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놓여 있는 아마포와 개켜진 수건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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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14-04-21 | 조회수1,429 | 추천수2 |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예수님의 부활에서 그분의 부활 장면은 누구나 쉽게 상상은 할 수가 있을 게다. 그러나 어찌 그걸 감히 우리 인간이 실시간적으로 표현할 수가 있으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 부활을 알려주는 실제 상황의 설명은 아예 없다. 그렇지만 그 부활을 확인하는 방법과 내용은 참으로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그 중에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부활의 현장을 확인하는 내용은 대체적으로 그 부활을 인정할 수 있는 상황 묘사로 그런대로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가 그 현장의 실제 모습이다. 이를 검증한 이가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 사도 요한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현장 검증을 통해서 그 자리에서 스승 예수님의 부활을 그 자리에서 바로 믿었다는 정황은 그리 없는 것 같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제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라는 내용으로 봐서 오히려 마리아 막달레나의 생각대로 예수님의 시신을 누가 가져갔다는 것을 확인했다고도 여겨진다.
그러나 이 내용에서 누가 과연 부활의 내용을 믿고 믿지 않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게다. 다만 죽은 예수님이 부활한 마지막 현장의 장소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중요하니까. 대강 세 가지로 ‘예수님은 정말 부활하셨다.’라는 걸 알려주는 현장 모습으로 소개된다.
첫째가 ‘무덤이 비었다.’는 거다. 물론 입구를 막은 돌도 굴러져 있었고. 이는 빈 무덤을 확인시켜주는 거다. 물론 여기에도 큰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돌 까지 밀고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졌다면 더할 나위 없이 부활이 각인되리라. 암튼 빈 무덤을 보여주는 게 첫째 현장 모습이다.
둘째는 ‘아마포가 놓여 있는 모습’이다. 과연 어떤 모습일까? 사도 요한은 무덤 입구에서 몸을 굽혀 그 모습을 보았지만 차마 들어갈 수는 없었단다. 시몬 베드로에 대한 배려도 물론 있었겠지만, 그 무덤 안이 과연 어떤 모습이었기에 그 사랑받던 제자, 십자가 아래에까지 성모님과 자리를 지킨 사도 요한마저 머뭇거리게 하였을까? 그 아마포의 모습은 예수님의 몸 동아리만 고스란히 빠져나간 길게 둥근 모양으로 놓여있는 것이었을 게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시신을 감싼 최초 아마포의 모습을 유지한 채 예수님의 몸만 고스란히 빠져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누가 아마포를 풀어 준 게 아닌, 최초의 감싼 모양 그대로이니 사도 요한마저 멈칫거릴 수밖에. 그렇지만 성질 급한 베드로는 바로 들어가 보았다.
셋째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과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는 현장 모습’이다. ‘수건이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는 모습’은 시신을 누가 손댄 게 아닌 것을 확인 시키는 게 아닌 예수님 스스로만이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아마포의 모습과 머리를 감싼 수건이 별도 장소에 개켜진 모습은 그 누구도 시신을 손댄 게 아닌 것을 입증시켜 주는 모습이라 여겨진다. 참으로 리얼한 현장 모습을 담은 묘사이다.
이 세 가지 부활의 모습을 입증시키는 상황 설명 말고 더 이상 뭐가 더 필요할까? 그 후 요한도 무덤에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 그는 보고 믿었단다. 무엇을 믿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는다. 막달레나 이야기대로 시신을 누가 옮겼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부활했는지의 어느 것을 믿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건 사람의 마음이야 시도 때도 없이 다 다를 수 있을 거니까. 그리고 복음사가는 그 부활의 현장을 정확하고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게 주목적이었을 것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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