다양한 도구들은 잘 알려졌습니다. 즉 반복하거나 강조하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본문의 구조와 특이한 말투를 확인하는 것, 여러 등장인물이 수행한 역할을 고려하는 것 따위가 그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본문의 세세한 것을 전부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본문의 주요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구조와 통일성을 부여하는 메시지 말입니다.
만일 설교가가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의 가르침은 거의 아무런 통일성도 질서도 갖추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으며 다른 사람을 자극할 수도 없는 그런 여러 생각들을 단순하게 모아놓은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중심 메시지는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소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저자의 생각뿐만 아니라 그가 만들어내고 싶었던 효과가 무엇인지 알게 합니다. 만일 본문이 위로하기 위해 쓴 것이라면, 그 본문은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권고하기 위해 쓴 것이라면 교의를 가르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에 관해 무엇인가 가르치기 위해 쓴 것이라면, 다양한 신학적 의견을 전개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찬미와 선교적 파견을 위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전하기 위해 쓴 것이라면, 최근 뉴스에 관해 말하기 위해 그 본문을 사용하지 않도록 합시다.
148. 분명히, 본문에서 중심이 되는 메시지의 의미를 합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메시지를 교회가 전한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연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성경 일부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영감을 불어넣었다는 것과, 어떤 특정 지역의 백성이 그들의 인격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도록 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이게 성경 해석에서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것은 같은 성경의 다른 가르침과 모순이 되는 잘못되거나 부분적인 해석을 방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르쳐야 할 본문이 특별하고 독특하게 강조한 것을 우리가 약화시킬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루하고 헛된 가르침이 갖고 있는 결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선포된 본문이 본래 갖고 있는 힘을 전달하지 못하는 그 무력함입니다.
말씀을 인격화 합시다
149. 설교가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말씀과 인격적으로 대단히 친숙해야만 합니다. 말씀에 대한 언어학적 혹은 주석적 지식이 분명히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씀이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깊게 파고들어 자신 안에 새로운 전망이 생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부드러운 마음과 기도하는 마음을 갖고 그 말씀에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말씀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자라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강론을 준비할 때, 매일 그리고 매주 우리의 열정을 쇄신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교역자의 거룩함의 정도는 말씀의 선포에 실제 효과를 본다”는 것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설교합니다.”(1테살로니카 2,4)는 바오로 성인의 말씀대로입니다. 만일 우리가 가르칠 말씀을 제일 먼저 듣는 사람이 되기를 열렬히 바란다면, 그 말씀은 분명히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에게 전달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가득한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마태오 12,34)이기 때문입니다. 주일 독서 말씀이 갖는 그 모든 광채가 먼저 사목자의 마음에서 울려 퍼진다면 신자들의 마음에서도 그 말씀이 울려 퍼질 것이다.
150.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지만 그 말씀으로 빛이 나지 않으면서 다른 이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그런 교사들에게 화를 내셨습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오 23,4) 야고보 사도는 “많은 사람이 교사가 되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야고보 3,1)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가르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먼저 철저하게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의 일상에서 구체화 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르침은 결실을 많이 내는 진지한 활동이 될 것입니다. “설교가가 계획한 것을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그런 활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이유 때문에, 우리가 설교 내용을 준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그 말씀에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는”(히브리 4,12) 것처럼 살아있으며 능동적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매우 큰 사목적 중요성을 갖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목격한 것에 대한 증언을 선호합니다. 사람들은 “마치 자기들이 하느님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복음전파자 자신이 잘 알고 친숙한 하느님에 대해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151. 우리는 결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오솔길을 따라서 걸으면서 계속해서 성장하고 또 성장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무기를 내려놓지 맙시다. 핵심은 설교가가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구원하셨으며, 그분의 사랑은 항상 마지막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런 아름다움과 조우했을 때, 설교가는 빈번하게 자신의 생활이 마땅히 영광을 받으셔야 할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것이며, 그렇게 위대한 사랑에 보다 완전하게 응답하기를 진정으로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만일 하느님의 말씀이 그의 생활을 움직이고, 그에게 도전하고, 그를 재촉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일 그 말씀과 함께 기도할 시간을 바치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 거짓 예언자, 사기꾼, 천박한 협잡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빈곤을 인정하고 헌신하면서 성장하기를 열망함으로써, 그는 항상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사도행전 3,6)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살아있고, 자유로우며, 창의적인 존재로서 우리를 이용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은 당신 말씀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기 전에 우선 우리 마음으로 들어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지적 분야만이 아니라 전 존재에 걸쳐 설교가를 감화시키고 사로잡아야 합니다. 말씀을 재촉하신 성령께서는 “교회의 시초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성령에 사로잡히고 인도되는 모든 설교가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그 성령께서 설교가의 힘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말씀을 그의 입술 위에 얹어주십니다.”
영적 독서
152. 주님께서 당신 말씀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을 듣고, 우리 자신이 성령으로 변형되는 특별한 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입니다. 그것은 기도 때에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이 우리를 비추고 새롭게 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성경 독서로 기도하는 것은 본문의 중심 메시지를 규명하기 위해 설교가가 연구하는 것과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그것은 그 연구로 시작해야만 하고, 그 다음에 그 같은 메시지가 자기의 삶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를 식별하는 것입니다. 한 본문을 영적 독서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본문을 우리한테 편리한 대로, 우리가 이미 결정한 것을 확인하는 데 이용하고, 우리의 사고방식에 맞추어서 읽기 쉽습니다. 이런 독서는 자칫하면 거룩한 어떤 것을 우리를 위하여 이용하게 하고, 이러한 혼동을 하느님 백성에게 전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가끔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2코린토 11,14)는 말씀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153. 하느님 앞에서 본문을 침착하게 읽는 동안에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 이 본문이 ‘저한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당신께서 이 본문으로 바꾸고 싶으신 저의 삶은 무엇입니까? 제가 이 본문 때문에 불편한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왜 이 본문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까? 혹은 제가 이 본문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를 움직이는 이 말씀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저를 사로잡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그것이 저를 사로잡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할 때 유혹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불편함이나 부담을 느끼고 외면하는 것입니다. 다른 일반적 유혹은 이 본문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의미를 자신한테는 적용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의 분명한 의미를 약화시키기 위해 핑계거리를 찾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혹은 우리가 아직 준비하지도 않은 어떤 결정을 요청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너무 많을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때문에 하느님 말씀과 만나면서 더 이상 즐거움을 얻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어느 누구도 아버지 하느님보다 인내심이 강한 분이 없다는 것과, 어느 누구도 그분보다 더 이해하고 기다리는 분이 없다는 것을 잊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항상 앞으로 나서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준비되지 않았는데도 완전한 응답을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단지 우리가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바라보고 자신을 당신 앞에 정직하게 내놓으라고, 그리고 우리가 아직 성취할 수 없는 것을 당신께 청함으로써 계속해서 성장하라고 하실 뿐입니다.
백성의 말을 들읍시다
154. 설교가는 백성의 말을 들어야 하며, 백성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야 합니다. 설교가는 말씀을 묵상해야 하지만, 백성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방법으로 설교가는 “삶과 세상의 열망, 풍요로움과 한계, 세상이 기도하는 방법, 세상이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삶과 세상을 관찰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런 것들이 인간적 모임의 이런 저런 특징입니다.” 그러면서 설교가는 “실제 백성에,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그들의 표지와 상징에, 그들의 물음에 답을 내놓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설교가는 성서 본문을 인간 상황에, 즉 하느님 말씀의 빛을 얻고자 외치고 있는 그들의 체험에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심은 똑똑함이나 계산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경건하고 사목적인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사건에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읽기 위한 영적 감수성”이며,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를 찾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이런 저런 상황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준비는 복음적 식별 연습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빛 속에서 “하느님께서 역사의 환경 속에서 울려 퍼지게 하시는 부르심을 알아보려고 노력합니다. 이 환경에서 그리고 이 환경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믿은 이들을 부르십니다.”
155. 그런 노력을 기울일 때, 재회의 기쁨, 절망의 순간, 혼자가 되는 두려움, 다른 이들이 고통에 대한 동정심,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같은 보통 사람이 겪는 체험이 우리에게는 부족하겠지만, 그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백성의 삶에 실제로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해 폭넓고 깊은 감수성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도 묻지 않는다면 절대로 응답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백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최근 소식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텔레비전이 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이 개종, 경신례, 형제애와 봉사에의 헌신 따위를 요청하실 때, 그 하느님 말씀이 강렬하게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어떤 사실과 스토리로 시작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현안에 대한 설교가의 해설을 듣고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들도 항상 있을 것입니다.
강론의 자원
156. 어떤 사람은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기 때문에 자신이 훌륭한 설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즉 설교를 구체적으로 구성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백성이 듣지 않거나 음미하지 않는 것을 보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마도 메시지를 제시하는 적절한 방법을 찾는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화의 내용이 갖는 분명한 중요성이 절대로 그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심오한 영적 관심과 비슷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에 봉사하는 데 우리의 모든 재능과 창의성을 투입함으로써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이웃에게 형편없는 것을 주지 않으려는 훌륭하고 적극적인 이웃사랑을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가장 잘 다가가기 위해서 강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조언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간결하게 말하고, 알면서도 침묵하는 사람이 되어라”(집회 32,8)
157. 몇 가지 예를 들어서, 우리의 가르침을 풍요롭게 하고, 보다 호소력 있게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자원들을 찾아봅시다.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가르칠 때 이미지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즉 어떻게 마음 속에 상을 그리게 할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례들이 특정 요점을 분명히 하는데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사례들은 보통 마음에만 호소합니다. 반면에 이미지들은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사람들이 더 잘 음미하고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됩니다. 사람을 사로잡는 이미지는 메시지를 낯익은 것으로, 편한 것으로, 실질적인 것으로, 일상과 관련된 것으로 만듭니다. 훌륭한 이미지는 사람들이 메시지를 맛볼 수 있게 하고, 복음을 향한 욕구를 불러일으켜 그 의지를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옛 스승께서 저에게 말씀하신 훌륭한 강론은 “생각, 감성, 이미지”를 가져야만 합니다.
158. 바오로 6세는 “신자들은 가르침에서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단순하고, 명료하고, 직접적이며, 제대로 적용된 가르침이라면 그 가르침에서 커다란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단순성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헛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용하는 언어가 백성이 이해할만한 것이어야 합니다. 설교가는 자주 청중의 일상 언어가 아닌 단어, 곧 학습 중에 배운 단어와 특별한 배경을 갖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런 단어들은 신학이나 교리교육에 적합하지만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교가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자기에게 너무 익숙해서 모든 사람이 당연히 그 단어를 이해하고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백성의 언어에 맞추어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다가가기를 원한다면, 그들의 삶을 공유하고 사랑의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성과 명료성은 다릅니다. 우리의 언어는 단순할 수 있지만, 우리의 가르침은 분명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제대로 구성되지 않거나, 논리적 전개가 결여되어 있거나, 혹은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다루려 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강론의 주제가 단일하고, 문장 사이의 분명한 관계와 질서를 가져서, 백성이 설교가의 말을 쉽게 따라잡아 그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159. 훌륭한 강론의 다른 특징은 그것이 긍정적이란 것입니다.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강론보다는 무엇을 더 잘 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는 강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강론이 부정적인 어떤 것에 대한 주의를 끌었다면, 마찬가지로 긍정적이며 바람직한 가치를 가리키려 해야 할 것입니다. 강론이 불평, 탄식, 비판, 그리고 비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긍정적인 가르침은 항상 희망을 주고, 미래를 가리키며, 우리를 부정에 덫에 걸린 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보다 더 호소력 있는 가르침을 펼치기 위해 사제, 부제 그리고 평신도가 자원들을 발굴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만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IV. 보다 깊은 선포(케리그마)의 이해와 복음화
160. 주님의 선교 명령에는 신앙의 성장이 포함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오 28,20) 따라서 첫 번째 선포가 지속적인 양성과 성숙을 요구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복음화는 성장의 과정을 겨냥합니다. 그 성장 과정은 각 사람과 그의 삶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진지하게 취하는 것입니다. 복음화는 이 성장의 열망을 자극해서, 우리 각자가 온 마음을 다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디아 2,20)라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161. 이런 성장의 소명이 주로 혹은 배타적으로 교의 형성과 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당신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으로 보여주신 모든 것을 “지키는” 것과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다른 덕목들과 함께 첫째 계명이면서 가장 큰 계명인 새 계명,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가장 잘 알아보게 하는 그 계명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명백하게, 신약성경 저자들이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메시지의 핵심을 제시하려고 할 때마다, 이웃사랑을 핵심 조건이라고 제시합니다.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그러므로 이웃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이는 바오로 성인의 말씀입니다. 바오로 성인에게 사랑의 계명은 율법을 완성할 뿐만 아니라 율법의 핵심과 목적입니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갈라디아 5,14)
바오로는 자기의 공동체에게 그리스도인 생활을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여정으로 제시합니다. “여러분이 서로 지니고 있는 사랑과 다른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도...주님께서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길... 빕니다.”(1테살로니카 3,12) 마찬가지로 야고보 성인도 그리스도인이 율법 전체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신 지고한 법을”(야고보 2,8) 이행하라고 권고합니다.
162. 다른 한편 응답과 성장의 이 과정은 항상 하느님의 선물을 뒤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태오 28,19)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아버지의 무상의 선물과 그분 은총의 우선성(에페소 2,8-9; 1코린토 4,7 참조)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영광을 드리는 그 변치 않는 성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변형될 수 있습니다.
선포와 신비의 전달인 교리교육
163. 교리교육은 신앙의 성장에 기여합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좌와 여러 주교회의가 발행한 교도권을 갖는 다수의 교리교육 관련 문헌과 보조 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특히 사도적 권고 (1979), <교리교육의 일반 지침>(the General Catechetical Directory 1997), 그리고 그 내용을 이 자리에서 다시 다룰 필요가 없는 다른 문헌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믿는 몇 가지를 간략하게 고찰하고 싶습니다.
164. 교리교육에서도, 우리는 첫 선포 혹은 케리그마가 갖는 근본적인 역할을 재발견했습니다. 케리그마는 모든 복음화 활동과 교회 쇄신 노력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케리그마는 삼위일체적입니다. 성령의 불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습니다. 그분은 죽음과 부활로써 우리에게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를 보여주시고 전하십니다. 교리교사의 입술에서는 다음의 첫째 선포가 끊임없이 울려 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분은 당신을 비추고 당신에게 힘을 불어넣어주고, 당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매일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첫째 선포인 것은 그것이 처음에는 존재하고, 그 후에 잊어지거나 다른 더 중요한 것으로 대치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중심 선포이기 때문에 질적인 의미에서 첫 째 선포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반드시 자꾸 들어야하는 선포, 우리가 교리 교육 전 과정에 걸쳐 이런 저런 방법으로 반드시 밝혀야 하는 선포, 어떤 수준이든 어떤 순간이든 선포해야 할 것이기에 ‘첫째’ 선포인 것입니다.(126) 그 때문에도, “사제는 - 다른 모든 교회 구성원처럼 - 그 자신 끊임없이 복음화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계속 성장해야만 합니다.”
165. 우리는 교리교육을 통해서 케리그마 보다 더 “확실한” 무엇으로 인도하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의 그 선포보다 더 확실하고, 심오하고, 분명하고, 의미가 있으며 지혜로 가득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교육은 케리그마를 더 깊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교리교육의 활동은 언제나 케리그마를 밝게 비추고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교리교육이 다루는 모든 의미를 보다 완전하게 이해하도록 해줍니다. 케리그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무한함을 향한 열망에 부응하는 메시지입니다. 케리그마가 중심이라는 것은 오늘날 가장 필요한 요소들을 강조합니다.
교리교육은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이 인간의 도덕적 종교적 의무 이전에 하느님 구원의 사랑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교리교육은 진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자극해야 합니다. 교리 교육은 기쁨, 격려, 생생함, 그리고 조화의 균형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들에 대한 가르침은 때로는 복음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인 몇 가지 교의 정도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에게 메시지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즉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에게는 접근가능성, 대화준비성, 인내, 심판하지 않는 따뜻함과 환대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166. 최근 수십 년 동안 발전한 교리교육의 다른 측면은 신비를 전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전체 공동체를 포함해서 체험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 하나이고, 그리스도교의 시작을 드러낸 전례의 표지들을 새롭게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많은 규범과 프로그램들이 신비를 전하는 데에 있어서 쇄신 작업과 관련해서 아직까지 충분하게 검토되지 못했습니다. 신비를 전하는 데에 있어서 쇄신은 교육에 대한 각 공동체의 식별에 기초해서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교리교육은 말씀의 선포 가운데 하나이며, 항상 그 말씀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적합한 배경에 따른 호소력 있는 제시, 설득력 있는 표상과 기호 사용, 폭넓은 성장과정의 주입, 그리고 모든 인간적 요소를 듣고 응답하는 공동의 여정 안에 통합시키는 것도 필요합니다.
167. 교리교육의 모든 형태는 “아름다움의 길”을 잘 따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이 옳고 참된 무엇일 뿐만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삶이 아름다운 무엇이며, 삶을 새로운 광채와 심오한 기쁨으로 채울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참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모든 것은 주님이신 예수님과 조우하는 길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학적 상대주의를 계발하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미학적 상대주의는 진리, 선, 그리고 미 사이의 불가분 유대를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조우는 미에 대해 새롭게 존중하는 것입니다. 즉 미를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하나의 수단으로 존중하고, 미를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진리와 선이 인간의 마음 속에서 빛나게 할 수 있는 수단으로 존중합니다.
만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대로, 우리가 아름다운 것만 사랑한다면, 절대미의 계시이신 강생하신 아드님은 최상으로 사랑할 만한 분이며, 우리를 당신 사랑의 유대 속으로 끌어들이십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의 길’로 교육하는 것은 우리가 신앙을 전수하려는 노력의 일부여야 합니다. 각 개별 교회는 복음화에 있어 새로운 “비유의 언어”로 신앙을 전달하기 위해 과거의 유산 위에 기초하면서 현대의 광범위하고 다양한 표현양식을 얹은 예술의 이용을 장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표징과 표상, 말씀을 소통하고 구체화하는 세상, 그리고 다른 문화 배경에서 존중받는 다양한 형태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그것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눈에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전통적인 것이 아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특별히 매력적이라 한다면, 그것들 역시 과감하게 찾아내야 합니다.
168. 교리교육의 도덕적 요소는 복음이 갖는 생명의 길에 대한 충실성에 있어 성장을 촉진합니다. 이 도덕적 요소는 지혜의 삶, 자기 목표를 달성하는 삶, 그리고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삶이 얼마나 매력적이며 이상적인 것인지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 긍정적 메시지의 빛 속에서는 도덕적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 죄악을 배척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불길한 예언을 하는 전문가, 온갖 위험과 일탈을 들춰내는 완고한 재판관이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는 의욕을 돋우는 제안을 전하는 기쁜 심부름꾼, 복음에 충실한 삶에서 빛을 발하는 선과 미의 수호자여야만 합니다.
성장 과정에서의 인격적 동반
169. 역설적으로 익명성 때문에 힘들어 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의 삶의 세세한 것에 집착하는 문화에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병적인 호기심에 집착하는 문화에서, 교회는 필요할 때마다 다른 사람을 보다 더 교감하면서 자세하게 살펴봐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품을 받은 교역자와 다른 사목 활동가는 그리스도의 친밀함과 그의 인격적 시선의 향기를 선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 사제, 수도자와 평신도 - 이런 “동반의 예술”을 전수해야 할 것입니다. “동반의 예술”은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거룩한 땅에서 신발을 벗는 법을 가르칩니다.(탈출기 3,5 참조) 이 동반하는 걸음걸이는 그리스도교 생활 안에서 치유하고, 해방하며, 성장을 장려하는 우리의 친밀함과 우리의 따뜻한 시선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확고하고 안정된 것이어야 합니다.
170. 자명한 것 같지만, 영적 동반은 다른 이들을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인도해야 합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립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을 피할 수 있다면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실존적으로 고아, 무력한 사람, 오갈 데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 주변만 맴돌며 아무 곳에도 가지 않음으로써, 순례자가 되는 것, 떠돌이가 되는 것을 그만둡니다. 만일 그들의 지기몰두를 지지하는 어떤 치료 같은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께로 향하는 순례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과의 동반은 역효과를 낳을 것입니다.
171.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우리한테는 타인과 동반하는 경험을 갖추고, 신중함과 이해심, 인내심과 성령께 순응하는 자세가 요구되는 과정에 정통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무리를 흩어버리려 하는 늑대로부터 양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듣는 기술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듣는 것 이상입니다. 소통에서 듣는 것은 친밀함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개방입니다. 이 친밀함 없이는 참된 영적 만남이 생길 수 없습니다. 들으면 바른 태도와 말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냥 방관자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 같이 존중하고 공감하며 들음으로써만 참된 성장의 길로 들어설 수 있으며, 하느님의 사랑에 완전하게 응답하고, 그분이 우리 삶에 뿌리신 씨앗의 열매를 맺는 그런 그리스도교적 이상을 향한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누구나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가질 수 있으나, 그러면서 끈질긴 “불순한 성향” 때문에 덕목을 실천하는 데 머뭇거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을 온전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덕목의 유기적 조화는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습관 속에’(in habitu) 존재합니다. 비록 어떤 형태의 조건이 그런 고결한 습관들의 ‘작동’을 방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백성이 한걸음씩 신비를 온전하게 취할 때까지 한걸음씩 인도할 교수법”이 필요합니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성숙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복자 피터 페이버는 “시간은 하느님의 사자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172. 다른 사람을 동반하는 사람은 각 사람이 처한 하느님 앞에서의 처지와 그분 은총 속에 있는 그의 삶이 ‘신비’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누구도 이 신비들을 겉으로는 완전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복음은 다른 이의 행동으로 나타난 객관적인 악을 확인한 것을 기초로 해서, 그의 행동을 바로잡아 그가 성장하도록 도우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마태오 18,15 참조) 그러나 그들의 책임과 유죄를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마태오 7,1; 루카 6,37 참조)
그렇게 훌륭하게 동반하는 사람은 절망이나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스스로 치유되도록, 스스로 씨름하도록, 스스로 십자가를 끌어안도록, 스스로 모든 과거를 뒤로 하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전혀 새로운 길을 나서도록 초대합니다. 다른 이가 우리와 동반하며 우리를 돕는다는 인격적 체험과, 우리와 동반하는 그에게 개방하는 인격적 체험은 다른 사람에 대해 공감하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 인격적 체험은 그들의 신뢰를 얻는 올바른 길을 찾도록 해줍니다. 또 우리가 마음을 열게 하고 성장할 준비를 갖추는 올바른 길도 가르쳐줍니다.
173. 진정한 영적 동반은 항상 복음화에 봉사한다는 배경에서 시작하고 발전합니다. 바오로와 티모테오와 티토의 관계는 그들의 사도적 활동 중에 이루어진 이 영적 동반과 양성의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각 도시에 머무르면서 “해야 할 남은 일을 정리하는”(티토 1:5; 1티모테오 1:3-5 참조) 사명을 맡긴 바오로는 그들에게 개인적 생활과 사목 활동에 관한 규칙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제적 동반이나 독립된 자기실현 같은 것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선교의 제자들은 선교의 제자들을 동반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174. 하느님 말씀은 오직 강론만 살찌게 하지 않습니다. 복음화 자체가 듣고, 묵상하고, 기념하고, 증언하는 그 말씀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성경은 복음화의 원천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말씀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지속적으로 스스로 복음화 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복음화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전보다 더 완전히 교회의 모든 활동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특별히 성찬례에서 듣고 기념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을 키우고 내적으로 힘을 불어넣어주어, 일상생활에서 복음을 확실하게 증언할 수 있게 합니다. 이미 말씀과 성사를 대립시킨 옛 관행을 벗어난 지 상당히 오래되었습니다. 살아있으며 효력을 내는 그 말씀의 선포는 성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며, 성사에서 그 말씀은 최대의 유효성을 달성합니다.
175. 성경 연구는 모든 믿는 이에게 열려 있는 문이어야 합니다. 계시된 말씀야말로 우리의 신앙을 전수하려는 모든 노력과 교리교육을 근본적으로 풍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화를 위해서는 하느님 말씀과 친숙해져야 합니다. 복음화는 교구, 본당, 교회 단체들이 개별적으로 또 공동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기를 장려하면서도, 진지하고 지속적인 성경연구의 기회를 제공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하느님을 찾지 않습니다. 혹은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맹목적으로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은 것이 있어서 알아야 할 것이 남아있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시된 말씀이라는 장엄한 보물을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번역: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신정동 성당,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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